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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45 조회 : 1,477




앞산 마루 왕 소나무 우듬지에 오롯하게 떠오른 아침 해는 언제나 맘 편히 대할 수 있는 오래된 벗과 같았다. 그런 햇살이 단칸방 오두막집을 다붓하게 감싸 안았다.
울 밖 나목(裸木)의 표피(表皮)에 맺힌 아침 이슬이 성근 햇살에 영롱한 빛을 발하니 무릇 고결하게 보였다. 온 누리가 숙연한 이른 아침에 검은 증기기관차가 동네 앞을 지나고 있었다. 열차는 단말마(斷末摩)의 비명처럼 날카로운 기적(汽笛)소리를 푸석한 잿빛 겨울하늘에 세차게 남겼다. 그리고 이내 숨찬 모습으로 기다란 꼬리 끝을 서둘러 감추려는 듯 거무스레한 산모롱이를 잽싸게 휘감고 돌았다.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도랑가에 닿았다. 온몸을 스쳐 지나는 바람이 창백한 하늘만큼이나 싸늘키만 했다. 야트막한 둔덕엔 낭창낭창한 조릿대 숲 사이로 작은 멧새들이 부산스레 움직여 어렵사리 길을 트고 있었다.
찬바람이 홀로 자릴 지키는 언덕배기엔 참나무들이 부는 바람 따라 앙상한 가지를 미세하게 흔들고 있었다. 아마도 푸르렀던 지난날들이 그도 아쉬워 윤회(輪廻)의 그날만을 애를 써 기다리는 듯했다.
희끄무레 색 바랜 줄기 끝에 매달려 향기를 잃어 시든 산국(山菊)이 바라보기에 그지없이 애틋하게 보였다. 겨울 추위를 머리에 이고 파릇파릇 다보록하게 돋아나는 봄보리 밭엔 까마귀가 떼 지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그리고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앞 들녘엔 기러기 떼가 하늘 높이 떠올라 아침 햇살 듬뿍 받으며 금강 들녘 그 어느메쯤으로 날아갔다.

학교로 향하는 냇둑 길에서 벗어나 새터 마을로 들어서는 나들목에 닿았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를 더욱 부추기나 비석골 골짜기로부터 한차례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땅 위에 나뒹굴던 퇴색된 나뭇잎들이 저마다 요란스레 소릴 내어 나뒹굴어 더없이 황량키만 느껴졌다.
나이 어린 동네 아이들은 몸이 추운지 몸을 잔뜩 웅크려 학교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키 작은 내 친구 옥순이도 추위에 두 볼이 발그레해졌다.
차갑기만 한 날씨 탓인지 검정 고무신을 신은 발끝이 마냥 시려왔다. 추위에 몸이 얼얼해져 얼른 교실 안으로 들어가 난로 위에 뜨겁게 끓인 보리차 한 컵으로, 추위에 잔뜩 움츠려진 몸을 얼른 녹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새터 마을로 들어서 학교 울타리 모퉁이를 지나려할 무렵이었다. 옆에 나란히 걸어가던 옥순이가 올벼쌀을 한 움큼 주어 입 안에 넣었다. 추위 속에서도 딱딱한 올벼쌀을 한 움큼 입에 넣고 씹으니 입 안 가득 우러나오는 달달하면서 담백한 맛이 잠시인들 추위를 잊을 정도로 입맛을 돋우었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마음을 써 챙겨주는 옥순이가 더없이 고맙기만 했다.

새터 마을은 동네 모습이 서두름 없이 느릿하게 변모되어 가고 있었다. 대장간에서는 주인아저씨가 황토로 높다랗게 쌓아 올린 화덕에 벌겋게 불이 달아오르게 풀무질을 하고 계셨다.
길 건너편 이발소에는 손님이 통 없는지 이발소 아저씨가 두 다리를 쫙 벌리고 난로 앞에 앉아 아침부터 졸고 있었다.

그즈음 학교 정문 앞에는 우리 반 부반장인 영선이 숙모님께서 얼마 전부터 문을 열어 장사를 하시는 문방구가 하나 생겼다. 그동안 우리들은 필요한 문구를 꼭 면소재지에 있는 엄씨 아저씨네 점방에서 구입을 했는데 이제는 새로 생긴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도 될 것 같아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가게 추녀 끝 한쪽 모퉁이에는 한글로 ‘담배’ 라고 쓴 양철 간판이 선명한 색깔로 눈에 띄었다. 이젠 새터 마을 어른들도 담배를 사려고 조금 멀리 떨어진 화산리까지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겨울바람이 심술을 부려 요동을 치려나 한차례 요란스럽게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운동장을 걸으려니 바람에 쓸려오는 가는 모래알이 사정없이 눈언저리를 파고 들려했다.
눈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몸을 옆으로 돌려 눈을 살포시 감고 교실을 향해 걸었다. 교실 앞에 닿아 교실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추녀 끝에 ‘ㄴ’자 모양으로 꺾어진 연통 밖으로 연기가 솔솔 피어나고 있었다.
연통으로 새어 나오는 난로의 훈김에 교실 유리창의 유리면이 희끗희끗하게 보였다. 찬바람이 오지게 불어대는 복도에서 신발장에 신발을 서둘러 넣고 추위에 쫓기듯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학교에 일찍 온 아이들이 ‘타닥타닥’ 소릴 내는 난롯가에 둘러앉아 불을 쬐고 난로 위에 얹어 놓은 주전자에서는 보리차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주전자 가장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물방울이 뜨거운 난로 위에 떨어져 도르르 구르다 ‘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보리냄새가 구수하게 퍼져 났다.
그날 당번인 광태는 머릴 굽혀 난로를 피우느라 무던히도 애를 쓴 듯해 보였다. 얼굴과 양쪽 콧구멍에 연기로 그을린 검은 자욱이 남아 있어 저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드르륵’ 하고, 교실 문짝 밑 부분에 달린 도르래가 문턱에 깔린 레일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면소재지 화산리에 사는 아이들과 석란이가 교실로 들어섰다.
책상 위에 책보자기를 내려놓은 석란이가 자기 어머니께서 털실로 곱게 짜신 방석을 선생님 의자 위에 가지런하게 올려놓았다. 이미 여러 차례 그런 모습을 보아 온 난롯가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서로 눈짓을 하며 시새움하는 것처럼 비웃는 표정을 했다.

열기가 잘 달아오른 연통 가장자리에 이글거리는 열기에 교실 뒷벽 게시판에 붙어 있는 그림들이 울룩불룩하게 아롱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 초가을 미술시간에 영선이가 수채화 물감으로 잘 그려놓은 산자락 아래 자그마한 초가지붕 우리 집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 분교가 새로 생긴 화정리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하는 채운면 끝머리 동네 우기리에 사는 성태와 응선이도 교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키 작은 응선이가 ‘딱딱’ 껌 씹는 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려는 듯 열심히 껌을 씹고 있었다.
그리고 난롯가에 쭉 둘러 서 있는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응선이가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말을 했다.

“야들아 끔 냄새 좋지? 이건 점방에서 막 파는 끔이 아니구 미국 사람들이 먹는 바둑 끔인디 의정부라는디로 군대 간 우리 삼춘이 이번에 휴가 오면서 증말루 비싸게 돈 주구 사 온 거여.”

영어로 잔뜩 인쇄된 반질거리는 비닐에 싸여 포장된 납작한 종이 갑을 손에 쥐고 다들 보라는 듯 한참을 자랑했다. 아이들은 곱살하게 생긴 껌 통 속에 들어 있는 새하얀 색으로 납작하게 생긴 바둑 껌이 신기하고 부러운 듯 모두 바라보았다.
그런 응선이와 평소 사이가 그다지 원활하지 못한 석란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했다.

“야, 최응선 그게 뭐 대단헌 거시라구 교실에서 시끄럽게 떠드냐? 그런 거 돈만 가지구 대전에 가면 을마든지 살 수 있으닌게 그만 자랑허구 조용히 좀 혀라. 선생님 오실 때두 다 됐으닌께.”

석란이 말에 응선이가 절대로 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석란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내 받아쳤다.

“야, 너는 이런 거라두 있냐? 왜, 또 니네 집에 가면 있다구 헐래? 뭔 말만 나오면 지네 집에는 다 있다구 그런다닌께 말로는 뭔 소리를 못허냐? 야 우리 집에는 금송아지두 있다.”

응선이가 혀를 입 밖으로 쏙 내밀어 약을 올리자 화가 잔뜩 나 얼굴이 붉어진 석란이가 응선이 앞으로 다가와 말다툼을 하려했다.

그때 교실 옆 복도에서 ‘따그닥 따그닥’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조금 요란하게 들려 창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향해 오시자 모두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당탕’ 소리를 내며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던 듯 시침을 뚝 떼고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숙연해진 교실엔 ‘타닥 타닥’ 난로 속에서 장작 타는 소리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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