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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53 조회 : 1,612




산들은 겹겹이 이어져 서로 살갑게 몸을 맞대고 있었다. 그리고 시린 바람을 다스려 넓은 들녘을 욕심껏 끌어안으려 했다.

예부터 동네 애환(哀歡)을 함께 하여 온 연자방앗간은 시간을 탓하지 않는 고연한 모습으로 늘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왔다. 반질반질하게 닳은 돌절구 위에 놓인 커다랗게 둥근 맷돌이 소리를 멈춘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관리를 하지 않아 지붕을 덥고 있는 볏짚이 군데군데 빗물에 삭아 내렸다. 드문드문 틈새 난 지붕 사이로 한낮 햇살은 무엇이 그리도 궁금한지 기웃기웃 연자방앗간 속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붕 위에 올린 검정 기와가 싸늘한 인심만큼이나 더욱 차갑게만 보이는 종구네 집에는 머슴 일을 하던 용만이 형이 떠난 탓인지 다소 썰렁하게 보였다. 비싼 돈을 들여 사온 축음기 태엽을 용만이 형이 무리하게 돌리다 끊어져 버렸다.
그 일로 화가 잔뜩 난 종구네 아버지에게 용만이 형이 심한 꾸지람을 듣고 참다못해 얼마 전 마을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고 말았다. 그 뒤로는 축음기 소리가 담 밖으로 단 한 번도 들려오질 않았다.
용만이 형이 마을을 떠나자 하는 수 없이 종구네 아버지가 외양간 바닥에 마른 볏짚을 풀어헤쳐 고루 깔아 주고 계셨다.

이장님댁 사립짝 앞에는 코흘리개 막내둥이가 무엇이 못마땅한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작은 손안에 호두 알 두 개를 애써 거머쥐려 하니 손 밖으로 자꾸만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두 손으로 호두 알을 마구 비벼 소리가 나자 그제야 슬며시 웃었다.

삼식이네 집 앞마당에는 마을 어른들이 모여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기다랗게 펼쳐 놓은 멍석 가에 빙 둘러서 편을 갈라 흙바닥에 깨어진 사금파리로 금을 그어 말판을 만들어 놓았다. 손바닥에 한차례 침을 뱉어 윷가락을 거머쥐고 반지르르하게 윤이 잘 난 윷가락을 멍석 위에 던진 후 오른쪽 허벅다리를 탁 쳐 ‘모야!’ 하고 소리를 쳤다.
삼식이 어머니가 개다리소반 위에 뚝배기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뜨거운 찌개와 막걸리가 담긴 주전자를 들고 나오시자 잠시 윷놀이를 멈추어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시며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셨다.
동네 어른들 중에 오랫동안 객지 생활을 하셔 얼굴을 뵙지 못한 분의 모습이 보였다. 성격이 원만하여 스스럼이 없고 붙임성이 좋아 언제부터인지 마을 사람들이 ‘더펄이 천수 아버지’라고 불렀다. 미장일을 하시러 부산에 가 계시던 아저씨가 겨울철 일거리가 마땅하지 않아 잠시 쉬려고 내려오신 것처럼 보였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욱 말쑥해진 모습이 조금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모두들 술상을 마당 가운데에 놓고 빙 둘러 담소(談笑)를 나누시는데 동네 이장님이 말씀하셨다.

“기나저나. 아침나절에 종열이가 군대 기피한 것 자수하러 지서루 간다구 하면서, 며칠 있으면 치루는 지네 여동생 결혼식 때 아줌니 혼자서 큰일 치울라면 힘이 벅차닌께, 나보구 좀 도와 달라구 부탁하려고 아침 일찍 찾아왔던디, 다들 어떻게 서루 얼굴이라두 보구 헤어졌는지 모르것네 그려. 막상 그렇게 간다고 대문 밖 나서는 걸 보닌께 당연히 가야 할 군대라서 뭐시라 말하기가 좀 그렇기는 허든디. 처음이라 낯선 동네에 제 여편네와 젖도 안 뗀 자식새끼 그리 두고 떠나는 걸 보니 한쪽으로는 맘이 영 편칠 않던구먼. 암튼 일이 수월하게 잘 풀려 큰 고생 면하고 하루 빨리 나와야 헐 건디. 참말로 걱정이네 그려.”

그러자 동네 크고 작은 일에 앞을 서시는 동근이 아버지가 이장님의 말끝을 이으셨다.

“이장 말마따나 종열이 처지가 딱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종열이가 이번에 맘 잘 먹은 거지 뭐 . 어찌! 이 밝은 세상에 언제까지 기피자루 도망 다니며 살 꺼여? 넘들 다 갔다 오는 군대 뮈시 그리 힘들고 그러는지, 참말이지 대포소리에 귀가 얼얼하구 총알이 비 오 듯하여 금새 얼굴 보이던 전우가 고개 돌려 보면 허망하게 죽어 나가는 그 험한 전쟁터에서도 온갖 위험 다 헤치구 살아왔는디, 지금 같은 휴전 상태에 뭔 놈에 걱정이 있을 꺼시여 엄동설한에 좀 추울랑가는 몰라두. 암튼 잘 생각하구 잘 돌아온 거여.”

궐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무시고 피우시며 두 분이 하시는 말씀을 묵묵히 듣고 계시던 경우 있게 한 성깔 하시는 삼식이 아버지가 말씀을 하셨다.

“뭐시냐. 이장 말 허구 동근이 애비 말두 다 들었으닌게, 다들 그리덜 알구 인제 한 사나흘 남은 종금이 혼례 때는 다들 빠짐없이 힘을 합쳐가지구 내 일처럼 도와주자구. 그게 사람 도리닌께, 참 그건 그렇구 그 집두 이참에 걱정이 엎치구 겹쳐 버렸네 그려, 가만히 말 들어 보닌게 그래두 종열이란 놈이 그 기술 하나는 똑 소리가 나게 좋은 모양인지? 떡두꺼비 같은 아들놈을 떡하니 낳아서 들어왔다는구먼 그려.”

삼식이 아버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종열이 형의 일로 다소 누그러진 듯싶었던 분위가 되살아나는 듯 동네 어른들이 온 마당이 들어차게 커다랗게 웃으셨다. 삼식이 어머니께서는 삼식이 아버지의 말에 쑥스러우신지 피씩 웃으시며 얼른 몸을 돌려 거적문을 제치고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늦은 오후로 접어드는 햇살이 불그레한 빛으로 마을 안팎을 고루 비춰 주었다.
오전 내 추위로 움츠렸던 몸이 다소는 풀리는 듯했으나 역시 바람은 싸늘하기만 했다. 양철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우물가를 벗어나 흙담 길을 돌아 비좁기만 한 고샅길을 빠져 나오니 널따란 벌판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을 산객(山客) 산국들이 빛바래 피폐(疲弊)한 모습으로 노을빛에 몸 기대어 머릴 숙인 언덕배기에 올라섰다. 바람 스산하게 줄이어 불어오니 못다 버린 그리움 애꿎게 거머쥐려는지 마른 낙엽들이 야위어 핼쑥해진 얼굴로 바스락 소릴 냈다.

마을 사람들은 제가끔 주어진 땅덩어리를 부지런히 일구며 살아왔다. 일손이 한가할 때는 들녘에 나가 풋나물 뜯고 때때로 홀가분하게 앞산에 올라 먹을거리도 구했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그리 욕심 없이 살았다.
삶의 그루터기 들메마을에 조상 때부터 머물러 살고 있는 사람, 그리 머물다 떠날 수밖에 없어 그렇게 가슴 아린 사연을 안고 떠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곳에 머물러 정붙여 살려는 사람들이 새로이 찾아들었다. 광란의 전쟁이 남긴 상흔(傷痕)으로 남겨진 잔혹했던 기억을 애써 지워 보려 버둥거리는 마을 사람들도 한데 어울려 살았다.
모두가 그렇게 서로 얽히고 얽혀 흙냄새 땀에 젖어 살아가는 삶 속에 때론 아옹다옹 다툼질하는 소리가 들려오니 그것 또한 사람 사는 모습인 것 같았다.

무거운 세속의 짐을 홀로 머리에 이고 있는 듯 의연(依然)하게 바라보고 있는 앞산 모습이 가슴 한 켠에 듬직하게 와 닿았다. 노을의 황홀경(恍惚境)에 서서히 빠져드는 방죽가에 서있는 두 그루 미루나무는 언제나 의지가지처럼 서로를 맞바라보고 있었다.
그 우듬지 위에 솔개 한 마리가 다 늦은 저녁 두 날개 활짝 펴고 늦부지런 떨며 찬찬히 틈새를 노리고 있었다. 그때 프로펠러의 굉음을 터트리며 다가서는 앞머리 뭉툭한 정찰기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서쪽 저 멀리 있는 군산 비행장으로 돌아가려는지 정찰기가 날아오자 느슨하게 여유를 부리던 솔개가 산기슭으로 재빨리 몸 돌려 날아갔다.

마치 최면(催眠)에 걸린 듯 푸른 하늘이 노을빛에 붉게 타오르는 것은 아직도 추구하려는 삶의 맥박이 힘차게 뛰고 있는 까닭이며, 능선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갈참나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온 사방이 노을빛에 넉넉하게 묻어오는 것은 아직도 다 나누지 못한 오붓한 삶의 이야기가 조금은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나쳐 간 수많은 시간들은 실로 어린 내 가슴팍에 많은 아픔을 새겼고 가끔은 하나둘씩 남겨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나를 무척이나 힘들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리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기억들이 내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노을빛 따라 채워져 가고 있었다.

등 뒤에서 숨죽이던 작은 별 하나가 때 이르게 수줍은 눈망울을 살며시 드러냈다. 멀리 읍내 하늘가에 건물들이 어렴풋이 아른거렸다. 삶의 발자취가 아직은 남아 있는 까닭인가? 아랫마을로 이어진 산릉선에 저녁노을이 선홍빛으로 흠씬 물들고 있었다.
표정을 잃어 침울해 보이는 늦저녁 하늘엔 둥지를 찾는 작은 새 한마리가 아쉬움의 끝자락 여운처럼 냉랭(冷冷)한 한 가닥 선을 그으며 자취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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