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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40 조회 : 1,545




아주 오랜 태곳적부터 듬직하게 자릴 잡은 앞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주는 여유로움이 마치 어미 닭이 어린 병아리를 품안에 따뜻하게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름내 짙푸른 녹음으로 그토록 푸르기만 하던 앞산이 누리끼리하게 변한 모습으로 차갑게 다가서 바라보기에 마음이 스산키만 했다.

기스락을 휘어드는 늑막골 산길엔 시주 공양 다녀오는 스님 한 분의 모습이 눈에 띠었다. 등에 진 헝겊 바랑에 햇살을 가득 담고 동행하는 길손 없어 고즈넉하게 홀로 걸어가는 모습이 조금은 먼 듯해 작달막하게 보였다.

둥구나무를 지나 동네로 들어서니 김장에 쓰실 고춧가루를 준비하시는지 마루에서 상수네 아버지가 고추를 한 소쿠리 가득 담아 고추 꼭지를 따고 계셨다. 상수 어머니는 가위로 고추를 잘라 노란 씨를 빼내면서 두 분 모두 눈과 코가 매우신지 연신 밭은기침을 번갈아하셨다.

마을 한복판 방앗간 뒤꼍에 높다랗게 뻘쭘 서 있는 가죽나무 위로 옅은 구름자락이 느릿느릿 머무적거렸다. 나뭇가지엔 까치 한 마리가 다사롭게 내리쪼이는 오후 햇살을 받으며 느슨하게 머물렀다.

연자방앗간 공터 널따란 마당에는 병수가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좌우로 마구 흔들리는 자전거의 핸들을 앙증맞은 작은 두 손으로 움켜쥐고 페달을 밟아 안장(鞍裝)에 오르려 했다. 그러자 중심을 잃고 뒤뚱거려다 그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땅에 부딪힌 무르팍이 꽤나 아픈 듯 두 손으로 매만지고 쓰러진 자전거의 바퀴가 약을 올리듯 저 혼자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장님댁 문전에서는 신바람 나게 불러대는 각설이 타령이 높낮이의 가락을 타고 쟁쟁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무슨 큰 구경거리가 온 것처럼 타령꾼의 모습에 눈과 귀들 모아 바라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하느라 주위를 에워싸자 겉으로는 그런 분위기에 더욱 신바람이 나는 것 같았다.
허나 내 생각으로는 온갖 삶에 찌든 가슴 아린 시름들을 모다 떨쳐내려고 소리를 내어 지르는 듯했다. 그렇게 들려오는 소리가 흥에 겨운 듯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애잔스럽게 들렸다.

그 무렵, 며칠을 걸러 한번쯤 동네에 오는 우체부 아저씨가 고샅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우편물을 집집마다 나눠주시며 각설이 타령을 하시는 아저씨들의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셨다.
우체부 아저씨가 한 손에는 노란색 봉투 윗머리에 붉은색 고무도장으로 ‘군사우편’ 이라고 찍힌 편지를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아마도 얼마 전에 첫 휴가를 다녀간 기남이 형이 보낸 편지 같았다.

그때 우체부 아저씨를 어디서 보고 달려왔는지 종금이 누나네 어머니가 잰걸음으로 다가오셨다. 그런 다음 종열이 형에게서 편지가 온 것이 없느냐고 물으셨다.
우체부 아저씨가 고개를 흔드시자 긴 한숨을 내어 쉬며 ‘썩을 놈’ 이라고 혼잣말처럼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물가 쪽으로 힘없이 걸어가시는 모습이 퍽이나 안쓰러워 보였다.

우체부 아저씨가 동근이네 집에 우편물로 오는 신문을 배달하려고 가려 하자 주현이가 숨을 헐떡거려 달려오며 소리를 쳤다.

“우체부 아저씨, 볼일 보시구 이따가유 꼭 우리 집에 오셔야 혀유. 우리 아부지헌티 서울로 소포를 부쳐야 헌다닌께 꼭 오셔야 혀유. 알었지유?”

주현이가 가쁜 숨을 고르며 나를 보고 나서 맞바라보이는 종구네 집 대문 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나를 향해 말을 했다.

“야, 상민아. 종구네 집 용만이 있지? 용만이가 어디루 간 건지 아냐? 나는 아는디 절대루 종구네 식구들헌티는 말하지 말어야 헌다. 만약에 알게 되면 괜히 우리 집 입장만 곤란허게 되닌게. 음, 용만이가 동네 떠나기 전날 밤에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아버지 서울 주소 좀 알려 달라구 혀서 울 엄니가 갈켜 줬는디 아마 울 아부지헌티 찾아간 것 같은디. 그냥 너만 알구 있어. 그럼 이따가 보자.”

우물가 쪽 고샅길에는 종금이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금빛이 반짝거려 윤이 나는 머리핀이 치렁치렁하게 흘러내리는 머리를 가지런하게 한데 모아 묶은 곳에 꽂혀 있었다. 종금이 누나가 종구네 집 정희누나에게 마실을 가려나 나를 바라보고 다정스레 웃음을 지었다.

우물가 진수네 집에는 양지바른 쪽마루에 진수가 앉아 있었다. 잘 마른 해바라기 머리를 손에 들고 알이 잘 영근 해바라기 씨를 하나씩 뽑아 입에 깨물고 있었다. 마당가 눅눅한 곳에선 진수와 삼식이가 끝이 뾰족한 대못에 침을 튀겨 발라 못치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설핏 보였다.

준섭이네 집 마당에는 준섭이 어머니께서 다음 오일장에 내려는지 마른 고추를 멍석 위에 펼쳐 말리고 있었다. 준섭이 아버지께서는 겨울에 땔감으로 쓰려고 그루터기를 캐어 오셨는지 양쪽 팔을 걷어붙이시고 톱과 도끼로 자르고 계셨다.

그토록 몸에 좋다고 하는 생사탕 보약이 들어갈 영택이네 집에서는 축음기에서 ‘군사우편’의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행주치마 씻은 손에 받은 님 소식은. 능선의 향기 품고 그대의 향기 품어, 군사우편 적혀 있는 전선 편지에, 전해주던 배달부가 싸리문도 못가서, 복바치는 기쁨에 나는 울었소.

돌아가는 방앗간에 받은 님 소식은. 충성의 향기품고 그대의 향기 품어, 군사우편 적혀있는 전선 편지에. 옛 추억도 돌아갔소 얼룩진 한자 두자, 방앗간의 수레도 같이 울었소.”

가냘프게 부르는 여자 가수의 음성이 반주 음악소리와 함께 또랑또랑하게 고샅길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네 우물가에는 아주머니 두 분이 빨래를 하시는지 빨래를 두드리는 둔탁한 방망이 소리가 우물 밖으로 들렸다. 우물가 하수구 쪽에는 삼식이 아버지와 병수 아버지가 매운탕거리를 하시려는지 앞뜰 샛강에서 그물질하여 잡아 온 민물고기를 손질을 하고 있었다.
거의 다 타 들어가는 담배 끝을 입에 무시고 입술이 뜨거우신지 얼굴을 찡그리신 병수 아버지가 삼식이 아버지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성님, 참! 세상 돈은 있구 볼일이유, 허구헌날 저리두 크게 노랫자락 틀어 놓구 뱃심 좋게 사는 걸 보면. 이놈 팔자는 언제나 저리 속 편케 살아 볼라나 내 원참.”

그러자 삼식이 아버지가 병수 아버지를 바라보고 눈을 가볍게 흘기시며 말을 받아치셨다.

“음, 그래서. 자네는 허구헛날 신고산 타령만 허는구먼. 뭐, 그 팔자나 자네 팔자나 편하기는 다 똑같지 않은감. 안 그런가? 요기 아줌니들헌티 물어보라구 내 말이 어디 한 군디라두 틀린 디가 있는가?”

삼식이 아버지의 걸쭉한 말씀에 빨래를 하시던 동네 아주머니들도 같이 웃으셨고 덩달아 웃고 계시던 병수네 아버지가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그건 그렇구 아침나절에 보닌께 둥구나무 밑에서 영택이네 집 그 성님이 먹을거라구 허면서 읍내 사는 비암장시가 참말인지 그짓말인지는 잘 몰러두 몇 십 년 묵었다는 구렁이라나 뭐시를 끓이고 있던디. 젊은 각시 데리구 살려닌께 힘 께나 들었나 봅뎌, 그걸 다 먹을라구 허게.”

병수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에 아주머니들이 작은 소리로 웃고 계셨고 삼식이 아버지도 함께 웃으시며 다시 말씀을 하셨다.

“아, 내사 그딴 거 안 먹어두, 아직까장은 힘이 불끈불끈 솟아 우리 마누라가 날이면 날마다 걱정을 태산 같이 허던디 자넨 영 시원찮은감, 그런가?” 하시며 웃으시자

그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우물터가 온통 웃음소리로 가득 찼고 아주머니들은 부끄러운 듯 저마다 머리를 숙여 웃으셨다.

오후 늦은 무렵에 광주로 가는 군용열차가 내어 지르는 기적소리가 온 동네를 들썩거려 마을 지붕 위로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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