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연(燦然)한 모습으로 온 누리에 다사롭게 비치는 햇살의 역동(力動)이,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을 녹여 풀뿌리에서 푸르스름한 새순이 다시금 돋아나게 했다. 그렇듯이 갈구(渴求)했던 봄은 강인한 부활로 다가오고 있었다. 깃털 같은 가벼움으로 잊혀져버린 것들을 한번쯤 투명하게 되뇌어, 내면(內面)에 산재(散在)한 기억들을 다시금 떠올려보고 싶어졌다. 그런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금 찾아오는 봄을 맞이하려 했다.
등피가 삭아 목심(木心)이 동그랗게 빠져나간 마른 등걸에서도, 기적처럼 고귀한 생명의 새순이 움을 터 태어남을 거듭하고 있었다. 한줌 바람에 흩날리는 홀씨 하나에도 떠나가고 찾아옴이 너무도 뚜렷하여, 무량(無量)한 계절의 변화 속에 나 또한 함께 숨을 내쉬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한적(閑寂)하면서도 조금은 적적(寂寂)하고 여유로운 듯싶으면서도 뭔가 모자란 듯한 산골짝에, 그런 부족함을 달래주는 듯 수려(秀麗)한 풍광이 산자락에 수놓아지고 있었다. 그런 산이 늘 내 곁에 함께 머물고 있어, 경건하게 맞이하는 오늘의 굴레 속에 내 모습이 오롯하게 새겨지는 것 같았다. 지나간 어제도 지금 내가 맞이하고 있는 현재처럼, 시간의 길 위에 그런 모습들이 고스란히 새겨져질 것이다. 그리고 삶의 공간 속에서 남기려는 발자취가 아직은 미력하여, 채우지도 못하는 작은 소망만큼이나 아쉬움이 가득하기만 했다.
자연 속 생체(生體)들은 저마다 정연하게 자리 지킴을 하고 있는데, 가볍게 흔들리는 것은 메마른 삶에 조갈(燥渴)난 사람들뿐인 것 같았다. 무릇 소유의 욕망을 버리지 못한 치졸한 군상들의 뜨거운 숨소리에서 배어나는, 탐욕에 역한 냄새가 이 작은 산골짝엔 묻어오지 말기를 바랄 뿐이었다.
‘딱딱딱딱’ 소리가 부엌문 밖으로 자그맣게 들려왔다. 부엌에서 순덕이 어머니가 매일매일 싸주시는 내 도시락 반찬에 한 가지라도 더 넣어 주시려, 도마 위에 잘 숙성된 무 한 덩이 올려놓고 채로 썰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양념을 고루 넣어 무치시는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부엌문에 걸쳐 있는 거적때기 틈 사이로 풍겨 나와 마음속으로 고맙기만 했다.
문득 마당가 땅속에 묻혀 있는 김칫독을 바라보려니, 지난겨울 밤새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려 장독대에 쌓였을 때 그 모습이 떠올랐다. 식구들의 말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칭얼대는 순덕이를 등에 업으시고, 우는 아기를 달래시려 발로 땅 가볍게 구르시며 부엌일을 하시는 수더분한 아주머니와, 우리 순덕이의 앞날에도 구김 없는 삶이 이어지길 바라며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 보았다.
짐을 가득 싣고 지나가는 화물자동차가 남기는 부연 흙먼지가 치솟아 오르는 주막집엔, 이른 아침부터 읍내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어 그라도 고적함을 덜하게 했다. 버스정류장 주막집을 실살스럽게 빙 둘러싸고 있는 검츠레(거무스레)한 탱자나무 울타리는, ‘어서 오라’ 나를 향해 마른 손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추녀 밑 안쪽으로 바짝 매달아 놓은 볏짚 둥우리에는, 며칠 전부터 알을 품기 시작하여 좀처럼 마당에 내려오지 않는 누런 암탉이, 대추나무 가지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여 촐랑거리며 요란스레 지저귀는 참새들 소리가 거슬리는지, 목털을 가볍게 세우고 쉴 새 없이 ‘꼭꼭꼭꼭, 꼭꼭꼭꼭’ 소릴 내고 있었다. 사립짝에 나와 있는 등에 업힌 순덕이의 작은 손을 꼭 붙들어 주고 밭둑길에 올라서니, 언덕 아래로 옥순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엊그제 그 일이 있고 나서 서먹하기도 하여 능청스럽게 손을 흔들어 주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쑥스러운 마음에 나를 바라보라는 의미로, 격에 어울리지도 않게 ‘야호’ 하면서 손을 다시 흔들었는데도, 한번 슬쩍 바라보는 듯싶더니 이내 냉정하게 얼굴을 돌려 버렸다. 아마도 아직까지 화가 덜 풀린 듯해 보였다.
언덕배기 너머 산골짝에서 부터 흘러내려 오는 도랑을 건너는데, 흘러가는 물이 크고 작은 돌에 부딪는 소리가 귓가에 낭랑하게 들려왔다. 맑은 물 밑에 고스란히 형체를 드러낸 조약돌의 각기 다른 색깔이 유난스레 고와 보여, 한번쯤 손을 담가 만져 보고 싶었다. 더불어 이슬 듬뿍 젖은 잔솔나무가 아침 햇살에 탐실하게 번득거려, 바라보는 마음과 정신이 한결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귀염둥이 내 친구 옥순이의 뾰로통해진 마음을 달래주려고 빠른 걸음으로, 벼랑바위 앞에 훨씬 먼저 닿아 옥순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옥순이가 아는 척도 않고 그냥 스쳐 지나려하여 앞을 가로막았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는데도 받아주질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말 한마디 걸어보지도 못하고 뒤를 따라 걸어가면서, 동네 어귀 쪽을 슬쩍 돌아다보았다. 방죽가 앞에 내 또래 종구가 논산 농업고등학교에 신입생으로 들어간 종기 형과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말없이 걸어가려니, 마음속으로 내가 좀 심한 말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왜? ‘방귀소리’를 실없이 꺼내서 일을 크게 만들었나 하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후회스러우면서도 또 한 차례 나도 몰래 웃음이 터져 나와 꾹 참느라 애를 먹었다.
건널목에 막 올라서려는데 앞서 걸어가던 옥순이가 뒤에서 시무룩하게 따라오는 내가 마음에 걸렸던지 갑자기 뒤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너 나한테 정말로 잘못했지? 하고많은 말 중에 하필이면 그 방귀소리를 왜 꺼냈니? 너는 그렇게 무심코 그런 말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말 듣는 나는 참말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더라. 그러닌께 이담부터는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마, 알았지?”
말을 끝낸 옥순이도 ‘방귀소리’에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려 하는 모습이 역력(歷歷)했다. 검정 교복 하얀 칼라 목덜미의 연한 속살에 햇살이 비춰, 희미하게 보이는 파르스름한 실핏줄이 애잔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이며 함께 건널목을 건넜다.
면소재지 약방 앞에 약방 주인아저씨가, 화산리 동네 어른들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서 가만히 들어보았다.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가 당선이 되었고, 부통령도 같은 자유당인 이기붕씨가 당선이 되었다고 했다.
바로 앞집 염씨네 점방 앞에는, 며칠 전 정류장에서 경례를 안했다고 트집을 잡던 3학년 차중식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손을 올려 경례를 하니, 씩하고 한번쯤 쳐다보는 척하더니 몹시도 거들먹대며 걸어갔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속마음으로 ‘참! 더러워서 못살겠네, 얼른 3학년이 되던지 해야지.’하고 생각을 했다
콜타르칠이 거무튀튀하게 보이는 지서 건물 울타리에, 개나리가 가지마다 눈망울을 몽글몽글하게 매달아 눈인사를 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언제부터 인지 울음을 멈춘 지서의 사이렌 나무 망루가, 비바람에 흉물스럽게 색이 변한 모습으로 한쪽에 멍청스레 버텨 서 있었다.
언제나 시골 아침 첫차와 저녁 막차는 늘 붐벼 차 안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가뜩이나 덜컹거리는 차의 요동으로 이리저리 부딪치는 일로, 승객들끼리 작은 시비가 일기도 했다. 그러나 무뚝뚝한 조수 아저씨는 알고도 모르는 척 시침을 딱 떼고, 옹골차게 차비만 거둬들이려 했다. 그런 우왕좌왕함 속에 버스는 한없이 덜컹거리며 그럭저럭 달려가나 싶더니, 버스가 장화리 앞 다리를 넘어 내리막길로 내려서는데, 나이가 좀 지긋해 보이시는 아주머니 한 분이, 차 바닥에 덥석 주저앉아 반쯤 울먹이는 모습으로 소릴 치셨다.
“아이고! 이를 어쩌면 좋을까? 내 달걀 다 깨져 버렸네, 다 깨져 버렸어. 아따 운전수 양반 제발 차 좀 살살 몰고 가시유. 달걀은 이미 다 깨져서 물이 질질 흘러버리닌께. 달걀 값일랑은 운전사 양반이 물어내면 되는 거고. 배창자가 뒤틀리게 아파서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으닌께 제발 사람 살릴라면 쪼메만 살살 달려가시유. 어디 난리라도 터져 버린 것처럼 사람 죽는 줄두 모르구 그리 쎄게 몰아대나 모르겄네.”
아주머니가 말을 마치시자 비좁아 터진 차 안에 저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웃음소리가 구석구석에서 들려왔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좌우 양쪽 금강 둑길엔, 학교에 가려고 자전거를 몰고 가는 모습이 기다랗게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희뿌연 논 자락엔, 조금 전 하늘로 날아온 새 떼 한 무리가 조급하게 내려앉아 저마다 먹이를 찾으려, ‘푸덕푸덕’ 날갯짓을 하여 평온한 농촌의 한 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읍내 황산동 정류장에 내려 사거리 쪽으로 가는데, 정류장 앞마당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약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낯선 어른 한 분이, 자신은 민주당에 당원이라고 밝히면서 주먹을 불끈 쥐시고 큰소리로 말씀을 하고 계셨다. 그때 맞은편 역전 쪽 지서에서 자전거를 급히 타고 온 순경 두 사람이, 열변을 토하시던 어른을 향해 뭐라고 험한 말을 하며, 손으로 멱살을 잡아끌고 가려 했다. 그러자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완강하게 버텨, 옆에 서 있던 순경 한 사람이 손을 비틀어 억지로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타고 온 자전거도 그 자리에 버려둔 채 순경 두 사람이, 양쪽에서 팔을 끼고 끌고 가려 하자모여 있던 사람들로 부터 야유(揶揄)가 터져 나왔다.
“그 사람이 어디 그짓말허는 것두 아니구 오장육부 시원하게 다 바른 말만 허는디, 뭣땀시 사람을 복날 개처럼 강제로 끌고 가나 모르것네 그려.”
그러자 다소는 멀쑥해진 순경이 사람들을 강제로 해산 시키려는지 경적을 세게 불어댔다. 무슨 이유로 저리도 험하게 끌려가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래서 앞에서 걸어가시던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경상도 마산이라는 곳에서 정부통령(正副統領) 선거(選擧)가 끝나자, 온갖 부정으로 치러진 선거의 규탄과 당선무효를 선언하는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쏟아져 나와 거리를 가득 메워 시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경상도 마산이라는 곳엔 단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었다. 그런 탓에 그저 국민학교 사회시간에 한두 번쯤 배운 듯 기억이 날 정도의 아주 낯선 곳이었다. 그러니 얼마만큼 먼 거리의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또한 없었다. 한 가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집권자의 실정으로 극도로 피폐해진 민심과, 크고 작은 권력에 억눌려 살았던 민초들의 울분에 가득 찬 절규의 함성이, 이제서야 일파만파(一波萬波)로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