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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81 조회 : 1,459




아침 첫 버스가 앞산 산마루터기 누릅재를 끼고 돌아 들 주막 버스 정류장에 닿았다. 주막집 정류장엔 아금박스런 주인아주머니가 서둘러 가게의 덧문을 열고 있었다.
잣나무 가지에서 산까치가 부산스레 우짖어 고요한 산속의 정적을 깨뜨렸다. 달빛 별빛 모두 울어주던 내 아버지 영면(永眠)하신 곳 ‘물레치기’ 골짜기가 희미하게 바라보였다. 내 아버지에 대한 아픔에 흔적을 지우려 애를 써 봐도 온갖 번뇌가 온몸을 모질게 붙들었다. 그로 인해 다시금 마음이 서운해지면 언제나 변함없는 저 산은 포근하게 가슴 벌려 나를 감싸주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변화를 되풀이하려는 산은 무언 속에 몸 가눔하고 야금야금 다가서는 생동의 봄을 담담하게 맞이하려는 듯했다. 꺼뭇꺼뭇한 바위를 빙 둘러싸고 울창하게 들어선 백양나무 가지에 머지않아 물이 오르려는 듯 줄기와 가지가 희끗희끗하게 보였다.

바람이 한결 잦아지고 온 누리에 햇살이 고루 퍼졌다. 낮은 초가지붕 굴뚝과 마주 바라보이는 대추나무 가지 위엔 작은 멧새들이 청량한 울음소리로 싱그럽게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해 2월 한 달은 참으로 빠듯하고 분주하기만 했다. 방벽에 달라붙은 달력에 어머니가 표시를 해 놓은 알 듯 모를 듯 크고 작은 글씨가 그리도 빼곡하게 써져 지저분하다 못해 조금은 분잡스럽게 보였다.
다가올 3월 윗머리 7자의 숫자 위에 빨간색 몽당 색연필로 큼직하게 덧칠을 해 놓았다. 어머니께서 실로 가슴 벅찬 설렘으로 다가올 중학교 입학식을 기억하려고 표시해 놓은 듯했다.

쉴 틈 없는 세월의 흐름이 음력 섣달 하순의 문턱에 닿았다. 삼일 앞으로 다가온 설과 중반을 넘어선 정부통령(正副統領) 선거(選擧)의 열기가 작은 마을에도 온통 번져나고 있어 동네 어른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셨다.
남달리 키가 작으신 동근이 아버지와 함께 반곱슬머리에 딱 벌어진 두 어깨 목선이 거의 없어 고집스럽게 생긴 종구 아버지가 그리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시는지 발바닥에 불이 나게 집집마다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선거에 시큰둥한 모습을 하던 종구네 아버지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뒤늦게 유난스레 부산을 떠는 것 같았다.

그리고 평소 같으면 막걸리 배달을 하시는 아저씨가 닷새에 한번쯤 술통 하나를 짐받이에 매달고 동구 밖 나무다리를 건너섰다 그러나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신바람이 났는지 사흘이 멀다 하고 술통을 짐자전거 뒤에 매달고 동네로 들어섰다. 가뜩이나 술 좋아하시는 동네 몇몇 어른들은 한여름 가뭄에 비를 만난 물고기들처럼 하루하루가 그리도 즐거운 듯 보였다.
잊혀질 만하면 동네 사랑방에 한차례씩 나도는 선거철 공짜 술 때문에 집에 있는 술이 잘 안 팔리자 삼식이 어머니는 선거철이 그리 썩 달갑지 않으신 듯해 보였다.

그 시절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 선거 구호인 ‘못 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글이 인쇄된 선거 벽보가 담벼락에 붙어 있는 진식이네 집 돼지우리 옆에 동네 어른들 몇 분이 서 계셨다.
삼식이 아버지가 볼때기가 축 늘어진 검정 돼지 등을 살살 긁어주는 듯싶더니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엉덩짝을 냅다 손바닥으로 내려치시며 말씀하셨다.

“아, 그놈 참. 토실토실한 게 근수(斤數) 꽤 나가겄네 그려.”

느닷없이 한차례 얻어맞아 깜짝 놀란 돼지가 ‘꽤에엑 꽤엑’ 하고 소리를 지르며 한구석으로 죽어라 도망을 치고 있어 아마도 설 대목에 동네에서 쓸려고 미리 흥정을 하시는 듯했다.

그때 논산 읍내에 있는 민주당 연락 사무소에 가시려는지 병수 아버지 모습이 고샅길에 보였다. 자기네 집돼지가 잘 커서 무게가 많이 나가겠다는 삼식이 아버지 말에 고무(鼓舞)되신 진식이 아버지가 삼식이 아버지를 바라보시며 말씀을 하셨다.

“참, 열성이지 열성이여. 누가 억지로 시키면 저리들 할까 선거도 선거지만 그놈에 정치란 게 뭔지는 모르지만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달려들어 집안일처럼 거드니.”

말을 끝마치신 진식이 아버지가 옆에 놓인 구정물 통을 휘저어 뜨물 한 바가지를 떠서 구유에 부으셨고 그 옆에 계시던 옆집 상수 아버지가 말을 이으셨다.

“아! 왜 아니것는가? 으레 선거철만 되면 제일로 바쁜 게 주조장집 막걸리 술통하고 혹시나 떡고물이라도 안 떨어지나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니는 선거꾼들이지, 순해 터진 우리네사 뭘 몰라 그런다지만, 용꽃 마을 주조장집 영감이야 그 잘난 국회의원만 나타났다 허면, 죽은 지애비 살아 돌아온 것처럼 버선발로 뛰어나가 쌍수(雙手) 받들어 맞이하고 죽으나 사나 달라붙어 운동을 할 수 밖에 없으니, 솔직히 따지고 보면 그 놈에 자유당에 충성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다 자기들 살려고 하는 짓거리지 뭐.”

뭔가? 못마땅하신 듯 망을 마친 상수 아버지가 두엄자리에 대고 애꿎게 팽하고 코를 푸신 후 돼지우리 추녀 볏짚에 대고 손끝을 쓱쓱 문대셨다. 그러자 기성이 형이 동네를 떠난 뒤로 삼식이 아버지와 더 가깝게 지내시는 경수 아저씨가 옆에서 거들고 나섰다.

“오늘 아침참에 동근이 아버지하고 동섭이 형님이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하는 말이 ‘설 쇠고 한 사날 지난 후 학교 운동장에서 그 뭐시냐 자유당 국회의원들이 와서 선거 연설을 한다.’고 하며, 자기들 체면도 있으닌게 좀 나와 달라고 부탁을 해서 간다 못 간다 선뜻 대답은 못했는디, 차라리 안 들었으면 몰라도 가야 하는 건지 말어야 하는 건지 참 그렀네유.”

경수 아저씨가 말을 마치고 옆에 계신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시는 듯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동네에서 약방의 감초 같은 발동기 돌리시는 순태 아저씨가 촐싹대며 말씀을 하셨다.

“내 생각엔 뭐 한번 가 보는 것도 손해날 건 없을 것 같은디, 들리는 말로는 겉주머니에 일원짜리 하나 안 넣고 가도 그날은 주최측에서 다 알아서 술대접한다고 하던디.”

순태 아저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현이 아버지께서 씁쓰레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참! 그놈의 공짜 공짜 어지간히 좋아들 허지. 그게 다 어디서 나오는 돈인 줄도 모르고 그저 주닌께 덥석 받아먹고 또 더 안 주나 하고 기다리고 아무튼 한심한 일이여. 나는 술도 그리 썩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 어설픈 돼지고기 한두 점 둥둥 떠다니는 국물하고 막걸리 몇 잔에 줏대 없이 자기 신조를 팔고 사는 사람들 보면 통 이해가 안 가니, 내 원 참.”

그러자 순태 아저씨가 자기 말끝에 우현이 아버지가 그리 핀잔스레 말을 하시자 기분이 좀 언짢은 표정으로 우현이 아버지를 쓱 한번 바라보시고, 삼식이 아버지와 경수 아저씨에게 다시 말을 건네셨다.

“어이, 일이 대충 끝난 거 같은디 다들 안 갈란가? 나는 내일부터 가래떡 빼는 기계 돌릴려면 미리 손 좀 봐 놔야 할 것 같아 먼저 갈라네.”

순태 아저씨가 사립짝 밖으로 나서자 삼식이 아버지와 경수 아저씨도 함께 나서 고샅길로 걸어가셨다.

동네가 작아 그런지 읍내 중학교에 합격했다는 소문이 빨리 퍼져 고샅길을 걸어가는데 마주치는 동네 어른들마다 마치 자기네 집에 기쁜 일이 생긴 것처럼 함께 축하를 해 주셨다. 이장님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등을 두드려 주셔 한없이 고맙기만 했다.

종구네 집 대문 앞에 닿자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마당에 있던 종구와 서로 눈이 마주쳐 내가 먼저 웃으며 말을 붙이려 하자,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외면하듯 얼굴을 돌려 외양간 쪽으로 걸어가 웃고 있던 내 모습이 무척이나 무안했다.

방앗간 앞에 이르자 민균이네 집에 다녀오시는지 동근이 아버지와 종구 아버지가 앞에서 걸어오셔 머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니 동근이 아버지가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시며 말씀을 하셨다.

“음, 그려. 내가 아침나절에 니네 엄니한테 얘기는 들었는디, 뭐시냐 중학교 합격한 것 증말로 축하한다. 아무쪼록 더 열심히 공부해서 큰사람이 되어야 헌다.”

그런데 옆에 계시던 종구 아버지는 이렇다 저렇다 하시는 말씀 한마디도 없이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시어 연자방앗간 쪽만 바라보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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