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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70 조회 : 1,496




산은 하늘을 바라보며 우직스럽게 붙박이를 하고 검푸른 바위 위에 잠시 머물던 구름 한 자락 이 서서히 계곡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토록 온 주위가 평온키만 하여 처해진 삶이 비록 간고할지라도 무탈함 속에 머물길 그토록 원했건만 비정한 세속은 나로부터 내 아버지를 어이없이 빼앗아가고 말았다.
그로 인해 어린 가슴에 감당키 어려운 슬픔 하나를 커다랗게 남겨 놓고 말았다.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옹이 져 있어도 치유할 수 없는 냉엄한 현실에 그저 목만 타들어갔다.
그리 지우려 애를 써보아도 되돌리지 못해 망연히 서 있는 움츠린 내 작은 몸뚱아리가 더더욱 초라할까 싶어 버티듯 두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고 허리를 펴 보았다. 허나 그 또한 부질없음에 이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런 애틋함마저도 깨뜨리려는지 두 볼을 할퀴듯 세차게 스쳐 지나는 삭풍(朔風)이 매정스럽기만 했다. 온몸을 떨어 울어주는 나목들이 아린 눈빛으로 말을 대신하는 언덕배기에 올랐다. 구름사이로 한낮 햇살은 빼꼼하게 얼굴을 내밀건만 싸늘하게 불어오는 찬바람은 한 치 정 붙일 곳 없이 스산키만 했다.

긴 겨울방학이 끝이나 개학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저마다 느긋했던 마음에 미뤄 놓았던 과제물들을 뒤늦게 챙기느라 그런지 개울가에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런 모습에서 길게만 느껴졌던 방학이 끝났음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중학교 진학을 위한 입학원서 제출과 졸업식, 그리고 눈앞에 다가오는 설 명절의 설렘에 나름대로 가슴이 부풀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동구 밖 나무다리에는 마당발 병수네 아버지가 면소재지로 가시려는지 큰기침을 하시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 편 방죽 앞 큰길에는 주현이와 수영이가 사이좋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는 주현이 어머니께서 마당에서 머리를 직접 깎아주셨는데 바깥 날씨가 추워 그랬는지, 아니면 설 대목을 앞두고 복조리와 대소쿠리 만드는 일이 바쁘셔 그랬는지, 주현이와 수영이가 면소재지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오는 것 같았다. 부는 바람에 머리가 시린 듯 주현이가 빡빡 깎은 머리를 연신 손으로 문대며 걸어왔다.

방학 동안 썰매도 타지 못하고 일을 열심히 거들었다고 주현이 어머니께서 큰마음을 먹고 과자 값을 주신 것 같았다. 나무 막대에 납작하게 꽂힌 빨갛고 파란 색소가 들어간 알록달록한 사탕을 입으로 연신 빨며 자랑스럽게 동네로 들어섰다. 아마도 동네 아이들에게 보라는 듯이 자랑을 하려는 것 같았다.

고샅길 첫들머리 집에 사는 우현이는 토방 앞에서 버무리떡을 손에 가득 쥐고 입에 베어 물면서 어린 강아지들이 마냥 귀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떡 냄새를 맡은 강아지들이 서로 달라고 앞으로 모여들며 깡충거리자 조금씩 골고루 떼어 주었다. 강아지들이 서로 먹이를 차지하려고 싸움질을 하자 발로 가볍게 밀쳐 떼어 말리고 있었다.

순아네 할아버지는 끝머리에 지우개가 달리지도 않은 연필을 주머니칼로 정성스레 깎고 계셨다. 아마도 손녀가 사랑스러워 새하얀 목화솜이 가지런하게 깔린 필통 속에 넣어주시려는 것 같았다. 방안에서는 밀린 숙제 때문인지 순아를 다그치시는 순아네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 너머로 조금 크게 들려왔다.

고샅길에는 새로 이사를 와서 아직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누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 길게 늘인 공방집 누나가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오는데 동네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는지 몸을 가누려고 애를 써도 균형을 잘 잡지 못하고 걸어오는 모습이 퍽이나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그 누나가 아무리 도회지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다 해도 이젠 그 곳의 생활에 때를 벗고 이곳 시골 생활에 익숙해지려면 조금은 시간이 걸릴 듯해 보였다. 걸어오는 얼굴 모습을 가까이 바라보니 동네 누나들 중에 인물이 제일 예쁘게 생긴 것 같았다.

외양간에 있는 소 목덜미에 달린 워낭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종구네 집 대문 앞에는 수다스럽기 짝이 없는 방물장수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종구 아버지로부터 중매를 잘 서달라고 받았는지 두어 말쯤 되어 보이는 쌀자루를 머리에 이고 그리 신이 나는지 입이 함박만 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런 모습이 눈으로 보기에 퍽이나 경망스럽게 보였던지 하얀 두루마기에 갓을 쓰시고 대문 앞을 지나시던 진식이 할아버지가 밭은기침 소리를 크게 내시자 방물장수 할머니가 진식이 할아버지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가볍게 삐죽거리고 동구 밖을 향해 걸어가셨다.

문밖에서 방물장수 할머니를 배웅을 하시던 종구네 아버지가 진식이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에 신경이 쓰이는지 평소와는 달리 격을 갖추어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다 방앗간 대문 앞 양지바른 곳에 앉아 계신 동네 어른 두서너 분들과 눈길이 마주치자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종구네 어머니 돌아가신지 일 년도 채 안된 시점에 정희누나가 기성이형과 동네를 뛰쳐나가 안살림을 할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는 하지만 다 늙어가는 나이에 혼삿말이 오고 가는 것이 자기 딴에는 남들 보기에 부담스러운지 쑥스러워 하는 듯했다.
그런저런 모습들을 보고 있으려니 약 이십 여 일 전에 종구네 집에 방물장수 할머니가 다녀간 뒤로 그 소문이 동네에 펴지자 어머니와 옥순이 어머니가 서로 주고받으시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사정이사 그렇다고 혀두 여편네 죽었다고 그리 울고불고한 게 이제 겨우 반년이나 됐을 건디, 그새 새마누라 얻어 들이려고 하니 세상 남자들 심보따리가 다 그런 건가? 어찌됐던 지간에 죽은 그 여편네만 불쌍하지 뭐.”

햇살이 다소곳하게 드는 마루 앞에는 종구가 면 소재지에 석란이를 만나러 가는지 기름칠을 잔뜩 하여 자전거 두 바퀴에 윤이 반질거리게 닦고 있었다.

그리고 고샅길로 나선 종구가 나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방물장수가 혼삿말로 다녀간 것이 자존심이 강한 저도 부담스러웠는지 애써 눈길을 돌려 생전엔 다시 안 볼 듯이 매정스레 자전거를 타고 고샅길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듯 티끌 없이 자라야만 될 어린 동심들이 전란(戰亂)이 남기고 간 뼈 속 깊이 아픈 상처와 어른들의 이기적인 사고의 잣대로 가위질 되어 조각난 채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며 살아가야만 하였으니 그것은 흉흉한 시대가 우리에게 남겨준 슬픈 유산(遺産)이었으리라.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중학교 입학시험으로 마음이 들떠서 그런지 더욱 예스럽게 바라보이는 읍내 건물들이 나를 향해 어서 힘차게 달려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우물터 길가에 인식이가 동네를 시원스레 한 바퀴 돌려는지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갈고리에 쇠바퀴 부딪는 소리가 조금은 시끄럽게 들려오고 인식이 어머니는 대전에서 트럭 조수 일을 하는 큰아들이 사 온 석유곤로를 마루에 올려놓고 큰아들이 그리 몇 차례씩이나 가르쳐주고 간 사용법을 잊으셨는지 이리저리 살펴보시고 있었다.
그러다 석유곤로를 사용하려는데 당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듯 무척이나 애를 태우고 계셨다. 그 시절 모든 사람들이 무쇠 솥에 불을 때 밥을 짓고 사는 줄만 알았기에 석유곤로의 등장은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한두 집씩 석유곤로가 들어오자 축음기만큼은 아니었지만 동네 사람들이 새로운 문명의 이기(利器)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식이네 집에도 동네 사람들이 석유곤로 구경을 하려고 한번 씩은 다녀간 듯했다.

바람이 겨울 해 발걸음을 재촉하니 고샅길 끝머리 높다란 가죽나무 그림자가 초가지붕 머리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들녘 저 멀리 간이역엔 채운역사를 가볍게 벗어나 연무대로 가는 군용열차가 강경선 선로 위를 유연하게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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