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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93 조회 : 1,455




언제나 알찬 보람은 과묵한 기다림 속에 줄찬 인내를 동반한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성과가 가름되는 것 같았다.

대자연은 결코 서툰 감성(感性)에 가볍게 설레질 않았다. 냉철한 이치로 모든 사물들을 두루 관장(管掌)하여 순리에 따라 변화시키니 그 숭고함에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차분하게 기다린 미덕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 연초록빛 상큼한 봄은 겨우내 쌓였던 외로움을 하나둘씩 풀고 있었다.

능선 너머 훈훈한 바람이 텃마당에 불어왔다. 빨랫줄에 나붓거리는 옷가지에서 내 어머니의 모정이 듬뿍 담긴 냄새가 코끝으로 풋풋하게 배어났다.

끈적끈적 묻어나는 진흙탕 길 위에 끽끽대며 힘들게 굴러가는 소달구지처럼 지난날 내 앞에 놓였던 삶은 실로 힘든 여정이었다. 그리 힘겹게 보낸 유년기 속에서 유난스레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그것은 들녁으로 논일을 하러 나서는 내 어머니의 뒤를 따라 가파른 고갯길을 쉬어 넘던 일이었다. 기적소리가 숨차게 들려오는 논두렁 한 귀퉁이 오붓한 자리에 앉아 채랑채랑하게 들려오는 뜸부기 소리를 벗 삼아 개구리 뒷다리를 잡고 놀았다.
그러다 문득 어린 두 눈망울에 비친 하늘은 구름이 해를 삼키지 않아 금시라도 햇살이 쏟아져 내릴 듯 눈이 부셨다. 또한 논에서 허리 굽혀 김을 매시던 어머니가 아픈 허리를 펴시려고 진흙 묻은 발로 논 밖으로 나오시다 무심코 바라 본 하늘 또한 헐벗고 굶주린 가난만큼이나 탱글탱글하게 빛이 났었다.
숱한 나날 동안 언제나 커다란 외로움이 사무쳤어도 나를 시험치 않으려는 그런 나에 하늘이 있었기에 난 외롭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못다 지운 외로움이 스멀스멀 찾아들면 버릇처럼 올려다 본 저 높은 하늘은 더없이 파랗기만 했다.
해가 저물어 밤이 찾아들면 내 외로움이 더할까봐 사르락 별빛이 곱살하게 내렸다. 그러면 심술궂은 구름이 훠이 손 저어 그리 고운 밤하늘을 지우려했다. 그렇듯 내 삶은 밝고 어두움이 수없이 교차되는 수난의 반복이었다.

온 산이 불그레하게 노을 속에 물들어 가는 늦저녁에 젓갈동이 머리에 인 내 어머니 서둘러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던 성황당 고갯마루에서 바라 본 넓디넓은 그 하늘처럼 질곡의 삶은 끝조차 가늠할 수 없는 머나먼 여정의 시작이었다. 등 언저리에 소금기 가득 밴 채 지치신 몸으로 한 발 두 발 내딛는 힘겨운 어머니의 발걸음이 내 앞에 가까이 다가올수록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검게 물든 밤하늘의 적막 속에 그저 다가 올 내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만 내 아버지를 앗아간 저 하늘을 바라보며 찢어지도록 가슴 아파 애를 태워 살아온 나는 단 한 점 혈육인 내 어머니와 함께 서로 손을 꼭 잡고 바라볼 수 있는 그런 하늘이라도 있어 난 아파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껍질도 벗지 못한 채 고스란히 나뒹구는 본능적 욕심이 마음속에 이글거리면 냉철한 이성은 찰나(刹那)의 자성에 머물러 더 기다릴 줄 알고 배우려 노력하는 고통을 다시금 주었다. 또한 하나둘씩 의미 깊은 사고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함을 내 작은 육신에 부여하려 했다.

모든 사물들의 동작이 멈춘 듯 고요한 산골의 생태가 싫증났는지 아니면 그 어느 곳쯤에 마음 편히 머물 수 있는 따스한 보금자리가 있음을 알고 있는지 가냘픈 울음소리로 묵직한 정적을 가볍게 깨고 빛깔 고운 산새 한 마리가 다랭이 화전밭 둔덕 위로 세차게 난다.

둔덕 바위 가장자리앤 생강나무 잎겨드랑이에서 완연하게 피어난 노란 꽃들이 봄을 실감케 하고 지긋하게 묻어나는 매콤한 냄새가 정겹기만 했다. 그 뒤를 따라 노란 개나리와 산 매화도 이내 곱살하게 꽃망울을 터트렸다.
초랑초랑 맑은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개울가에 기지개를 한껏 켜고 있던 버들강아지도 새록새록 움을 트기 시작하여 듬성듬성 희부옇게 보였다. 저도 신이 나는지 어느 틈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논병아리 몇 마리가 흐르는 개울물에 드문드문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오랜 죽마고우라면 무슨 말인들 스스럼없이 할 수 있건만 그래도 중학생이 되고 나니 점차 나를 대하는 옥순이의 태도가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 알게 모르게 거리감을 불러일으켰다. 우정의 본질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제법 어른다운 행동을 하려고 해 이제는 마냥 철없던 아이 티를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하던 지긋지긋하던 교련이 어느 날부터 한 시간이 더 늘어났다. 교련 선생님은 봄날 병아리를 노리는 솔개의 날카로운 눈처럼 더욱 호되게 닦달했다.

그리고 심심할 만하면 한 번씩 불쑥 찾아오는 전국을 순회하는 반공 연사들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예정되어 있던 학과 수업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진흙가루 푸석이는 운동장에 전교생이 의무적으로 모여야만 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그렇고 그런 밋밋한 내용의 강연을 마치 잘 알고 있는 유행가 가사를 되풀이하여 틀어주는 전파사의 노랫소리처럼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도 못한 채 그저 의무적으로 따라 박수를 치며 들어야만했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아마도 전국적으로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학생들의 동향에 크게 위축된 문교부 당국에서 확고(確固)한 국가관의 확립과 반공 사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킨다는 명분으로 그리 교육을 주입식으로 억척스레 시켰던 것 같았다. 어쩌다 읍내 공설 운동장에서 반공 귈기대회(蹶起大會)라도 있는 날에는 읍내 각급 기관은 물론 중고교 학생들이 양쪽의 긴 나무 막대기에 큼지막한 빨간 글씨로 써 놓은 기다란 천을 꽉 붙들어 맨 플래카드(Placard)를 펼쳐 앞에 세우고 행진을 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불어대는 악대의 행진곡에 맞춰 출정을 하는 군사들처럼 오와 열을 맞춰 온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실로 수많은 군중들이 꽉 들어차 그리 커다랗게 보이던 운동장이 그날따라 한없이 좁게만 보였고 구호를 외치면 우레와 같은 함성에 운동장이 떠내려갈 듯했다.

그리고 실과 시간에는 농작물을 재배하는 기술의 학습을 하여야 하는데 심심하면 각자 집에서 삽을 가져오라고 하여 가마니 밑 부분에 구멍을 뚫어 플라타너스 나무를 자른 기둥을 끼워 만든 들것에 교문 앞 연못 공사 때 파 올려 보기 싫게 쌓여 있는 진흙을 치우게 하여 속으로는 불만이 참 많았다.

앞 들녘 논 세마지기를 팔고 어머니가 눈비를 헤쳐 가며 이집 저집 문전을 돌고 돌아 뼈아프게 벌어 모으신 고귀한 돈으로 어렵게 입학한 중학교인데, 차라리 그런 시간에 공부라도 더 했으면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지긋지긋한 교련과 힘에 부쳐 오는 교내 작업에 줄 맨 강아지처럼 깊은 의미도 모른 채 선생님들 뒤꽁무니를 따라 제식훈련을 하라면 했고, 고된 작업을 하라면 꼼짝없이 해야만 했던, 그리 답답하기만 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고 뭔 놈에 행사는 그리도 빈번했는지 윗분들에게 잘 보이려 행사를 주관하는 각급 기관에서 숫자를 채우려는 청중 동원에 계획된 수업을 멈추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싫던 좋던 위에서 지시하는 대로 졸졸 따라다녀야 하는 지극히 권위주의적이었던 그 시절, 학교 생활상에 대한 회의감(懷疑感)이 주는 허탈함이 조금씩 불만으로 쌓여 마음속으로 서서히 번져오기 시작했다.

지난 국민학교 시절처럼 도시락 반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중학교 역시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집단이다 보니 빈부의 차이는 도시락 반찬 하나에서도 그 좁은 교실 안에 확연하게 드러났다. 내 옆자리 우측에 앉아 있는 급우인 키가 유난스레 작은 재천이가 값이 엄청스레 비싼 신사복 정장을 손수 손으로 꿰매 만든다는 양복점을 하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그런지 우리들은 겨우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명절 끝에 맛볼까 하는 쇠고기 장조림과 연근 뿌리를 물엿에 넣어 조림한 반찬을 거의 매일 싸 왔다.

그리고 좌측에는 몸이 좀 말라 야윈 듯 왜소(矮小)한 체구(體軀)와 얼굴에 주근깨가 그리도 많이 나서 훗날 우리 반에서 ‘꽤곰보’라는 별명이 붙어진 성구가 앉아 있었다. 성구 아버지가 서대전 역에서 역무원으로 십여 년을 근무하시다가 어느 해 여름날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던 날 밤, 역 구내에서 차량을 붙였다 떼는 작업을 하시던 중 손에 들었던 등불이 바람에 꺼져 시야가 흐려 선로로 들어오는 다른 열차를 미처 발견하지 못해 불운하게 한쪽 다리를 잃으셨다. 그 불상사로 약 2년 동안을 병원 생활을 마치시고 교통부에 오랜 근무 실적과 유공이 인정되어 겨우 얻은 밥자리인 철도 건널목 간수(看守)로 허름한 단칸방의 철도관사에서 누나와 함께 세 식구가 기거를 하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집안 형편이 나처럼 넉넉하지 못한 탓인 듯 노란색 단무지를 그리도 많이 싸 왔다. 그래도 나는 김장 때 소금을 가득 넣어 절인 짜디 짠 무 보다는 난생 처음으로 먹어 보는 노란색 단무지가 싫지는 않았다.
우연스럽게도 우리 두 사람 비록 유형은 다를지라도 모두가 아버지에 대한 아픔이 공존했던 탓에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성구의 성격이 무난했던 탓도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쉬는 시간에도 많은 대화를 나눠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정이 쌓여 갔다.

그리고 시간이 좀 흐른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급우들 중 일부에게는 한국전쟁의 화마가 할퀴고 간 상처의 잔흔이 아물지도 못한 채 커다란 덩어리로 남아 있었다. 금강 나루터를 건너 통학을 하는 세도면에 사는 몇몇 급우들이 나처럼 전쟁으로 아버지를 어이없이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그래서 해마다 늦여름 어느 날엔 같은 날 한꺼번에 제사가 있어 교실 안에 듬성듬성 자리가 비어 쓸쓸해 보였다. 그렇게 빈 좌석만큼이나 치유되지도 못한 소리 없는 아픔들이 늘 우리 곁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 세도면은 전쟁 발발 초기 강제로 점령한 인민군들의 극악무도(極惡無道)한 만행이 다른 지역보다 극심하여 전쟁의 상처가 두드러지게 깊었다. 그 틈새를 파고든 골 깊었던 감정들이 여과 없이 한꺼번에 표출되어 서로 간에 이념(理念)의 이(理) 자도 모른 채 서로 등을 돌려 반목(反目)하여 죽이고 또 반전이 되면 그 아픔의 근원을 되찾아 앙갚음을 처절하게 반복했던 것 같았다.

그런 아픔이 나와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몇몇 사람에 국한되어 그렇게 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평소에 가졌던 어리석은 생각을 일찌감치 접게 했다.

불운한 그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들 모두는 가슴이 메어 터지도록 절절히 묻어나는 원망 속에 세월이 잔인하게 남긴 아픔만을 어린 가슴에 버겁게 아듬고 죄 없는 하늘만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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