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세월처럼 빠른 것이 없다고 하더니 입동이 지난지도 벌써 여러 날이 되었다. 산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이 제법 한기를 느낄 정도로 차가웠다. 그런 탓에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오후에도 몸은 자연스레 움츠러들었다.
텃밭에 있는 배추들이 속이 꽉 차오르라고 몸통을 바짝 동여매 주려 집 뒤꼍 추녀 밑에서 볏짚을 한 묶음 꺼내는 내 모습을 아주머니께서 바라보셨다. 밭일을 도우시려는지 아주머니께서는 등에 업은 아기를 바짝 추켜올려 허리에 두른 포대기 띠를 야무지게 졸라매셨다. 그리고 부지런하신 성격처럼 나보다 앞을 서 배추밭으로 가려 하셨다. 그러나 나는 찬바람을 쐬면 아기가 감기라도 들까 싶어 무척이나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안 된다고 몇 번을 실랑이하여 겨우 말렸다.
텃밭에 배추를 묶어주면서 동네 쪽을 바라보았다. 둥구나무 아래에 있던 용만이 형은 강아지 몸 상태가 시원치 않아 집으로 들어간 듯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 자리에 동네 아이들이 편을 갈라 소리를 지르며 말타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마을 어귀엔 영택이 아버지가 서성이면서 화산리 건널목 벼랑바위 앞을 바라보고 계셨다. 아마도 읍내 농방에서 자개장을 싣고 오는 순아네 소달구지를 기다리시는 듯했다.
하늘 위로 한참을 잘 나는 듯싶던 가오리 모양의 꼬빡연이 방죽가 미루나무 가지에 걸려 바람 부는 대로 방정맞게 대롱거렸다. 나뭇가지에 걸린 연을 떼어 내려고 기현이가 긴 대나무 장대를 손에 들고 철길 건널목을 건너 방죽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바람이 살랑하게 불어오는 언덕배기 너머로 밭 일을 하러 오시는 동근이 아버지와 기성이 형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더 큰 추위가 오기 전에 배추 포기를 동여 매어 보온을 해주시려는 듯 볏짚 다발을 들고 도랑가로 걸어오셨다.
얼마큼 뒤에 따라오는 기성이 형도 밭일을 도우려는지 빠른 걸음으로 방죽가를 지나려다 잠시 발을 멈췄다. 그리고 나뭇가지 위에 걸린 연이 키가 닿질 않아 그저 바라만 보며 애를 태우고 있는 기현이에게 무엇이라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뒷산 마루 갈참나무 머리 위로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하게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화산리 앞산 산자락의 옹기공장 가마터에서 불을 때고 있는 듯했다. 황산벌에서 나는 옹기는 질이 좋기로 소문이 널리 나 있었다. 같은 군내는 물론 멀리 타 지역의 중간상인들까지 트럭과 우마차를 끌고 와서 사 갔다. 김장철에는 예약을 미리 하고 며칠씩 기다릴 정도로 수요가 많아 인기가 퍽이나 좋았다.
뒷산 소로에는 우현이 아버지께서 바지게 위에 싸리나무를 한 짐 가득 지고 내려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농한기에 소일거리로 지게 바작과 삼태기를 만드시려는 것 같았다.
다랭이밭에서 동근이네 아버지와 기성이 형 어머니 그리고 기성이 형이 배추를 묶으시고 계셨다. 원두막 앞밭에서 배추 포기를 묶으시던 동근이 아버지가 기성이 형에게 말씀을 하셨다.
“기성아, 아까 밭에 오면서 보닌게 용만이가 그 ‘쎄빠또’인가 뭔가를 데리구 있던디. 꽤나 비싸게 돈 좀 들였다구 하지?”
밭에서 몸을 구부려 배추를 묶고 있던 기성이 형이 어른님 말씀에 대답을 했다.
“글쎄유, 용만이두 어디서 들은 풍월인지 강아지 자랑을 그렇게 허는디. 지 눈에는 별로더라구유. 쎄빠또가 좋은 개인지는 몰러두 뭘 잘못 먹었나 자꾸만 물 같은 설사를 허구, 아까 요기루 올 때두 보닌게 설사에 피두 섞어 나와 좀 시원찮게 보이던디유.”
그러자 동근이 아버지가 기성이 형 말에 이해가 가시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기성이 너두 잘 아는 일이지만, 내가 재작년 가실에 읍내 양약방 집에서 그때 돈으로 치면 설찬허게 주고 사 왔던 영국 사냥개 종자라는 ‘뽀인따’ 알지? 아 글쎄, 그놈이 첨에 한 며칠간은 잘 노는 것 같더니 살살 밥을 안 먹드라구. 그래서 외국 개종자라 입이 고급이라 그런가 허구, 강아지 값 본전 생각두 나구혀서 면 소재지 푸줏간에서 나두 먹기 힘든 괴기를 사다가 푹 고아서 주었더니 그냥 잘 먹드라구 그래서 맴을 놓았는디 난중에 알고보닌께 그게 아니더라구, 내 원 참.”
잠시 말을 멈추신 동근이 아버지가 짚단에 묶어 있는 매끼를 풀어 볏짚 몇 가닥을 뽑으셨다. 그리고 속이 꽉 차오른 배추 포기를 야무지게 묶으시며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아, 글쎄. 한 이틀 잘 노는 것 같더니 자꾸 몸을 웅크리구 떨면서 피똥을 싸고 눈에 눈곱이 자꾸 껴서, 어른 마이신을 쪼끔 물에 타서 먹였더니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길래 그냥 자는 줄만 알었는디. 그 이튿날 아침에 마루 밑을 들여다보니 몸이 뻣뻣허게 굳어가지고 죽어버렸더라니께. 참,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드라. 하여튼 그 개 땜시 우리 마누라헌티 헛돈 썼다구 을메나 부대꼈는지 모른다, 암튼, 어쩌니저쩌니혀두 막 키우는 디는 그냥 똥개가 제일이다.”
동근이 아버지께서 못내 아쉬운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우리 집 모퉁이를 돌아 사립짝 앞에 오시는 우현이 아버지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성님 소일거리라두 헐려구, 싸리나무 쪄 오는감유? 어여 와서 잠깐 쉬었다 가시유.”
그러자 우현이 아버지가 텃밭 모퉁이에 바지게 멜빵을 벗어 지겟작대기로 받치시며 말씀하셨다.
“다들 배추포기 묶고 있는감, 나는 아래께 묶어 줘서 배추는 그런데루 됐나 싶은디, 생강 한 고랑 심은 건 토질이 맞질 않는가 영 아닌 듯싶네 그려.”
길가에 쪼그려 앉아 속이 꽉 차오른 배추를 손으로 가볍게 눌러 만지시며 뿌듯해하셨다. 그리고 윗 주머니에서 궐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시며 다시 말씀을 하셨다.
“저기 둥구나무 밑에 서 있는 게 영택이 애비가 맞는감? 내가 원래 눈이 나뻐 그런가 눈이 자꾸 침침하니 잘 안 보이네 그려.”
그러자 동근이 아버지가 몸을 일으켜 세워 둥구나무 쪽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맞구만유, 아침나절에 읍내루 자개농인가 실러 그 어르신님허구 같이 가던디, 벌써 댕겨서 볼일 보구 먼저 와 짐 실구 오는 거 기다리는구먼유, 말 들어 보닌께 그 뭐시냐, 농두 자개루다가 특별허게 만든 거라 쌀 몇 가마 값 줬다구 허든디, 좋기는 좋은가 봅디다.”
그러자 우현이 아버지가 담배 연기를 밭으로 내뿜으시며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아, 넉넉허게 사는 사람이야 그 까짓 농짝 하나 들여놓는디 무신 걱정이 있것는가? 안 그려? 내 속속들이 잘 모르것네만은 애들허구 그 새로 들어온 아줌니허구 잘 맞춰 살으야지. 그러지 않으면 영택이 애비가 새중간에서 힘 깨나 들 걸세 그려. 그럼 찬찬히 일들 마치구 오게나 나 먼저 가볼라네.”
우현이 아버지께서 영택이네 집 일이 조금은 우려스러운 듯 말씀을 하시며 지게를 어깨에 걸머지시고 밭둑길을 걸어가셨다.
저녁 무렵 광주로 가는 군용열차가 화산리 산모퉁이를 돌아 나와 온 들녘이 들썩거리게 지축을 울려 기적소리를 내며 마을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벼랑바위 앞에는 순아네 소달구지가 자개장을 싣고 조심스럽게 아주 느릿느릿 동네로 향하고 있었다.
마을 앞 둥구나무 밑에는 값비싼 새 자개장농이 들어온다고 신이 났는지 영택이가 자기 아버지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조금 멀리 보였다. 그리고 동네 고샅길 어귀에는 종구가 작은 몸체에 엉덩이를 이리 삐딱 저리 삐딱거리며 자전거를 힘껏 몰아 화산리로 가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나선 듯싶게 용만이가 어정쩡하게 우두커니 혼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전에 기성이 형이 한 말도 있고 해서 새로 사 온 강아지가 몹시 아파 종구가 급하게 약을 구해 보려고 면소재지 약방으로 가는 것 같았다.
동네 앞 원목 다리를 건너 순아네 소달구지가 둥구나무 앞에 멈춰 섰다. 영택이 아버지와 영택이가 소달구지를 몰고 오신 순아네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고급스러운 자개장을 싣고 소달구지가 동네 고샅길로 들어섰다. 둥구나무 밑에 몰려 있던 동네 아이들은 처음으로 보는 번쩍거리는 장롱이 신기한 듯 우르르 몰려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