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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36 조회 : 1,836




농익은 늦가을 햇볕이 온 들녘에 둔감하게 내리 쬐이고 있었다. 산모롱이를 휘어돌은 찬바람이 텃마당 빨랫줄에 널어놓은 옷가지들을 마구 흔들어 ‘펄럭펄럭’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마치 고된 삶에 찌든 우리네의 가쁜 숨소리처럼 귓가에 들려왔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은 더없이 푸르러 손끝만 살짝 대도 이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남쪽 들녘 가들막하게 보이는 배꽃마을 언덕 마루엔 키 작은 소나무들이 소꿉놀이를 하듯 오순도순 몸을 맞대고 있었다.
그 하늘 아래 연무대에서 면회객을 실고 나오는 막차가 검은 연기를 실실이 흩트리며 달려왔다. 뻘쭘하게 서 있는 철로 시그널 앞에서 채운역 역사에 진입을 알리려는지 기적소리를 날카롭게 내어 질렀다.

텅 빈 들녘 한가운데 논배미에서 먹이를 찾던 청둥오리들이 갑작스레 내지르는 세찬 기적소리에 놀랜 듯 날개를 푸덕여 날았다. 그리고 저녁노을빛이 완연하게 물들어 가는 하늘 위로 떼 지어 높이 솟아올랐다.

둔덕너머로 저녁예배준비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그 종소리가 산골짝에 부딪혀 잔잔한 여음을 남기니 더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울밑엔 그리도 융성하게 피어오르던 국화가 제 할 일을 다 한 듯 눅눅하게 시든 꽃잎에 무겁게 머릴 숙였다. 마치 잔잔한 아쉬움 속에 늦가을의 잔영이 애틋하게 솟아나는 것 같았다.
둔덕 밭 돌무더기 위엔 늙은 감나무 가지 끝에 까막까치 먹다 남긴 쭈그러든 홍시 하나가 애처롭게 매달려 간당거렸다.

찬바람이 머리 깃을 스쳐 지나는 좁다란 텃밭엔 파릇파릇한 배추 끝머리가 노을빛에 푹신하게 젖어 들어 생기롭게만 보였다.
울 너머로 바라보이는 언덕배기엔 키가 작달막한 기현이가 나뭇가지에 걸린 꼬리 연을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기다란 대나무 장대로 몇 차례 깨금발로 발돋움하다 이내 제풀에 지쳐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 속내를 아는 듯 모르는 듯 가오리연의 기다란 꼬리가 바람 따라 쉴 새 없이 대롱대롱 흔들거렸다. 마치 못내 아쉬워하는 기현이를 마구 놀려대는 듯 보였다.

진종일 방죽가에 놀던 오리들이 이젠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저마다 둑 위에 올라 날개를 활짝 펴 힘껏 흔들며 일렬로 늘어선 채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었다.

동구 밖 고샅길 초입, 진식이네 울타리 앞에는 종구 아버지와 용만이 형의 모습이 보였다. 종구 아버지가 용만이 형 앞에 마대자루 하나를 내던지며 손가락질을 위아래로 하셔 몹시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러자 용만이 형이 뒤로 밀려나서 주춤대며 무엇이라 말대꾸를 하는 것 같았다.

배추 묶음을 거의 끝내가던 기성이 형이 몸을 일으켜 세워 마을 앞쪽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에이구 또 뭔 일이 있는가? 종구 아버지 저 양반이 손가락질까지 해대면서 큰소리치는 거 보닌께 되게 화가 난 모양인디. 용만이가 뭘 잘못이라두 저질른 모양이구먼. 절절매고 있는 걸 보면.”

저녁녘으로 치닫는 시간의 낙차 속에 밭일을 하시던 기성이형 어머니께서 머리 위에 쓰셨던 수건을 벗어 훌훌 터시며 기성이 형에게 말을 건네셨다.

“야, 기성아. 널랑은 당체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간에 절대루 새중간에 껴서 간섭하지 말어라. 재수가 없을라믄 뭔 놈의 일이 일어날지두 모르닌께, 내 말 알어들었냐구?”

지난봄 마른 가뭄 때에 못자리에 봇물 대는 것 때문에 종구네 아버지와 기성이 형이 크게 싸움한 일을 떠올리시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다짐을 받으시려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걱정을 헌대유. 요기서 허는 말이 저기까장 들리는감유? 글구 내가 뭐 한두 살 먹은 어린애감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자기 어머니의 말씀이 조금은 귀찮은 듯 얼굴을 찌푸리며 눈길을 동구 밖으로 모으고 있었다.

얼마 전 그리도 급하게 강아지 약을 구하려 화산리로 갔던 종구가 자전거를 타고 지서 앞 건널목을 내려서 마을로 향해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리고 종구네 아버지는 화가 안 풀리신 듯 들고 있던 괭이를 용만이 형 앞에 훌쩍 던져 주며 다시 무엇이라 말을 하면서 심하게 꾸짖는 듯해 보였다.

한동안 어정쩡하게 서 있던 용만이 형이 한 손에 자루를 거머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괭이를 어깨 위에 걸쳐 마을 앞을 벗어나 앞산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원목 다리 앞으로 몸을 들썩여 자전거를 몰고 온 종구가 자전거에서 서둘러 내려 용만이형에게 무엇이라 말을 묻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용만이 형이 죽은 강아지를 담은 자루를 위로 올려 보이며 방죽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자 종구가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 종구네 아버지와 무엇이라고 말을 나누고 있었다.

밭둑에 걸터앉아 궐연을 피우시던 동근이 아버지가 부산하게 걸어오는 용만이 형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용만이가 괭이를 들구 이리루 오는 거 보닌께 아마 그 ‘쎄빠또’ 새끼가 죽어버린 모양 같구먼. 그런께 종구네 애비가 저렇게 화를 내구 그러지. 그나저나 정두 못 붙이구 저렇게 허망허게 죽어버리면 내가 당해 봐서 잘 알지만서루 참 속 꽤나 쓰리지. 그렇다구 용만이헌티만 애매허게 화를 낸다구 이미 죽어버린 쎄빠또 새끼가 벌떡 일어나 살아 돌아오는 것두 아닌디, 거참.”

어깨에 자루를 둘러매고 언덕배기를 내려서는 용만이 형의 모습이 눈앞에 점점 가까이 보였다.

사립짝 안마당에는 아주머니가 순덕이를 등에 업고 빨랫줄에 널린 잘 마른 옷가지들을 하나씩 걷어 챙기셨다. 그리고 등에 업힌 순덕이가 파란 하늘을 보며 저 혼자서 옹알거렸다.

밭둑길에는 검둥이가 우현이네 집에 슬쩍 다녀오는지 내 눈치를 살피느라 밭둑길을 피해 텅 빈 밭도랑을 어슬렁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원두막 앞을 지나 밭둑길에 용만이형이 멈춰 섰다. 종구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에 화가 났는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땅바닥에 자루와 괭이를 내려놓고 한 손을 코에 대고 코를 힘껏 풀었다.

“어디 내가 뭐, 강아지 새끼 죽으라구 고사를 지냈남? 지 명이 그거 밖에 안되닌께 명줄 따라 죽은 건디. 내가 밖으루 막 끌구 다녀서 병이나 죽은 거라구 삿대질을 하며 욕을 하니, 내 원 참. 그러니 증말 더러워서 남의 집살이두 못해 먹겠네유. 참말루 이제는 더 있으라구 붙잡구 사정해두 안 있을라구 허는구먼유. 진작부터 갈라구 맘먹은 거 속 시원허게 낼 떠날라구 허네유.”

한숨을 푹 쉬고 동근이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용만이 말을 듣고 계시던 동근이 아버지가 땅바닥에 담배꽁초를 비벼 문대시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 말허는 거 보닌께 증말루 동네 떠날 모양이네 그려. 아, 이 사람아. 돈을 그리 많이 들여 산 ‘쎄빠또’ 새끼가 정두 못 붙이구 허망하게 죽으닌게 서운혀서 그러는 건데 자네가 좀 참구 말지 그러는가? 뭐니 뭐니 혀두 고기도 놀던 물이 좋다구. 웬만허면 그냥 요기서 눌러 살지 그려.”

동근이 아버지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작심이나 한 듯 용만이가 얼굴을 붉히고 식식거리며 말했다.

“오늘 일만 가지구 그러는게 아니구먼유. 아래께 사 온 그놈에 축음기 안 있는감유. 그 축음기에 태엽이 끊어져 버렸는디. 그것두 내가 무지막허게 힘을 줘가지구 돌려서 고장이 난 거라구 우기면서 며칠을 두구 을매나 잔소리를 했는지 알어유? 뭐, 솔직허게 나두 그 양반 집에 없을 때 슬쩍 몇 번 틀기는 했지만서루. 자기 딸이나 아들은 전혀 안 틀은 것처럼 말을 허드라구유.”

밭둑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기성이 형 어머니는 저녁밥을 하신다고 서둘러 언덕배기 쪽으로 먼저 가셨다.
동구 밖에는 집으로 들어갔는지 종구네 아버지와 종구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주막집에 다녀오시는 병수 아버지가 노을빛 등에 듬뿍 받고 나무다리 위에 자전거를 끌면서 걸어가고 계셨다.

그렇게 한동안 말을 멈추고 있던 용만이 형과 기성이 형이 한쪽으로 등을 돌려 동근이 아버지 눈을 피해 담배를 나눠 피웠다. 그러자 동근이 아버지가 분위기를 편하게 해주시려는지 자리를 털고 일어서 동네로 향해 가셨다.

얼마 후 불그레하게 번져나는 낙조 속에 기성이 형이 집을 향해 도랑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용만이 형은 죽은 셰퍼드를 묻어주려 뒷산으로 오르다 사립짝 앞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상민아, 너두 엄니랑 잘살구, 공부 잘혀서 나처럼 이렇게 살지 말구 큰사람 돼야 헌다. 그리구 내가 낼 니네 엄니 못 보구 가드라두 꼭 잊어부리지 말구 니가 대신해 안부 전해드려라.”

해질녘이라 서두는 듯 용만이 형이 자루와 괭이를 들고 잰걸음으로 오솔길로 올라섰다. 물론 한 동네서 영원히 함께 뿌리를 내리고 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동안은 미운 듯했지만 막상 내일 동네를 떠난다고 하니 왠지 서운한 마음이 조금씩 들었다.

초저녁이 되자 햇살이 사라져 을씨년스럽게 몸이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밥을 짓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고 계신 아주머니 옆에 함께 앉았다.
뒤뜰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으로 부엌 아궁이 밖으로 벌불이 붙어 올랐다. 그러자 순덕이 어머니께서 아궁이에 머리를 숙이고 있으면 머리털이 탄다고 손짓을 하셔 방으로 들어가라 서두셨다. 그래서 나는 부엌문 앞에 길게 걸쳐 놓은 덕석을 제치고 밖으로 나왔다.

추녀 밑 대나무 둥우리 앞엔 닭들이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문 열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루 앞에 검둥이는 두 눈을 껌뻑거리며 은근슬쩍 내 눈치를 계속 살피고 있었다.

서쪽 지평선에 더디 기울어 가는 저녁 해가 가없는 하늘을 선혈보다 붉은 몸으로 온통 껴안고 금강 둑 너머로 소리 없이 스러지려 했다. 그리고 뒷산마루 왕 소나무 우듬지에 창백한 얼굴로 걸터앉아 있는 달이 그리도 처연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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