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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74 조회 : 1,320




밤을 지켜낸 어둠살이 제 할일을 다했다는 듯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면 아침 해는 언제나 산마루터기에 홀로 서 있는 등 굽은 노송(老松)의 머리 위를 다소곳하게 내리 비췄다. 그리고 해는 탈춤놀이의 눈끔적이처럼 커다란 눈을 굴려 내 작은 집 앞마당을 기웃거렸다.
그때쯤이면 산속의 아침을 부르며 덩굴진 숲 사이 길을 트는 산새들이 추임새를 넣듯 옥구슬이 구르듯 해맑은 울음소리를 내어 생기를 가득 불어넣었다.

졸업식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으로 밤을 지새운 그런 마음 아는 듯 모처럼만에 겨울 날씨 답지 않게 하늘은 아주 맑아 햇살이 가득했다. 더불어 바람 또한 잦아드니 볼이 조금은 시려 와도 견딜 만하여 건조한 대기(大氣)는 쾌청(快晴)키만 했다.

빛바랜 볏짚 거적때기를 반쯤이나 둘둘 말아 걷어 올린 부엌에선 불땀 좋은 마른 장작의 관솔이 타는 짙은 송진 냄새가 구수한 토장국 냄새와 함께 문밖으로 흘러나와 아침밥이 거즘 다 된 듯싶었다.

밤새 졸업식에 대한 생각들로 잠을 설친 탓인지 입안이 껄끄러웠다. 뒤돌아서면 배가 고플 정도로 먹성이 좋았는데 사발에 담긴 밥을 반쯤이나 남겼다. 어머니께서는 반다지에서 그 중 아끼시는 단 한 벌뿐인 비단 옷을 꺼내 입으셨다. 그리고 애지중지 하시는 불란서에서 만들었다는 향이 좋은 코티 분(粉)까지 바르셔 한껏 멋을 부리셨다. 어머니와 함께 사립문을 나서 징검다리를 건너 언덕배기에 올랐다.

새살스레 짖어대는 참새들처럼 햇살 듬뿍 받으며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동네 아이들의 오붓한 모습들이 활처럼 굽어진 냇둑 길을 넉넉하게 채워 그도 보기 좋았다. 동네 어른들이 졸업식에 참석을 하시려는지 저만큼 앞서 가시고 마을 이장님과 종구네 아버지 그리고 종구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구정을 앞두고 대소쿠리와 복조리를 만들어 대목장을 톡톡히 보려고 단단히 벼르시는지 주현이 어머니의 모습은 끝내 보이질 않았다.

동네 어귀 거북바위 쪽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신 옥순이 어머니가 옥순이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흙빛 물결 따라 도도히 흐르는 금강 하굿둑으로 이어진 마을 앞 냇둑도 지난 육 년 세월의 흐름을 같이하여 묵은 정을 켜켜이 쌓았다.

봄바람이 불어와 들녘 보리밭 끝머리 파릇파릇 짙어지면 종달새가 울어대는 깔끔하면서 담백함이 배어나는 선율에 계절을 음미(吟味)하고 동구 밖 산수유 꽃 머리 자락에 아지랑이 일렁이면 물오른 버들가지 꺾어 피리를 불며 약동(躍動)하는 생동감을 배웠다.

그리고 뭉게구름 산마루에 두둥실 떠 다정스레 내려다보면 성급한 매미는 앞 다퉈 소리쳐 울어 그런 여름 한낮 무료해지면 납작한 돌멩이 하나쯤 주워 냇물 위에 물수제비를 뜨며 과묵한 기다림을 배웠다.

놋황색 물결 너울지는 가을 들녘에 한쪽 발로 서 있는 허수아비 바라보며 발자국 소리에 놀란 배부른 방아깨비 푸덕이면 뒤를 쫓아 포만 속에 감사함을 배웠다.

백설 가득한 청솔의 푸름에 마음 가다듬어 심호흡을 크게 하고 눈 쌓인 들녘 거침새 없이 양쪽으로 가르며 질주하는 기관차의 힘찬 모습에 줄기찬 진취성(進取性)도 배웠다.

새터마을 나들목 뒷산 머리에 올라서니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교실마다 난로 연통에서 뿜어 나오는 크고 작은 연기가 소옴소옴 피어오르고 있었다. 새터마을 달구지 길을 걸어 교문을 들어서며 무심코 앞가슴에 달린 네모난 헝겊 명찰을 바라보니 뭔가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허전했다.
눈앞에 다가서는 교실들 모습이 가던 걸음을 붙들어 잠시인들 숱한 생각에 젖어들었다. 검정 기와지붕 학교 사택 뒤뜰 머리에 우뚝 선 오동나무 마른 가지 위에 까치 두 마리 하얀 앞가슴 예쁘장스럽게 드러내 놓고 검은 꼬리 쉴 새 없이 흔들며 우리들을 축복해 주는 듯 울어댔다.

운동장에는 교무실에서 울려 나오는 안내 방송에 따라 졸업식이 거행될 임시 강당을 향해 걸어가시는 부모님들의 모습이 보였다. 강당으로 들어 선 학부형들이 졸업식장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마 후 교장선생님과 함께 앞가슴에 종이에 물감으로 물들여 만든 꽃을 달고 들어오시는 면장님과 지서장 그리고 의용소방대장과 채운역장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 지서장인 석란이 아버지가 유난스레 여러 사람들의 눈에 잘 띄었다. 금빛 테를 두른 모자와 앞자락에 주렁주렁 의미 모를 기장과 약장이 매달린 정복을 차려입은 옷차림새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몸 구석구석에서 퍼져 나오는 권위적인 느낌에 왠지 모를 거리감을 잔뜩 불러일으켰다. 오히려 그보다는 너절하게 꾸미지 않은 말쑥한 차림새의 정복을 입으신 채운역장님의 모습이 보다 더 나은 진솔함이 오롯한 느낌으로 부담 없이 와 닿았다.

엄숙한 강당의 분위기 속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있은 후 애국가를 부르고 교장선생님의 장황하여 지루한 감을 주는 훈시를 들은 다음 내빈 축사의 순서가 되었다. 면장님과 지서장님이 서로 얼굴을 번갈아 보시며 서로 하라고 미루는 듯싶다 면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셔 축사를 그리 길지는 않게 하셨다.
이어서 교감선생님의 학사보고가 있으신 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사회를 보시는 4학년 2반 담임이신 최선생님의 호명에 따라 육학년 전체를 대표하여 우리 반 반장인 강명식이가 졸업장을 수여 받았다.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수여하는 우등상장은 전체 여덟 명을 대표하여 우리 반 부반장 영선이가 대표로 받았는데 한 사람 한 사람씩 호명할 때마다 내심 마음속으로 기대를 하였던 서로의 희비가 엇갈리는 듯 강당 안이 조금씩 술렁거렸다. 석란이가 다섯 번째로 호명이 되자 너무도 기뻤는지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여 울고 있었다.

그 여덟 명 중 일곱 번째 호명이 끝나도록 기다렸던 내 이름은 부르질 않아 덜컹 내려앉았다. 마음에 서운함이 가득 차 오는데 맨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불러 혹시나 잘못 들었나 하고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 반 개구쟁이 응선이 얼굴을 바라보니 응선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어 ‘아,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얼른 고개를 돌려 뒷좌석 학부형 쪽에 앉아 계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지난 육년 세월 온갖 고생 다하셔 키워 오신 보람에 우시는지 얼굴에 손수건을 대고 계셔 바라보는 내 눈언저리에도 울먹임처럼 물기가 젖어들고 기쁨에 가득 서려오는 마음도 서로 교차되고 있었다.

그렇게 우등상이 수여된 후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나무막대로 잘 깍은 지휘봉을 흔드시어 졸업식 노래를 지휘하셨다. 후배 동생들이 선창을 하여 졸업식 노래가 강당으로 울려 퍼지자 착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어디서부터인지 여학생들의 울음소리가 작은 듯 들려오더니 사랑스런 동생들의 선창이 끝이 나고 우리들이 부르는 답례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하는 구절에 이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들 참았던 울음소리가 온 강당에 울려 퍼지자 모든 선생님들도 함께 눈시울을 붉히셨다.

선생님들은 우리들이 앉아 있는 좌석의 걸상 사이를 줄 따라 두루 도시며 우리들의 등을 두드려 주셔 울음을 달래 주셨다. 여학생들은 다독거려 주시는 담임선생님 손을 붙들고 울음을 터뜨려 소리가 멈출 줄 몰랐다.

그렇게 졸업식이 끝나 내빈으로 오신 면내 유지 분들과 학부형님들이 먼저 나가시는데 출입문 옆에 앉아 있던 종구네 아버지가 모든 사람들이 보라는 듯이 지서주임인 석란이 아버지에게 바짝 다가서 무척이나 다정한 사이처럼 아첨하는 모습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여름 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 우리 집에 쌀 빚을 받으러 와서 어머니를 다그쳐 그렇게 큰소리치던 그 도도함은 오간 곳 없어 조금은 비굴할 정도로 무기력해 보였다.

굽이치는 물결에 휩쓸려 굽이굽이 부딪쳐 물 따라 돌고 돌아 하구 둑 언저리 모래톱에 하나둘씩 쌓여 소리 없는 조우(遭遇)를 하는 모래알처럼 우리들 모두는 불변의 눈빛으로 다시 만날 그날을 언약하며 생의 여로에 이정표가 손짓하는 또 다른 방향을 따라 제가끔 흩어져 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담임선생님이 같은 학교인 모교에 동창이라서 오랜 세월 서로 익히 보아 온 터라 스스럼없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꼭 좋은 성적으로 합격해 달라는 고마운 말씀을 듣고 선생님에게 부탁을 하나 드렸다.
그래서 교실 게시판에 붙어 있던 영선이가 그린 우리 집 그림을 잘 떼어 졸업장과 우등상장 그리고 그림을 소중하게 말아 손에 거머쥐고 교문을 나섰다.

영선이 삼촌인 소사 아저씨가 운영하는 문방구 앞에 서 있던 영선이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꼭 강경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같이 합격하자고 약속을 하고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한낮 햇살 다스하게 비춰 얼음을 녹이는 냇가 위를 어머니와 옥순이 어머니 그리고 옥순이와 함께 걸었다. 육 년 전 처음 학교에 가는 입학식 날 앞가슴에 코를 닦는 손수건을 커다랗게 달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갔었던 기억이 떠올라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싶었는데 옆에 함께 걸어가시던 옥순이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야, 상민 에미야. 니 새끼 우등상 탔으닌께 너 그냥 입 싹 닦을 생각 말고 다음 장날에 중국집에서 한턱 크게 내야 헌다. 그래도 너는 고생한 보람이라도 있지만, 나는 훌륭한 우리 딸이 중학교 합격증이라도 보여 줄라나 모르것다. 죽은 지 애비를 닮아서 공부가 더딘가? 차라리 나를 닮았으면 좀 나을 건디.”

옥순이 어머니가 함께 걸어가던 옥순이를 넌지시 바라보자 어머니께서 옥순이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시고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야! 너두 별로 공부는 못했는디, 뭘 그러냐? 너도 겨우 중간쯤 밖에 못해 놓고 니가 누굴 탓하냐? 두고 봐라 우리 옥순이가 다들 보라는 듯이 꼭 합격 할 것인께.”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모다 귀여우신지 옥순이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주셨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들녘 둔덕 머리 한곳에 뿌릴 깊이 박아 억척스레 몸 붙여 사는 보랏빛 꽃망울의 엉겅퀴처럼 자연의 순리 따라 순응하며 큰 욕심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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