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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65 조회 : 1,723




침침(沈沈)한 겨울이 잔뜩 심술을 부리는가 하늘은 구름이 겹겹으로 뒤덮여 까뭇까뭇했다. 그 틈새를 헤집고 나오려는 한낮 해는 구름과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았다.
눈에 익은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을 품안에 끌어안은 저 산도 마냥 흐릿흐릿하게만 보였다. 온 주위가 찌뿌듯한 날씨는 알이 송두리째 빠져나간 빈 쭉정이 같은 허한 느낌을 잔뜩 자아내고 있었다. 더불어 고적한 심사(心思)는 허물도 못 벗는 그리움에 낮은 소릴 겨우 내어 마른 입술이 푸석하게 메말라 갔다.
눈앞에 펼쳐진 저 산은 마음에 남는 것 하나 없이 스쳐간 어제가 싫어 시무룩한 내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린 가슴 달래주려나 들키고 싶지 않은 둘만의 이야기를 되뇌듯 듬직하게 자릴 하고 있었다.

자꾸만 칭얼대는 철부지의 엉덩이를 소리쳐 두어 차례 때리고 돌아서는 어머니의 어정쩡한 마음처럼 잔뜩 흐린 날이 아침 내내 우중충하기만 했다. 그러다 해가 오후를 조금 비켜서자 동글동글한 싸락눈이 ‘사르락 사르락’ 소릴 내며 한차례 내렸다.

제법 미끄러운 얼음판 위에 제 세상을 만난 듯 동네 아이들이 모여 썰매를 타고 있었다. 수영이는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먼저 빨리 달리려다 동네 아이와 서로 부딪치고 말았다.
썰매가 저 혼자 쑥 빠져나가 제풀에 나뒹굴어 쿵하고 엉덩방아를 야무지게 찧었다.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일어나 아픈 엉덩이를 자꾸만 만지작거려 투덜대면서 썰매를 잡으려 걸어가고 있었다.
발 썰매를 잘 타는 주현이는 몸을 앞으로 약간 숙여 두 팔을 좌우로 흔들며 맵시 있게 달려 멀리만큼 내달리고 있었다.

찌뿌듯한 하늘이 오전 내내 해를 가려 미안스러웠는지 조금씩 구름을 걷어 햇살이 보일 만큼 자릴 비워 주니 하늘이 점점 트이는 것 같았다. 살얼음판에 잘못 들어가 물에 빠진 아이들이 물에 젖은 신발과 발 냄새가 무던히도 나는 얇은 목양말을 말리려고 모닥불을 피웠다.
냇가 둑 밑에 도란도란 모여 두 손을 활짝 펴 모닥불을 쪼이는 그만그만한 아이들의 빡빡머리 위로 다스한 햇살이 어렵사리 찾아들어 잠시라도 보듬어 주려는 듯 마음속 넉넉하게 포근했다. 멈춤을 모르는 시간의 흐름은 벌써 겨울의 한가운데쯤에 머물고 있었다.
‘사르락사르락’ 옷깃이 쓸리는 소리가 나 냇둑 위를 올려다보았다. 종기형네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종기형 아버지로부터 예물로 받으셨다는 꼬리가 길게 늘어진 누런 여우 목도리를 목에 걸치시고 한 손에 창호지에 곱게 싸여 하얀 왕골 속대의 가는 끈으로 야무지게 동여맨 한약 봉지 몇 첩을 손에 들어 동네를 향해 걸어오셨다.
동구 밖 쪽에는 면 소재지에 볼일이 있어 나가시는지 기성이형 어머니가 나무다리로 걸어오시다 두 분이 서로 얼굴을 마주치시자 기성이형 어머니보다 나이가 아래인 종기형네 어머니가 먼저 머리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하시며 말씀하셨다.

“아이구 기성이 엄니 아닌감유? 그간 별일은 없으셨구유? 한동네 살아두 요즘은 노인 어른 병 수발하느라고 약 지러 한약방에 왔다 갔다 하는 거 외에는 통 사람들을 못 만나서 아줌니 뵌지두 설차니 됐네유, 에이구 모다덜 사는 게 뭔지 그런디 어디 읍네라두 가시는 감유?”

그러자 다리 중간쯤에 걸어오신 기성이형 어머니가 말을 받으셨다.

“맞어! 집이 본지두 참말루 오래 됐구먼 그려. 동네 떠도는 말로는 종기네 에미가 그리 효부라구 하던구먼 그려 노인네 똥오줌 다 받어내구 그런다고 칭찬들이 자자하던구먼. 그리구 읍내는 뭔 읍내란가 집이두 다 알다시피 그 육시랄 놈이 그리 집을 뛰쳐나가서 사람 애간장 타는지도 모르고 일절 소식 하나 없으니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잠을 자도 영 개운치 못해서 등화동 수랑골댁 점쟁이가 그리 용하다고들 해서 뭔 좋은 말이라도 들을라나 싶어서 한번 가 볼려고 하는구먼.”

기성이형 어머니가 둑 밑까지 들려올 정도로 한숨을 크게 내쉬자 말을 듣고 계시던 종기형네 어머니가 다시 말을 이으셨다.

“아이구 뭔 놈에 효부래유. 다들 하고 사는 일인디 그걸 가지구 뭘 그러세유 노인 양반이 연세가 있으셔 좀 차도가 느려서 그렇지 끝까지 잘 모셔야지유 그리구 기성이 일땀시 너무 걱정이랑은 마세유 그러다가 몸이라두 축 나실까 두렵네유 설마헌들 그 나이 먹었는디 어디로 간들 지들 앞가림이야 하고 살겠지유. 뭐 그나저나 추우신디 얼른 가 보세유.”

종기형 어머니께서 둥구나무쪽으로 걸어가시고 기성이형 어머니도 등화동 점쟁이네 집으로 발길을 무겁게 옮기셔 그렇게 걸어가시는 뒷모습이 바라보기에 마음이 개운하질 못했다.

인간 삶의 여정(旅程)이 그렇듯이 저마다 한두 가지의 크고 작은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 같았다. 지난날에 있었던 그 처절한 아픔들의 상처가 아직까지 자릴 잡지 못해 치유되지 못하고 이따금씩 들썩여져 서로 적대시 하며 다툼질을 하니 모쪼록 내가 사는 이 작은 동네만은 불행의 화신(禍神)이 비켜 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이틀 전부터 수리를 시작한 상수네 아랫집에서는 병수네 아버지가 경수 아저씨와 삼식이 아버지 그리고 부산에서 미장일을 하시다 오신 천수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고 계셨다. 오후 참을 내오시는지 병수 어머니가 널따란 버들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오셨다.
그 뒤를 따라 얼굴을 처음 보는 상수네 누나 정도 나이에 검은 머리가 치렁치렁하고 콧날이 오뚝하며 옷차림새에 도시 냄새가 물씬 나는 낯선 처녀가 술 주전자를 들고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고샅길 한가운데 종구네 집에선 종구네 아버지가 추우신지 콧등이 벌개가지고 외양간을 치우시느라 쇠스랑으로 거름을 끌어내시고 있었다. 종구는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세숫대야에 걸레를 빨아 꽤나 넓고 기다란 마루를 엉덩이를 반쯤 들고 밀면서 닦고 있어 조금은 집안이 안정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동네 방앗간 사랑방에서는 해마다 겨울 한철은 언제나 그랬듯이 저녁이 가까워 오자 한차례 군불을 땠는지 아궁이에 불꽃이 채 사그라지지 않아 불그레하게 보였다. 방안에서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신발들만큼이나 떠들썩한 동네 어른들의 걸쭉한 목소리가 방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우물가에 가까이 다가서도 영택이네 축음기 소리는 그 날도 역시 들려오질 않고 냇가 얼음판에서도 영택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아직까지 영택이 아버지가 그 아주머니를 찾으러 다니시는지 대전에서 안 돌아오셔 영택이와 중례누나가 걱정을 하고 있는 듯했다.

우물가 맞은편에서 덩치가 커다란 인식이가 도망을 치듯이 뛰어오는 것 같더니 이내 대문 앞으로 인식이 어머니가 지겟작대기를 손에 거머쥐시고 뛰어나오시며 큰소리를 치셨다.

“야! 이놈에 새끼야 어디루 도망을 가냐? 너 거기 안 설래? 오냐 잘 나가거라 제발 좀 인젠 집구석에 들어올 생각두 말구 나가 죽던지 살던지 니 맘대루 해라 내 이번만큼은 숨이 떨어지는 일이 있어두 니 놈을 절대로 용서 안을 테닌까 아! 세상에 이런 일이 있는감. 늙으신 지 할매 일 당하시면 모실 관을 짤 때 쓸라구 죽은 지 애비가 그리 애지중지하게 놔둔 나무 송판을 그래 그 썩을 놈에 쓰껫토라나 뭔가를 만든다구 내가 집을 잠깐 비운 사이에 톱질을 해서 말짱 못쓰게 만들어버렸으니 이걸 어쩌면 좋데.”

인식이 어머니께서 발을 동동 구르시고 인식이는 언제 사라졌는지 골목 끝머리까지 바라보아도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 시절 동네 풍습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목관에 모셔 장지로 운반을 하였는데 사는 형편이 아주 좋은 집은 오동나무 또는 향나무 관을 썼다. 그리고 그냥저냥 원만하게 사는 집들은 소나무로 만든 관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마져도 형편이 어려운 집들은 거적때기에 시신을 둘둘 말아 장지로 옮겼다. 생활이 좀 넉넉한 집들은 연로하신 어른님들을 위해 안동포라고 하는 고급스런 삼베 수의를 미리 준비하기도 했다.

들녘 멀리 자그맣게 보이는 채운 역사에는 신병 교육 훈련을 끝마치고 각자 부대로 배치되는 장병들을 실은 군용열차가 늦저녁 햇살을 듬뿍 받으며 강경 역에서 달려오는 상행 열차에게 길을 비켜 주려고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열차 안에서는 장병들이 부르는 우렁찬 군가 소리가 마을까지 들려왔다.

언제나 변함없이 두 그루 향나무 다소곳하게 머릴 숙이고 있는 우물터에서 물을 깃느라 젖어오는 물기에 손이 퍽이나 시려 왔지만 어머니가 떠 주신 벙어리 털장갑을 손에 끼고 물지게 고리를 양손으로 붙들고 고샅길을 빠져나왔다.

동네 아이들은 내 털장갑을 얼룩빼기 장갑이라고 놀려댔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가 이 집 저 집에서 주문 받으신 털옷을 뜨개질을 하셨다. 그리고 남은 자투리 털실을 모아 놓았다가 한데 합쳐 짜주셨다. 그래서 내 벙어리 털장갑의 색깔이 얼룩덜룩했다.

병수 아버지도 동네 아저씨들과 함께 일을 마치시고 동네 안으로 들어오시고 동네 아이들도 집으로 돌아가려는지 냇둑 위로 올라 하나둘씩 마을로 걸어오고 있었다.

금강 하구 들녘 저만큼에 기울려 하는 저녁 해가 내가 산과 귓속말로 나눈 둘만의 밀어 한마디를 숨어서 들었는지 저도 기억이 조금은 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모습 아랑곳하질 않고 종일토록 들녘 저편에 머물러 가슴앓이를 하던 그리움이 토(吐)질을 하여 저녁연기 끝자락에 묻혀 가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을 살며시 훔쳐보던 이른 저녁 찬별 하나 부질없는 세속(世俗)을 깨우쳐 주려나 화산리 교회 십자가 위에 소곳하게 머물고 있었다. 구름에 반쪽 먹힌 창백한 달이 부지런 떠는 듯 찾아들어 내 아버지에 대한 애태우는 상념마저 묻으려 하니 한 조각 그리움이 더는 가까이 다가서지 못함에 슬퍼도 그쯤에서 멈춰야만 했다.

조붓한 오르막길을 걷노라니 더없이 공허(空虛)하고 마른 나뭇가지들이 숨소리를 낮추니 바람도 잠시 쉬어가는 듯했다. 언덕배기에 잠시 멈춰 눈을 모아 갈참나무를 바라보았다. 노을빛에 비친 나목의 끝머리 가지에 얼어 달라붙은 작은 물방울들이 영롱한 빛으로 언뜻언뜻 애처로이 바라보였다. 이제 내 아픔의 부스러기도 매섭게 부는 바람결에 흩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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