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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33 조회 : 1,736




마을을 기점으로 동북쪽으로 등화재를 가볍게 끼고 돌아 십여 리만 가면 군청소재지인 논산 읍내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인 서쪽 방향으로 넓게 퍼진 들녘을 지나 십여 리 떨어진 곳에 강경 읍내가 가들막하게 보였다.

해맑고 화창한 날엔 동북쪽의 논산 읍내와 서쪽의 강경 읍내가 모두 손끝에 금방 닿을 것처럼 가참하게 바라보였다. 그리고 아침 해가 장활하게 떠오르는 소릿재 고개 너머 이십여 리 산길을 따라가면 강병육성의 요람지인 연무대에 닿을 수 있었다.
그렇게 채운면은 지리적으로 삼각의 형태를 띤 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손 대대로 농경에만 의존하여 살아온 터라 타 지역에 비해 개화의 물질문명으로부터 꽤나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만년 시골티를 벗질 못하는 작은 면소재지였다. 그 면소재지 내에서도 여태껏 전등불 하나를 못 켜고 살아가는 들녘 한가운데 외떨어진 들메마을이 내 삶의 보금자리였다.

예로부터 끝없이 넓디넓은 들녘 사방에 온갖 들꽃들이 만발하여 마을 이름을 ‘야화(野花)’ 라고 불러왔다. 마을 남서쪽 어귀엔 ‘원목다리’가 있다.
그 옛날 조선시대에는 젊은 선비들이 청운의 부푼 꿈을 품고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가는 천 리 길 중에 중간지점쯤이었다. 남도 오백 리 길을 걸어온 숱한 과객들이 등에 진 봇짐을 풀고 지친 몸을 잠시 쉬어 갔다는 주막 터의 흔적을 세월이 흘러 이제는 찾을 길이 없었다.
오랜 풍한 세월 속에 묵묵히 자릴 지켜온 원목다리를 벗이라도 삼으려는 듯 꽤나 수령이 오래된 듯싶은 아카시아 나무 한 그루가 마주바라보고 있었다.
풍운세월 비바람에 군데군데 허물어진 다리에 인적이 끊긴지 이미 오래되었다. 거무튀튀하게 들러붙어 있는 돌버슷(돌옷)으로 뒤덮인 돌기둥이 허물어져 무상한 세월의 흐름을 말하여 주는 듯했다. 그렇게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져가는 원목다리는 들녘 한곳에 버려진 듯 외롭게 남아 있었다.

마을 한복판 방앗간에선 ‘쿵쿵, 피익피익, 쿵쿵, 피익피익’ 몇 차례 고르지 못하게 가뿐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숨을 고른 듯 발동기는 온 동네가 울리도록 소리를 내며 쉴 사이 없이 돌아가고 있어 또 다른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

우물가 인수네 집엔 인수가 마루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흔들며 하모니카를 서툴게 불고 있었다. 그 하모니카는 대전으로 트럭 일을 배우러 간 인수네 큰형이 추석 선물로 사다준 중고 하모니카였다.

맞은편 준섭이네 집에는 돼지우리 앞에 준섭이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지난 장날에 사다 놓은 어린 돼지새끼 등을 긁어 주시며 애지중지 하셨다. 그리고 통나무에 기다랗게 구멍을 파 놓은 구유 속 구정물 위에 누런 쌀겨 한 바가지를 골고루 뿌려 섞어주고 있었다.

동네 우물가 건너편 주현이네 집 뒤뜰 대숲에는 참새들이 유난스레 많이 모여들었다. 참새를 잡아 짚불에 구워 먹으려는 듯 주현이가 제 동생 수영이와 함께 새그물을 마당 위에 펼쳐놓고 손질을 하고 있었다.

햇살이 빼꼼하게 비추는 고샅길에는 훈련을 마치고 휴전선 부근의 전방부대에 배치되어 첫 휴가를 나온 기남이 형이 보였다. 동네 집집마다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려 부지런히 다니는 모습이 퍽이나 믿음직스러웠다.
푸른색 군복에 검정 가죽 군화를 신고 양철조각으로 만든 이등병 계급장을 단 모자에 건강하게 그을린 구릿빛 얼굴로 고샅길로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를 졸졸 뒤따라오는 기남이 형 막내 동생 기정이가 휴가 선물로 가져온 누런 봉지 속에 담겨 있는 네모난 군용 건빵을 동네 아이들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누런 건빵 봉지 속에서 건빵을 하나씩 꺼내어 손가락으로 치켜들고 약을 올리듯 입에 넣고 있어 길가에 서 있는 동네 아이들은 잔뜩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담 너머로 아직까지 한약냄새가 물씬하게 풍겨오는 종기형네 집 대문 앞에는 앞가슴에 논산 읍내 중학교의 상징을 나타내는 마크가 선명하게 인쇄된 체육복을 멋스럽게 입은 종기형이 보였다.
그리고 면소재지에 가시려는지 자전거를 끌고 길모퉁이를 막 벗어나시는 병수네 아버지에게 머릴 숙여 인사를 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신고산 타령님’이라고 불리는 병수네 아버지께서 자전거를 타시고 우물가를 지나 면소재지 주막집에 가시려는 것 같았다.

우물가 건너편 삼식이네 집에는 삼식이 어머니가 지붕 추녀 밑에서 상수리나무 가지에 매어 놓은 빨랫줄 위에 옷가지들을 훌훌 털어 널고 계셨다. 양지바른 쪽 짚더미 앞에는 동네 어른들 몇 분이 읍내 강경 하늘가를 바라보시며 깨진 사금파리로 땅위에 글씨를 쓰시며 이야기를 나누셨다.

읍내 외곽 지점 철교 위에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해 오는 화물열차가 보였다.

옥순이네 마루 추녀 끝에 가으내 매달아 놓았던 하얀 분가루를 내는 먹음직스럽던 곶감이 이제는 모두 집어넣은 듯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마루 위에 비단 장수 아주머니가 비단 보따리를 펼쳐놓아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곱다란 비단자락에 눈길을 모으고 아주머니 한 분은 비단자락을 몸에 걸치고 가볍게 한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비단 값이 너무 비싸서 사질 못하시는 듯 아쉬운 표정으로 비단자락을 마루에 내려놓고 말았다. 그 틈새에 옥순이도 어른들 틈에 끼어 구경을 하고 있었다.

담 너머 기순이 누나네가 살던 집이 새로운 모습으로 눈에 띄었다. 기수 아저씨가 신혼집으로 쓰시려고 있는 정성을 다한 것 같았다. 흙벽엔 샛노란 나무색이 눈에 곱살하게 보이는 문짝들이 정갈하게 달려 있었다. 그리고 두 신혼부부가 읍내 성당에 가셨는지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주인 없는 집을 홀로 지키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가 마루기둥에 줄로 매어 갑갑한지 기둥 언저리를 뱅글뱅글 돌면서 끙끙댔다.

키가 나지막한 향나무 두 그루가 운치 있게 서있는 동네 우물가에는 동네 이장댁 아주머니가 고샅길 첫머리 집 우현이네 어머니와 함께 계셨다. 그리고 한 쪽에서는 중례 누나가 옹기동이에 물을 깃고 있었다.
황토 흙이 묻은 총각무를 씻으시던 기성이 형 어머니께서 타래박으로 물동이에 물을 퍼 담고 있던 중례 누나에게 말을 건넸다.

“중례야, 느네 새엄니가 느그덜헌티는 잘해주냐?”

중례 누나가 그 말에 대답을 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고 벅찼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성급하게 우물터를 빠져나갔다.

그저 뻘쭘한 얼굴로 중례 누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시던 기성이 형 어머니가 다시 말씀 하셨다.

“난 그래두 한동네 사닌께 걱정이 되구 죽은 지그 엄니 생각이 나서 물어본 건디, 어찌 어른이 허는 말에 뒤두 안 돌아보구 쌀쌀맞게 그냥 간다냐, 나두 자식 키우지만서두, 통 버르장머리 없게끔.”

못내 불편하신 모습을 하시자 옆에서 속내복에 비누칠을 하시던 이장댁 아주머니가 말을 거드셨다.

“어디, 아줌니를 무시혀서 그런다유, 지 생각에는 새엄니라구 들어왔지만, 아직까장은 썩 마음이 내키질 않는 모양 같구. 어린 영택이는 세상 물정 몰라 그렇다치더라두, 중례는 나이가 차서 이것저것 다 알 나인데. 어찌보면 귓때기 시퍼런 젊은 사람헌테 엄니란 말이 그리 쉽게 나오겠어유? 아마 이참저참해서 말을 못한 것 같으닌께, 아줌니가 이해를 허시구 서운케는 생각하지 마세유.”

김치를 담그시려 우물가에 있는 납작하게 파인 돌절구에 양념거리를 빻고 계시던 우현이 어머니께서 말을 하셨다.

“그나저나, 두 사람 금실은 어떨는지 몰라두, 아이들허구 정붙일라면 서로 간에 엄청나게 힘들 건디, 영택이 아버지만 새중간에서 이리두 저리두 못허구 죽어나겠지 뭐, 지 애비 편허게 해 줄라면 자식들이 어여 정을 붙여야 헐 틴디 그게 말대루 쉽게 되는 것두 이니닌게, 넘에 집 일이라두 맴속으로는 무지허게 걱정이 되네, 그려.”

그러자 비누칠을 듬뿍한 빨래거리를 물에 헹구시던 이장댁 아주머니가 말을 이으셨다.

“아, 그 뭐시냐, 속으로는 어떤지 몰라두, 우리 애기 아빠가 동네일 보느라구 돌아다니다가 그 집 앞에 가면, 그래두 그 여자 웃음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온다구 허는 것 보면 두 내외 사이는 좋은가 보데유. 기나저나, 그 여자가 동네루 온지두 설찮히 되는거 같은디, 으째 통 밖으로는 한번두 안 나오는지 모르것네유.”

동네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느라 꾸물거리는 발걸음을 서두는 듯 싸늘한 바람이 우물터에 불어왔다. 집에서 귀엽게 놀고 있을 순덕이와 놀고 싶은 생각에 서둘러 물지게를 지고 고샅길을 걸어 동네 어귀 쪽으로 향했다.

연자방앗간 쪽에서 ‘펑’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 물씬 풍겨오는 쌀튀밥 냄새가 고샅길로 싫지 않게 퍼져 나왔다.

종구네 거위는 뻥튀기 소리에 놀란 듯 죽을힘을 다해 소리를 내지르며 대문 밖으로 나오려 했다.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정희누나가 마루로 나와 거위에게 시끄럽다고 소리를 쳤다.

연자방앗간 앞 공터엔 몸집이 아주 작은 조랑말이 연자방앗간 나무 기둥에 매어 있었다. 그 옆에는 뻥튀기 기계를 싣고 온 마차가 놓여 있었다.
아저씨가 아주 묵직하게 보이는 뻥튀기 기계 쇠뚜껑을 열고 커다랗게 둥근 통 안에 쌀과 사카린도 몇 알 넣어 뚜껑을 닿으셨다. 그리고 잘 타오르는 장작불 위에 올려놓은 기계를 뱅글뱅글 돌리고 계셨다.
동네 아이들이 어떻게 알고 언제 그렇게 많이 모여들었는지 뻥튀기 기계 앞에 쭉 늘어서 ‘뻥’ 하는 소리가 재미있는 듯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아저씨께서 싸늘한 날씨에도 불 옆에 계셔서 그런지 얼굴과 목 언저리에 흐르는 땀을 목에 두룬 수건으로 닦으며 말씀하셨다.

“야, 이놈들아, 구경만 허지덜 말구 어여 니네들 집에 가서 느그덜 엄니헌티 튀밥을 튀겨 달라구 혀, 어여.”

그렇게 뻥튀기 아저씨가 동네 아이들을 부추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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