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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72 조회 : 1,301




텃마당에서 목을 잔뜩 치켜들고 높다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 하늘처럼 푸르지 않아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맑은 편이었다. 그 하늘 아래 묵묵히 자릴 잡고 버텨선 산들이 저마다 도도한 자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계절은 혹독한 겨울 종반의 언저리에 턱을 걸치고 아금박스레 움켜쥔 추위를 쉽사리 놓으려 않았다. 매섭게 불어오는 산바람이 그리도 기승을 부려 몸에 배어 오는 한기가 만만치 않아 애써 기다려 보는 봄이 아직은 먼 듯했다.

싸리나무로 엮어 만든 울타리 밑엔 닭들이 쉬엄쉬엄 파 놓은 흙구덩이가 제법 깊숙하게 보였다. 닭들도 추위가 싫은 듯 서로 몸을 바짝 붙이고 지붕머리에 기웃거리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철로길 건너 아랫집에선 아침 나들이를 서두는지 ‘꽥꽥, 꽥꽥’ 오리들의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순덕이 어머니께서 끓여 놓은 따슨 물로 세수를 마치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아침 햇살이 눈도장을 찍으려 문지방을 넘는 방안에 놓인 밥상의 밥그릇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철모르는 순덕이가 잽싸게 기어와 밥상머리에 들붙으려했다.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책보자기에 책과 노트 그리고 따뜻한 온기가 펴지는 도시락을 챙겨 어깨에 둘러메고 사립문을 나섰다.
냇가엔 살얼음을 헤쳐 흐르는 물결이 낙수받잇돌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들렸다. 부는 바람 얼굴 시린 언덕에 올라 숨을 가누었다. 주위를 한차례쯤 살펴 본 후 마른 풀숲 한쪽으로 다가서 아랫바지 괴춤을 내리고 오줌을 누니 오줌 줄기가 둥그렇게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뿜어져 나왔다.
뜨거운 오줌이 다복하게 쌓인 나뭇잎에 떨어져 허옇게 피어오르는 김 속에 투두둑 소릴 냈다.

학교로 이어진 좁다란 냇둑 길 위엔 학교에 가는 고만고만한 동네 아이들의 모습이 귀염성스럽게 보였다. 들녘을 헤집어 몰아쳐 오는 바람에 얼굴이 시린지 몸을 엇비스듬히 돌려 자라처럼 목을 잔뜩 움츠린 채 종종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빨간 털 방울이 달린 모자를 깊숙하게 쓰고 조금 멀리서 내 앞으로 다가오는 작달막한 순아의 모습이 더없이 앙증스러웠다. 구 밖에 모습이 보이는 듯싶던 옥순이가 철로 건널목을 건너서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야, 상민아! 글쎄 어젯밤에 검정색 찝차를 타고 지서주임 석란이네 아버지하고 경찰서에서 나온 형사라는 사람이 동네 방앗간 사랑방으로 찾아와 병수네 아버지를 데리고 갔는디, 네 사람들 말로는 병수네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한테 선거에 대해 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어떻게 지서로 들어가서 병수네 아버지가 끌려갔다고 하더라. 그런디 밤이 지났는데도 아까까장 집에 안 왔다는디 참 걱정이 된다. 아무 일이 없어야 할 껀디. 참! 누가 그런 말을 지서에다가 일러 바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여. 그러니 한동네 살아도 누굴 믿고 뭔 말을 함부로 할 것이냐고.”

옥순이가 작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조금은 걱정스런 표정에 불만스럽게 말을 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 때에도 ‘못 살겠다 갈아보자.’ 라는 야당인 민주당 편에서 둥구나무 밑에 앉아 동네 사람들과 열을 올리시며 말씀하시던 힘찬 병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좋지 못한 소문을 전하는 순이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조용했던 마을이 그 일로 인해 술렁일 것 같았다. 어떤 연유로 시작이 되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이가 어려 그 진위여부를 가늠키 어려워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허나 분명한 것은 지각없는 어느 어른의 비겁한 말전주에 분명 또 한 차례의 큰 소요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더욱이 같은 향리 사람들끼리 스스럼없이 나눈 말이 신고 되어 병수 아버지가 끌려가셨다는 말에 어린 마음에도 무엇이라 형언키 어려운 복잡한 생각이 들어 씁쓰름하기만 했다.

민족의 염원인 해방이 되어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여 전 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으며
출발한 이승만 정부가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져 학정(虐政)으로 민심을 잃어가자 민초들은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제 4대 정부통령(正副統領) 선거(選擧)에서 강력한 라이벌인 야당 후보로 대통령에 ‘조병욱’ 박사가 나서고 부통령에 현 부통령인 ‘장면’ 박사가 나서게 되자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부는 전국 5대 도시는 물론 작은 시골 면 단위까지 야성이 강한 인사들에 대한 동향 파악을 위해 혈안이 되어 사찰을 강행했다. 선거철만 되면 시골 작은 마을에도 읍내 정보과에서 나온 사복형사들이 심심찮게 들락날락했다.

실로 그해 1960년 2월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불안한 정치 상황이 숱한 격랑을 겪게 되어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게 되는 한 해의 서막이 소리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 격동의 틈새에서 작디작은 마을 ‘들메’에서도 그런 부류의 일이 일어났으니 동네 인심은 자연스레 흉흉해졌다.
본디 심성이 착한지라 어렵고 불쌍한 것에 쉽게 기우는 감성을 가진 동네 어른들 모두는 잘잘못을 가름하기에 앞서 우선 병수네 아버지에게 동정심이 모아졌다. 그에 동반하여 지서에 누가 신고를 하였는가에 동네 사람들의 이목들이 온통 집중되고 있었다.
다들 속마음으로는 나름대로 어느 정도는 추측을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다보니 섣불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암튼 그 일로 인해 동네 분위기가 눈에 띄게 푹 가라앉았다.

한참 동안 그런 생각을 하느라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발걸음이 새터 나들목에 닿았다. 검푸른 측백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학교의 건물이 눈앞에 성큼 다가섰다.
매끄러운 교실 마룻바닥은 발끝을 엄청 시리게 했다. 교실 안에는 몇몇 아이들이 난롯가에 서 있고 석란이 책상 주변에는 여자 아이들이 모여 무슨 말인지 석란이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후에 같은 반 친구들이 하는 말로 알게 된 일이지만 석란이 아버지인 면지서주임이 일 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보직 인사에서 무슨 큰 공로를 어떻게 세웠는지는 몰라도 일 계급 진급이 되어 논산 훈련소가 있는 우리 면보다는 모든 면에서 행정 규모가 큰 구자곡면 지서에 지서장으로 발령이 나서 며칠 후 졸업식이 끝나면 자기네 집 식구들 모두 다 연무대로 이사를 가게 된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그곳 연무대로 이사를 간 기순이 누나 생각이 떠올랐고 동네 말썽꾸러기였던 개구쟁이 기남이 얼굴도 눈에 아롱거렸다.

학교 수업은 한 해 동안 되풀이해서 배워 온 암기 위주의 학습을 오전 동안 자습하는 모양으로 진행되었다. 교실 앞 책상에서는 담임선생님이 우리 반 모두의 중학교 입학원서를 쓰고 있었다. 부반장인 영선이는 입학원서 한쪽 윗머리에 증명사진 뒷면에 풀칠을 하여 조심스럽게 붙이고 있었다.
저마다 그런 선생님의 진지한 모습을 바라보며 숙연해져 가슴 설레는 만큼이나 교실 한가운데 난로는 벌겋게 달아올라 난로 위에 놓인 보리차 주전자 뚜껑이 들썩거렸다.

그런 가운데 우리 모두의 관심은 누가 어느 중학교에 응시를 하느냐 하는 것과 며칠 앞으로 다가온 졸업식에서 누가 우등상을 탈 것이며 누가 6년 개근상을 타게 될지에 온갖 관심이 모아졌다.

오전 수업 마지막 시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반장과 부반장 그리고 반에서 힘 꽤나 쓰는 성태를 시켜 교무실에 있는 풍금을 옮겨와 졸업식 노래를 연습하는데, 그중에 학교 선생님들과 후배들에게 답례로 부르는 노래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를 커다랗게 합창하는데 모두들 얼굴에 섭섭한 표정이 가득했고 내 마음도 착 가라앉았다.

학교 수업을 끝마치고 교문 밖을 나서는데 길 건너 ‘고향이발소’ 안에 낯이 익은 얼굴이 보여 자세히 바라보니 지서에 근무하는 오 순경 아저씨가 이발소 아저씨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셔 마음속으로는 새터마을에도 누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 조사를 나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봄에 종구와 크게 싸운 일로 지서에 갔었던 것이 내심 꺼림칙하여 얼른 고개를 돌려 피해 버렸다.

비석골 앞을 지나려니 초라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분묘들이 왠지 더욱 애잔스럽게 바라보였다. 수문 앞을 지나 동네 어귀 철로 건널목에 닿자 멀리 벼랑바위 앞에 병수 아버지가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별다른 일 없이 동네로 무사히 돌아오셔 무척이나 반가웠고 홀로 걸어오시는 모습이 다른 날보다는 유달리 쓸쓸해 보였다.

다른 일 같았으면 동네 사람들이 나서 읍내로 가서 함께 돌아올 것인데 사안이 미묘한 일이라서 선뜻 나서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다. 자기 보호 본능이 인정만큼은 강한 시골 사람들의 본성이 그러했는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던 동네 사람들이 멀리서 걸어오는 병수 아버지의 모습을 담 너머로 보고 있었다.
병수네 아버지께서 동네 앞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서야 늦부지런 떨듯 한 분 두 분 둥구나무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 면면에서 자기들에게 혹시나 불똥이 떨어질까 하고 몸들을 사리면서도 내면에 깊숙이 자릴 하고 있는 때 묻지 않은 정은 그래도 아직은 남아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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