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인들 마지막 이별이 안겨주는 통한에 가슴 아리지 않을까마는 저만은 결코 아버지와 슬프지 않은 이별을 하고 싶습니다. 들으시기에 못내 섭섭하실지 몰라도 남들이 다하는 곡도 하지 않을 것이니 눈물 또한 있을 리 없어 못내 불효가 되겠지만 이미 응어리진 아픔 한 덩이는 꼭 아껴 남겨 두렵니다.
지난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극하신 사랑의 결실로 나에게 내어준 살덩이와 뜨거운 피가 있어 제가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고마움을 제 슬픔보다 더 먼저 기억하고 싶습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 하나만을 잃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서로 살을 부벼 애틋하게 사랑했던 아내와 까만 두 눈동자의 천진난만한 자식에 대한 사랑까지 두 몫의 사랑을 모두 잃으셨기에 저보다 더 슬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비좁은 가슴에 가득 차올라 아버지를 위해 울음은 물론이려니와 그 울음 뒤에 오는 눈물마저도 이제부터는 아끼렵니다.
설령 눈물보다 더한 아픔이 되새김질하듯이 여린 제 감성을 자극하여 시차도 없이 부추긴다 해도 끝내 참아야 하는 이유를 아버지에게 꼭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저 하늘이 나보다 더 먼저 아버지를 마중하려고 저렇게 참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불어 하늘이 우리 식구들의 슬픔을 누구보다 더 낱낱이 기억하여 분노했기에 저토록 짙푸른 빛으로 매섭게 물들여졌나 봅니다.
이에 하늘이 계시하는 길을 따라 묵언 속에 아버지와 끝맺음의 작별을 하고 싶습니다.
이는 제가 가볍게 입을 열어 어설프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버지께서는 먼저 저에게 진솔한 말을 해 주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제 심속 깊은 피안에 옹골차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가시는 길이 그리 멀어 험난할 진데 그도 탓하지 않고 떠나시는 아버지의 깊은 속내를 헤아리지 못하고 나만의 들끓는 감정의 대한 기폭의 조절 없이 가볍게 표출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가뜩이나 상심이 크신 어머니에게 마음 더욱 아프게 해드린 저에 우둔함이 마냥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도 억울하고 비통하기 그지없어 제 목숨 다하는 날까지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려 내 왼쪽 가슴속에 뜨거운 심장이 지금도 쉴 새 없이 박동하고 있는 가 봅니다.
이토록 뜨거운 저의 심장이 멈추는 날까지 영원토록 저주를 받아야 마땅할 놈들임에 두말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로 그에 대한 분출된 증오감에 치중하여 철저하게 복수하는 길만이 아버지에 대한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하여 지난 시간의 흐름 속에 나름대로 애를 태웠나 봅니다.
허나 그런 저에 행동이 아버지의 고귀한 죽음이 남긴 깊고 깊은 의미를 희석시켜 욕되게 하지는 않았는지 냉철하게 되돌아 보아야할 시간인 듯싶습니다.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라도 저는 늘 아버지가 저에게 주셨던 체취를 잊지 않고 기억하렵니다.
늦겨울 냉기가 억척스레 들붙으려 하던 어느 이른 봄날쯤으로 기억합니다. 어린 저를 등에 들쳐 업으시고 뜨락에 피어난 인동초 꽃을 보시며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온몸이 시려 아려오도록 거센 한파를 이겨 생동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는 저 여린 풀처럼 이 험한 세파를 헤쳐 나가 살아야 하고 또한 살아남으려고 있는 힘을 다하라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널찍한 등짝이 그리도 포근하고 아늑했으나 스멀스멀 묻어나는 아버지의 땀 내음과 담배냄새가 얼룩져 밴 체취가 그때는 솔직히 싫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마저도 새삼스레 그리워짐은 아마도 제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범위를 초월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온몸으로 뜨겁게 느낍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제 곁을 영원히 떠나야 하심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남은 우리 모자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혼백으로라도 함께해주실 것을 믿기에 조금도 외로워하지 않으렵니다.
이 땅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 저를 위해 아버지께서는 살아생전에 이미 무한한 사랑을 주셨고 아직도 쉴 틈 없이 사랑을 주실 것이며 그곳 영면의 안식처에 가셔도 끝없는 고귀한 사랑을 다시금 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토록 염원하는 곳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기에 언제나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다 지쳐 포기하고 마는 키 작은 목마가 슬퍼도 참아야 하는 비애처럼 제가 험한 세상 사노라 마음 더욱 서러워질 때엔 아버지께서는 넉넉한 품으로 저를 끌어안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그 옹이진 아픔 한 덩이를 그토록 남겨 두려했던 이유가 바로 아버지에 영원불변의 심오한 마음을 어릿어릿하게라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꾸만 저도 모르게 슬퍼지려는 마음이 너무 두려워 얼른 이 말 한마디를 전해 드리렵니다.
저에게만큼은 단 한분이신 아버지를 그토록 사랑했으며 사랑할 것이고 지각없는 세월이 흐를지라도 기필코 사랑하렵니다.
아버지 제가 여태껏 가슴으로 드린 말씀 귀담아 들으셨으리라 믿어 꼭 묻고 싶습니다. 그곳에서라도 홀로 남으셨기에 더욱 외로울 수밖에 없는 내 어머니와 저를 가엾이 여겨 끝없이 기억하시고 지켜주시겠지요.』 「 우주 안의 삼라만상을 주관하는 신(神) 앞에 우리 인간들이 하잘데기 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따금씩 해보았다.
허나 한 인간의 애통한 죽음의 장례가 이렇게까지 초라하게 치루워질 수밖에 없는 이 모든 상황이 그렇게도 애통하기에 싫어졌다.
그 초라함이 전혀 예기치도 못한 타의에 의해 이루어졌음에 분노가 한계를 넘어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나약하기 그지 없는 어린 몸이였기에 어찌 항거할 능력조차도 없어 그저 망연자실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초라함을 강요시킨 타의의 주체가 바로 침략에 근성을 생리적으로 버리지 못하는 놈들임에 도저히 인내하기 역겨워 비통할 따름이었다.
슬픔은 고요를 수반하는 것 같았다.
비단 하룻밤이였지만 시간이 흐른 동안 거즘 말을 잃고 버텨낸 듯 했다. 끝내는 그 고요마져도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것 같아 통분으로 가득 차오르는 가슴에 그지없이 애석하기만 하였다.
살아 온 나날보다 살아가야할 날들이 더욱 많을진데 삶에 중심축을 어의없게 잃어버린 내 모습이 그저 비참할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장지로 가기 위해 산에 오르면서 수없이 해 보았다.
허나 마음은 그럴 것 같다라는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만 머물길 원했지 실제로 나라는 존재에 부합시켜 동일시되는 것은 왠지 모르게 거북스럽기만 했다
엄존하는 사계의 변화 속에 저토록 파란 하늘이 눈에 시리도록 깔끔한 빛으로 민낯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미 슬퍼질대로 슬퍼져 버린 마음을 더욱 울먹여지도록 진한 감성을 뭉클하게 자아낼 따름이었다. 그래도 성스러운 태양은 미숙하기 짝이 없는 내가 이렇게라도 살아있다는 존재의 가치를 느끼게 해 주려는 듯해 보였다. 찬란한 빛을 유감없이 발하며 어제처럼 그자리를 묵묵하게 지키고 있어 자뭇 믿음직스러웠다.
더불어 언제나 입을 꾹 다물어 답답하리만큼 말이없는 저 산도 짙푸르름으로 답을 대신 하려는 것 같았다. 끝머리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광연한 저 들녘 또한 과묵하기는 매나 한가지였다.
심약한 나를 에워싸고 있는 주위에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보니 어느 한곳이라도 자분자분하게 말붙힘할 곳이 없었다.
고로 방만한 우주 법계 속에 끝내 홀로라는 것을 받아드려야 했다. 내 아버지를 잃었다는 커다란 상실감 속에서도 솔직히 불투명하게 다가오는 막연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거침없이 앞서기 시작했다.
시차에 흐름은 한 치의 오차도 있을리 없어 이제 아침나절을 벗어나 한나절의 중심인 점심나절로 향하고 있었다.
고로 푹푹삶는 불볓더위가 염천을 이루려하였다. 얼굴과 목줄기에 흘러 내리는 땀은 두 말할 여지도 없고 이젠 등줄기까지 타고 내려 땀에 젖은 윗옷이 등짝에 자꾸만 들붙으려 하였다.
어디 그 뿐이랴 신고 있는 검정고무신이 억척스럽게 내려쬐이는 강렬한 햇볕에 잔뜩 그을렸다. 신발을 신고 있는 발이 온통 뜨겁기만 하고 발바닥은 땀이 흥건하게 차들었다. 그래서 길을 걷다보면 발바닥이 뜨겁다 못해 미끈적거려 신발이 곧 벗겨질 것 같았다.
겨우 한사람 정도 걸을 수 있는 좁아터진 밭둑길을 벗어나자 펑퍼짐한 곳에 소나무 두 그루가 사이좋게 서 있었다. 산으로 오르려는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듯햇다.
바로 두 그루 소나무 아래에 벌써 주인을 잃은지 두 해가 훨씬 지난 작달막한 오두막 집 한 채가 텅 비워져 있었다. 지붕에 해를 넘겨 볏짚이 검회색으로 변한 채 뒤덮혀 있었다. 군데군데 찟어져 구멍이 난 문풍지는 물론 버름한 흙벽의 구석진 곳에 거미줄만 얼기설기 늘어져 있었다. 마루 위에는 더부룩하게 쌓인 흙먼지가 퍽이나 을씬년스럽다 못해 아주 음산하게 보였다.
앞마당에는 온갖 잡초들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무성하게 자랄대로 자라 마당에 흙바닥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틈사이로 명아주와 개망초가 뻘쭘뻘쭘 목을 내밀어 더욱 스산함을 자아냈다. 그런 가운데 개망초는 이미 꽃이 시들어 가는 것들이 대부분이였다. 그 틈사이로 길쭘한 줄기 끝에 하얀 꽃망울을 달고 있는 무병장수의 풀 질경이가 한데 뒤엉켜 참으로 분잡스럽게 보였다.
그나마 눈길을 끌게 하는 것이 하나 쯤은 있었다. 반쯤 기울어 가는 싸리나무 울타리에 봄 부터 힘차게 넝쿨을 뻗어내린 호박 줄기 끝에 푸르딩딩한 애호박들이 매달려 있었다. 오지도 가지도 못할 주인을 그리 기다리고 있는 것 처럼 보여 마음 한쪽에 자잔한 애잔함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울밑에는 빨간 맨드라미가 뉘를 향한 끈질긴 기다림의 아픔처럼 이미 붉게 타오를대로 타올라 있었다.
산마루 턱까지 이어진 오솔길이 무성하게 자란 풀숲을 양쪽으로 가르며 두 서너 군데 구불구불하게 굽어진 모습이 눈안에 확들어 왔다.
이제 오솔길을 따라 산에 올라 산자락을 반쯤 오르다 보면 사람들이 전혀 다니질 않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억지로 풀숲 사이를 헤치고 들어서면 내 아버지께서 잠들어 계실 영면의 터 벼랑골에 이를 수 있었다.
페 속 깊이 파고드는 산내음에 호흡을 가다듬고 오속길을 걸었다. 길 양 옆으로 산불에도 잘 타질 않는 끈질긴 성질을 가진 떡갈나무들이 아직은 어린 탓에 키가 작은 모습으로 심심치 않게 들어차 있었다. 그 줄기 끝에 풋도토리 열매들이 드문드문 매달려 앙증맞게 보였다. 그 사이에 머적없게 키가 쑥 자란 억새가 푸릇푸릇하게 덤불 숲을 이루고 있어 좀 답답하게 보였다.
그리고 음달이 드는 습한 곳엔 돌과 작은 바윗돌을 온통 뒤덮고 있는 푸른 이끼가 들어차 있었다. 마치 푸른색의 융단을 넓다랗게 깔아 놓은 것 처럼 보여 신선함을 자아내고 드문드문 싸리버섯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윗자락 햇볕이 틈실하게 드는 곳엔 청록색의 길쭘한 잎사귀를 힘있게 드러낸 산죽들이 크고 작은 군락을 이뤄 더없는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
그토록 산은 어린 나에게 숱한 기억들을 남겨주려는 것 같이 느껴졌다. 어쩜 그 때부터 산과 나 사이에 이미 무언에 교감이 시작된 것 같았다.
길섶에는 산국들이 나직나직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그 틈사이로 오똑하게 무리를 지어 꽃몽우리를 빼어내민 구철초가 더디 오는 가을을 함께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렇게 가쁜 숨을 내 몰아 쉬며 산중턱에 올라 오른 쪽 편에 있는 우묵골로 접에 들려고할 즈음이었다. 풀숲에 우뚝하게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검추레한 바위 위에서 청설모 한 마리가 산으로 오르는 우리들 일행을 내동 짯짯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와 거리가 좁혀지자 본능적으로 잽싸게 달아났다. 소나무 등을 타고 오르는 가벼운 모습이 부산스럽다 못해 참으로 자발맞게 보였다.
우리들 보다 몇 걸음 앞을 서 걸으시던 응수 아버지께서 지게 작대기로 제 멋대로 우거져 사방으로 얼키고 설켜 산만하게 늘어져 있는 나뭇가지들을 수차레씩이나 처내리셨다. 그러자 나뭇잎과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혀 푸드다닥,푸드다닥 소리를 내어 잠시라도 적막하여 고요했던 산의 정적을 깨트렸다. 그렇게 힘들여 억지로 터주신 길을 따라 우묵배미 안으로 들어섰다. 비스듬히 기우러진 산자락에 빨간 황토가 수북하게 쌓여 흙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 그곳이 이제 내 아버지께서 편히 쉬실 유택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분명 똑 같은 흙이였다. 마을 고삿길이나 흙담벼락에서 늘상 맞았던 그 냄새와 내 아버지의 유택에 쓰일 황토는 풍겨오는 내음부터 전혀 달랐다. 바라보는 그 느낌은 더더욱 다르게 마음에 와닿았다.
그런 내가 그지없이 딱해 보였나 한줄기 바람이 여법 시원스레 불어왔다. 그 솔바람이 기스락에 자릴잡은 어린 자작나무들의 볼살을 가볍사리 어루만져 보고 비알진 산자락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만큼 돋보이는 천상의 푸른빛 하늘 밑을 맴돌며 산마루 턱에 턱을 고이고 여유자적 하는 구름에게 넌지시 말을 건내는 것 같았다. 제발 눈 아래 펼쳐지는 통한의 아픔에 겨워하는 슬픈 모습일랑 굳히 보려하지 말고 아래마을에 구경이나가자고 마냥 조르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과 느낌들이 서름을 쥐어짜낸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들었다. 내 온몸으로 바람이 스며들어 시원함 속에서 차츰차츰 더위를 식혀 주었다.
아버지께서 영면하실 유택은 자드락에 자릴 잡아 평탄한 곳에 있는 여늬 묘지들에 비해 비스듬하게 보여 마음이 편칠 못했다. 그래도 유택의 앞면이 남서쪽으로 방향이 정해져 사계의 변화가 뚜렷한 채운들녘을 멀찌감치 내다 볼 수 있고 일조량이 넉넉할 것 같아 그나마 큰 위안이 되었다. 앞으로 시야가 탁 트여 들메마을 전체가 환히 바라다 보였다. 그리고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원목다리와 시오 리 떨어져 있는 읍내 강경 시내의 전경이 선연하게 바라보여 나름 좋은 자리임에 틀림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자연적 조건으로 강경읍내 옥녀봉과도 마주 바라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옥녀봉에 저녘 노을이 물들어 오면 그 아름다움을 차마 말로는 형연키 어려웠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두뇌의 한계로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 자체였다. 현란한 색채로 금강평야의 온 들녘과 주변을 에워쌓고 있는 크고 작은 산들은 물론 마을 초가집들까지도 온통 붉게 물들여 놓았다. 그런 아름다움에 극치를 이루는 모습들을 내 아버지께서도 어렵지 않게 바라보실 수 있어 그라도 덜 외로우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와 더불어 이제 두 해가 지나 내 후년 봄 버들강아지가 똘방하게 눈을 뜨게 되면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 때엔 마을 앞 냇둑길을 걸어 학교에 오가는 내 모습 또한 세세하게 바라 보시며 어여삐 보아주실 것 같아 그도 좋았다.
그러나 혼란을 거듭하는 전쟁 중에 학교마져도 놈들에게 강제점령을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변화가 없으면 그 입학식도 끝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어렴푸시 해 보았다.
유택에서 왼쪽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악성 전염병 환자와 나병환자들을 강제로 격리시켰던 병막 터가 가참하게 내려다 보였다. 그러나 해방이 되어 텅 비워진 병막 터는 거의 페허 수준에 달해 암울했던 그 시대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 정섭이 형네 집이 있었다. 그 정섭이 형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유택 옆자리에 화전밭을 일궈 들깨를 꽉 들어차게 심어 놓으셨다. 잎과 줄기가 마냥 푸릇푸릇하리만큼 잘 자라나 있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산바람에 들깨만이 지닐 수 있는 꼼소롬한 냄새가 친숙하게 묻어났다.
그리고 들깨밭 가장자리에는 마을 사람들의 관심 조차 끌지 못해 천박 당하고 있는 개복숭아 나무 한그루가 홀로 외로히 서 있었다. 그래도 봄이오면 연분홍빛 꽃들을 나름대로 화사하게 피워 벌과 나비들을 불러 모아 내 아버지의 눈을 즐겁게 해줄 것 같다는 생각을 혼자서 해 보았다.
유택 뒷편으로는 보기 좋을 만큼 들어찬 고만고만한 크기의 소나무들이 울타리를 이루웠다. 생동감이 충만한 봄이오면 황금빛 송화가루를 흩뿌려 짙은 솔향기로 농 익어 가는 계절을 예찬 할 것이라 믿어졌다. 그리고 겨울엔 모질게 불어 닥치는 삭풍을 막아 계절의 삭막함을 덜어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소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그렇게 소중하게만 보여 더할 나위 없이 듬직해보였다.
그리고 유택 주변에 참나리 꽃이 듬성듬성 피어났다. 참나리는 일년 중 더위가 가장 극점에 달한다는 대서(大暑)를 며칠 앞두고 폭염 속에 몸을 잔뜩 달구고 있었다. 그러면서 얼굴에 가득한 검은 반점의 죽은깨가 못내 부끄러운지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남들은 그런 모습을 무엇이라 말 할련지는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그리 참하게만 보였다.
그리고 하늘 빛을 그리 빼닮고 싶었나 짙은 보랏빛의 산도라지 꽃이 드문드문 피어 올랐다. 그런 모습이 앙증맞으면서도 끝내 참하게 보여 주변에 자잔하게 갈려 있는 적요함을 달래 주고 있었다.
그리고 함께 아랫마을에 구경을 가자고 조르던 산바람의 청을 끝내 거절한 한 덩이 구름은 산마루 턱에 앙당그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머뜩치 않아 비앙거리 듯 산매미는 목청을 힘껏 돋우었다. 그 와는 걸맞지 않게 앞산 어느메에서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애절하게 들려 왔었다.
유택에 도착하신 어머니께서는 옥순이 어머니와 함께 묘자리를 파느라 쌓여진 황토를 고루고루 고르셨다. 크고 작은 돌멩이와 삽질에 끊겨진 잔디와 또 다른 풀뿌리들을 추려내셨다.
이제 아버지께서 영면 하시려 터 안에 누우시면 그 위에 허토를 하고 그 다음에 취토를 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평토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봉분을 이룰 때 다시 쌓아 올려야 하는 흙이기에 애끓는 마음을 누지르고 정성껏 고르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 또래들의 진솔한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동네 어른들 말씀처럼 정말로 극성스러운 것인지 또는 내 아버지의 시신이 땅에 묻히는 과정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정녕 내가 불쌍하게 보여 달래주려는 갸륵한 마음에 그랬는지 도무지 그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동네 꼬마녀석들은 산자락을 타고 올라 우리들 보다 먼저 도착하여 먼 발치에서 어른들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제일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어 참으로 보지 않으려 자꾸만 눈을 돌렸다. 바로 면소재지에 있는 놈들의 근거지 인민위원회에서 높다랗게 내 걸은 인공기 때문이었다.
내 손에 닿을 수만 있다면 추녀 밑에 꼽아둔 잘 드는 시퍼렇게 날이 선 낫으로 내 마음이 아픈만큼 놈들에 인공기를 찍어 내려 갈기갈기 찟어버리고만 싶었다. 참으로 억제하기 힘든 충동심이 좁은 가슴 속에 꽉 들어 차 있었다.
더불어 내 아버지의 처절한 시신 앞에서 구역질이 나도록 거드름을 피우며 모진 말을 내뱉던 종구네 삼촌인 종섭이라는 인간의 저주스런 얼굴이 그 인공기 위에 다시금 중첩되어 떠 올랐다.
막말로 영정 하나 가추지 못했으니 만사 한 장도 없었다. 그리 흔하고 값이 싼 소나무 관 마져도 있을리 없었다. 등짝을 붙혀 누울 수 있는 칠성판 또한 없는 아주 초라하기 그지 없는 장례 였다. 아니 그런 표현보다는 그져 시신을 땅에 묻어버리는 매장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살아 생전도 그리 억울하게 돌아가셨는데 사후에도 이렇게 허술하게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내드려야만 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이 너무도 싫었다. 그저 놈들이 저주스럽다 못해 죽이고 싶도록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나마 어머니께서 아프신 마음이야 천 갈래 만 갈래 찟어지는 아픔이겠지만 그래도 애를 써 안정을 찾으시려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마을에 구장이신 인석이 아버지께서 누우실 자리 바닥에 두 분께서 첫날 밤에 깔으셨던 요를 펼쳐 깔으셨다. 그러자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집에서 가져 간 왕골 돗자리를 묘자리 앞에 가지런히 펼쳐 깔으셨다.
그리고 구장님의 안내에 따라 운수 아저씨와 귀분이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들어 옮기셔 묘자리 안에 깔린 요 위에 내려 놓으셨다. 그런 다음 구장님께서 아버지에게 절을 올리라고 하셔 나 혼자서 무릎을 끓고 절을 올렸다.
그런데 이 절이 저승 길로 떠나시는 내 아버지에게 올리는 마지막 절인가 싶어 잘 참아왔던 설음이 복바쳐 오르고 말았다. 온 몸이 뜨거워지고 두 귀에서 이명이 울릴 정도로 격한 감정이 끓어 올랐다. 더는 참기 어려워 그만 소리를 내어 울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먼저 아버지에게 절대로 울지도 않고 슬픈 소리도 내지 않겠다고 그리 굳게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 설 생각조차 못하고 얼마를 울었는지도 몰랐다.
이렇듯 작은 내 육신을 쥐어짜서 터져나오는 처절한 비명과 피눈물은 비단 내 아버지와의 마지막 석별에서 오는 애끓는 정 때문 만은 결코 아니였다. 이런 치유될 수 없는 처참한 상처를 내 어머니와 나에게 강요한 철천지 원수 같은 놈들에 대한 철저한 복수심 때문에 더욱 애통하게 울부짖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증오심의 한계를 넘어섰기에 내 살아 생전에 이룰 수 없다면 먼 훗날 죽어서라도 기필코 복수를 할 것이라고 이를 악물었다. 그 통곡은 하늘과 내 아버지 그리고 내 어머니와의 언약에 울부짖음이였으며 그에 대한 인증의 눈물이었다.
그렇게 얼마쯤인지도 모르게 시간이 지난 듯 싶었다. 누군가 내 뒤에서 울먹이는 등을 두드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과 동시에 등을 두드려 주는 사람이 바로 내 어머니라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내 어머니의 체취였기 때문이였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가깝게나 또는 조금 멀리서라도 늘상 그 체취를 맡으며 자랐기에 그리 쉽게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뒤에서 내 등을 두드려 주시던 어머니께서도 더 이상은 들끌어오르는 분노에 찬 설음을 못 참으시겠는지 나를 덥석 끌어 앉으셨다. 그리고 울먹이시며 애끓는 목소리로 말씀을 하셨다.
"아그야, 이제 그만 울그라 니가 그렇게 슬피 울어번지면 느그 애비 맴 아퍼 절대루 저승 문턱을 못 밟으닌께 어여 그만 울그라, 어여" " 으음 알었당께, 근디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두 저 개만두 못한 놈들은 절대루 가만 놨두지 않을꺼랑게 어디 두고보라구 혀."
참기 힘든 흐느낌 속에 겨우겨우 억지로 말을 했지만 참으로 세싱에 태어나서 제일 참기 힘든 시간이였다.
그리고 우리 모자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가 서로를 말없이 끌어 앉고 흐느끼었다. 그런데 그 날따라 내 얼굴에 와닿은 어머니의 젖가슴이 그리도 포근했다. 마냥 요동치는 내 어머니에 심장의 소리에서 듬직스런 믿음을 큼직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우리 모자의 모습을 바라보시던 어른들도 못내 애처럽게만 보였는지 고개를 돌리시면서 눈시울을 매만지셨다.
그러자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나를 향해 들으라는 듯이 말씀을 해주셨다.
" 참 그놈 내가 평상시에두 예사로는 않봤지만 무지허게 야물딱지게 생겨번졌네 그려, 암 그래야 혀. 그렇구 말구 암튼 빨랑 커번져가지구 저 썩어문들어질 놈들 헌티 복수를 혀야 느그 애비두 맴 편허게 눈을 감을꺼구먼, 에이구."
그러자 옥순이 어머니께서 나를 한차례 달래주시고 이내 어머니를 부축해 일으켜 세워주셨다. 그러자 부락 구장님께서 손에 들고 계시던 삽을 어머니에게 건네 주시면서 말씀을 건네셨다.
허토란 시신이 담긴 관을 묘자리 안에 하관을 하고 그 관 위에 가족이나 유족들이 마지막으로 고인을 떠나보내면서 이별의 정으로 흙을 뿌려주는 것을 말함이었다.
이제 내 어머니와 내가 정말로 그토록 정 들었던 내 아버지와 내세에서 마지막 이별을 고해야 될 시간이 도래된 것 같았다. 내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별이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픈 이별이 남아 있어 허토를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내 아버지의 시신은 그리도 처참하게 보였다. 관 속에 들어가시지 못하시고 그저 이불 호청에 쌓여 갈자리로 둘둘 말려 흙바닥에 덩그란히 놓여 있었다. 그런 모습이 외롭고 쓸슬하기 보다는 허무하다 못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세상에 태어나 누구인들 다 관하나는 들고 가는 저승 길이라고 하였다. 허나 그마저도 박탈 당하신 내 아버지의 싸늘한 시신 앞에서 차마 더는 무엇이라 드릴 말이 없어 저절로 입이 다물어 지고 말았다.
그런 아픔을 곁에서 묵묵하게 지켜보시던 운수 아저씨께서 삽을 들고 서둘러 취토를 하셨다. 그러자 마을 어른들도 합세를 하셔 푹 파였던 묘자리의 공간를 애끓는 아픔으로 메우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아버지의 시신이 쌓여지는 흙으로 한 부분 그리고 또 한 부분이 덮혀 시신의 모습이 내 눈에서 영원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저 허탈하다 못해 망연자실해지니 말이 없는 저 하늘을 발악하듯 붙들어 통곡하고 싶을 뿐이었다.
원래는 취토를 한 다음에 친척들이나 문상객들이 흙을 한 삽씩 뿌리면서 고인의 명복을 비는 평토를 해야 되는 것이었다. 단 하나 뿐인 외삼촌도 오시질 못했고 더불어 가까운 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그런저런 사정으로 올 수가 없어 그마져도 생략하고 말았다.
어른들께서 아버지의 시신에 물이 흘러 들어가지 말고 시신이 눕은 자리가 흔들리지 말라고 흙을 발로 꾹꾹 밟아 땅다지기를 하셨다. 그런데 내 기분은 그다지 좋게 받아드릴 수 없었다. 비록 내 아버지께서 흙 속에 묻히셨더라도 그리 무딘 발로 밟는 것이 마음에 걸려 안타깝기도 했었다.
그렇게 원통하게 눈을 감으신 내 아버지께서는 비통함이 뒤섞인 흙 속에 묻혀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영면의 터 우묵골에 잠드시고 말았다.
그렇게 초라할 수밖에 없는 장례였지만 모두가 고인에 대한 애절한 마음으로 안장을 하였다. 그리고 산을 내려서 오솔길 따라 집으로 향했다. 오솔길을 내려오면서도 아버지를 홀로 남겨두고 오는 것이 그도 안쓰러워 가던 길을 멈춰서 몇 번을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런 내 모습이 안타깝게 보이셨는지 두서너 걸음 앞서 가시던 어머니께서 뒤를 돌아보시며 나에게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신 어머니께서도 발걸음이 산기슭 도라지밭에 닿을 때 까지 걸어가시던 발걸음을 일부러 늦추셨다. 어림잡아 대여섯 차례가 넘게 아버지의 유택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셨다. 그러다 뒤따라 걷던 나와 서로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른 고개를 돌리셔 않 처다보신 척 하셨다.
그런 슬픔 속에서도 아버지를 그리워 하는 속마음이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우셨던지 아니면 그라도 하나 남은 자식이라 믿고 의지하고 싶으셨는지 슬며시 웃어 주셨다.
비록 아버지의 육신이 그곳 산자락 흙 속에 묻히셨더라도 기필고 영생하시리라 믿고 싶었다. 그 곳에 가셔도 늘 나를 기억해 주시리라 생각했다. 아울러 내 몸에 배어 있는 아버지의 체취가 아직껏 남아있음에 어떠한 경우에도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끝이 있을리 없는 고귀한 사랑을 꼭 나에게 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이제 그 숭고한 힘을 바탕 삼아 뉘에게도 뒤지지 않게 열심히 살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이제 등메산은 이 모든 시대적 불행이 빗어낸 용서치 못할 추악한 놈들의 만행이 빗어낸 영원토록 치유될 수 없는 애절한 사연을 꼭 기억할 것이다. 앞으로 살아나가는 동안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주시하여 내가 심약해질 때에는 가혹한 질책을 해줄 것이다. 대론 기쁜 일로 마음 가누기 어려워 가볍게 움직일 때도 과묵한 모습으로 더욱 차분하게 격려해주리라 믿고 싶어졌다. 아울러 끝없이 의지하고 싶어 숱한 마음에 대화를 주고 받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