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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9 조회 : 1,858




"자고로 사람에 탈을 쓰고 태어났으면, 지 한티 은혜를 베푸러 준 사람 한테는 되지는 (죽는)한이 있어두 그 은혜를 갚아야 혀.
설사 무신 일이 있다 손 치드라도 죽기 전까장은 그 은혜를 꼭 갚을 줄 알아야 혀, 그게 바로 인간이 사는 옳바른 뱁(법)이여"

이는 내 어머니께서 철없는 어린 나에게 누누히 들려주셨던 말씀이였다.

세월이 지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의 내 어머니의 말씀이 참으로 마음에 와닿는다.

사실 남들 보기엔 내 어머니의 모습이 초라하기 이를데 없었다.
닳고 닳은 흰 광목저고리에 검정색 몸베 바지를 걸쳐 입은 남루한 옷차림새의 초라한 촌 아낙네였다. 간고한 삶에 어린자식을 키우려 젖갈동이를 머리에 이고 해가 저물때까지 이 마을 저 마을 이집저집을 빼놓치 않고 찾아다니셨다.
"새비젓(새우젓)이나 어리굴젓 사려" 소릴 지르며 행상을 하는 보잘 것 없는 새우젓장사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만큼은 하늘 아래 땅 위에 단 한분이신 소중한 어머니였다.

단 하나뿐인 자식을 대함에 있어 때론 퍽이나 어렵기만한 어머니였다.
그때는 어머니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그저 순응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 강하게 피력하시는 깊은 뜻을 다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또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극악한 놈들의 불의에 항거하여 자유를 지키려다 희생 당하신 내 아버지에 대한 일이였다. 억울하게 참변을 당한 내 아버지의 시신을 걷우려할 적에 있었던 일이였다. 그토록 서슬퍼런 놈들의 감시를 피할 수 없는 입장이였다.
그래도 버릴 수도 없고 또한 버려서는 않될 풋풋한 정을 지키고져, 그토록 극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온갖 노력을 기우려 주신 마을에 사시는 세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토록 뼈 속 깊히 새기고 살면서 그 은혜에 보답을 기필코 하라는 뜻으로 알았다.

전쟁은 풋풋햇던 마을 인심마져도 흉흉하다 못해 냉랭하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 저마다 내 가족과 나자신을 지키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전쟁은 인간의 본성마져 빼앗고 말았다.
놈들에 눈치를 살피느라 눈만 뜨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자분자분 정을 나누며 살았던 그런 진실함 마져 여지없이 망각되고 말았다.
한 마을 울타리 안에 사는 이웃인지라 평소에는 도란도란 그리 자분하게 지냈었다.
그러나 놈들의 눈이 무섭고 그로 인한 보복이 두려워 분명 보고도 못 본척 듣고도 못 들은 척 하여 양심을 져버리며 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삭막하기 이를데 없던 암울힌 시절이었다.

물론 그 때의 시대적 상황이 참혹하기 이를데 없는 전쟁 중인지라, 아니 공산 괴뢰도당들에게 삶의 터는 물론 인간으로써 갖을 수 있는 자유와 누릴 수 있는 기본 권리마져 총칼 앞에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터였다.
그렇다 보니 하루하루를 놈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숨 막히게 살아야 할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리 세월이 흘러 되집어 보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허나 그리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신 내 아버지의 장례를 치룸에 있어 참으로 처참한 상황이였다.
천륜을 저버려 인간이기를 이미 포기한 급수만도 못한 극악무도한 놈들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놈들에게 반동분자로 내몰린 내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본디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허나 반동분자의 죽음에 함께 애도하며 그 시신을 거두워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한 결과가 초래됨을 모를리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놈들의 철두철미한 감시와 시선을 피해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친 혈육처럼 헌신적인 열과 성의를 다해주신 두서너 분들이었다.
그런 터이라 늘 은공을 잊지말고 기억하면서 살아나가는 동안 그 은혜를 꼭 갚아야 된다는 뜻으로 받아드렸다.
내 나이 비록 어릴지라도 나의 뇌뢰 속에 깊히 아니! 단 한치의 흔들림 없이 기억하라는 뜻을 심어주기 위해 시간이 날 적마다 누누히 강조하셨던 것 같다.

당시의 상황이 그랬었다.
철저한 공산주의 사상에 이미 뼈 속 깊히 물들어 광기를 부리는 골수분자인 놈들이사 어쩔 수 없었다.
그보다는 그 휘하에서 온갖 추한 짓을 자행한 인간들의 형태는 참으로 극에 달했었다.
그런 비인간적인 그들은 양심 한조각마져도 저버린체 꼭두각시 노릇을 자처했다. 그런 몰상식하면서 몰인정 했던 그서슬 퍼런 놈들에 눈을 피하기란 실로 어렵고도 힘든 일이였다.
만에 하나 내 아버지를 극한 반동자로 몰아 세운 그들이인지라 반동의 가족을 돕거나 더욱이 반동분자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뤄주는 일은 도저히 용납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 큰 은혜를 죽은 내아버지는 물론 남은 우리 가족들에게 까지 고루 베풀어 주신 세분에 계셨다.
그 중에 도드라지게 돋보이는 분이 계셔 오랫토록 기억에 남아 있기에 그 어르신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동안일지라도 열거하고져 한다.

그 언제부터인지 마을에서 좀 외떨어진 철로변 옆에 있는 기현이네 집을 외딴집이라고 불렀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고 든다면 그 철로변에 또 하나의 허름한 초가 집이 한채 더 있었다.
그 집에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살다 전쟁 터에 강제 동원 되어 왔다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 거제용소에서 반공포로로 석방이 된 젊은 남정네가 정착을 하여 남에 집 일이나 거들어 주면서 홀로 살았었다.

그 젊은 분을 일컬어 그 분의 고향이 흥남이였던지라 이름이 버젓이 있었음에도 그저 부르기 쉽게 흥남이라고 불렀었다.
결과적으로는 두채의 집이 있었는데도 마을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여 그저 부르기 쉽게 외딴집이라고 불렀다.

그와 더불어 나이가 지긋하신 마을 어른들은 기현이 할아버지의 성씨가 "천씨"인지라 천씨 영감네 집이라고도 불렀다.

기현이 할아버지가 들메마을에 발을 부치게 된 연유는 대략 이러했다.
기현이 할아버지의 원래 고향은 전남 완도 근교에 있는 자그마한 섬이였다.그런데 그곳이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오지인지라 환경적 영향으로 삶에 질이 빈곤에 늪을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게 열약하였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보다 더 나을 듯 싶은 곳을 찾아 삶에 질을 높혀 보려는 마음으로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
그후 이곳저곳을 떠돌며 젊은 몸뚱아리라도 하나 있었기에 품팔이를 하여 겨우 생계를 이어가던 중 들메 마을과 인연이 닿았던지 그때부터 몸을 붙혀 살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가장 잘 사는 집 신참봉 댁에 농삿일을 거들어주고 품삯을 받는 조건으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그때부터 들메 마을에 머물어 살게 되었다.
그후 수년 동안 마음을 굳히고 살면서 평소에 그리 즐기던 술, 담배까지 끊고 피 땀흘려 모은 쌀을 읍내에 내다 팔아 돈을 만들어 한푼 두푼씩 알뜰히 모았으나 들녘에 턱 버티고 있는 기름이 번지르한 논 한마지기는 커녕 단 한쪼가리도 넘볼 수 없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대다수 사람들이 그랫듯이 대지주의 눈치를 살피며 소작농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처해진 사정이 힘에 벅찼을지라도 마을에 머물러 살게 되었고 그후 가정을 이루워 비로써 삶의 근간이 되었다.

그후 어쩔 수 없이 도지를 주기로 하고 지주로 부터 땅을 빌려 어텹게 농사를 지으며 힘들게 살았지만 자식의 교육면에서는 남다르게 열성이셨다.

그래서 기현이 할아버지께서는 처절한 굶주림과 못 배운 것이 그토록 한이되어 자기의 자식만큼은 어떻한 일이 있더라도 가르쳐야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단 하나 밖에 없는 자식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기현이 아버지께서는 그런 남다른 교육 열에 힘을 얻어 면내에 있는 채운공립국민학교를 졸업 하고 남들은 학업 성적으로나 경제적인 면에서 거의 엄두도 못내는 강경공립상업학교에 입학을 하셔 소정의 교육 마치시고 졸업을 하셔 지역민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였었다.
그 학교가 당시 논산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되어 강경읍 외곽지역 동남쪽인 남교동에 위치한 지역내 명문교로 알려지게 되는 공립상업학교 였다.

그리 어렵고 열약한 환경 속에서도 힘들게 학업을 마쳤다. 그 후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더러는 운 좋게 들어 갈 수도 있는 금융계통의 일자리에 아예 들어 가려고 노력을 하질 않했다. 그냥 마을에 머물면서 논농사 일을 하시는 기현이 할아버지를 도우며 살았다.
하지만 죽도록 일년 동안 농사를 져봐야 소작료를 물고나면 인건비는 커녕 참으로 남는 몫이 적어 근근히 네 식구 입에 풀칠하기 바뻣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가뭄에 흉년이라도 들라치면 밀리는 소작료에 빗만 잔뜩 걸머쥐게 되어 말 그대로 처절한 절망과 기아를 모면할 길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한 해 전에 기현이 아버지께서는 국가의 부름인 소집영장을 받고 육군에 현역으로 입대를 하게 되였다.

그렇게 기현이 아버지께서 군에 입대를 하기 하루 전날 면소재지 이발소에서 빡빡 깍은 머리가 영 어색했던지 어설프게 만지면서 우리집에도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려고 왔었던 기억이 새롯하게 떠올랐다.
물론 처음에는 내 나이 겨우 다섯살 난 해인지라 무엇 때문에 그 긴 머리를 빡빡머리로 만들었는지 깊은 영문도 몰랐었고 왜? 동네 집집마다 다니면서 인사를 하는지도 전혀 알 턱이 없었다.

그때 기현이 나이가 고작해야 두살이 채 않됐으니 겨우 어미의 젓을 뗄락말락할 무렵이였다.


변화무상한 대자연은 그 모든 전쟁이 남긴 처절한 상혼들을 추스려 아듬고 가려는 듯 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빙대한 금강들녘을 가득 채운 벼들의 이삭들이 다소곳하게 머릴 숙여 그빛깔이 놋황색으로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는 초가을의 문턱에 계절이 머물려 했다.

마을 사람들 중에 그 어느 누구 하나도 전혀 예기치 못한 전란이였기에 우선 전쟁의 화마로 부터 자기 목숨을 지켜내기에 여념이 없다 보니 삶의 근간인 논농사는 어쩔 수 없이(?) 아니 그보다는 자연스럽게 내팽겨칠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한 답이였을 것이다.

머릴 들어 바라 본 하늘이 구름 한점없이 맑아 괜시리 뜻 모를 시샘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푸르러 어리기만한 작은 내 두눈 안에 가득차게 내 보였다.
하늘이 저토록 맑고 선명할진데 어이타 이 민족에게 이토록 감내키 힘겨운 수난을 부여했는지 몇번을 반복하여 반문하고만 싶었다.
내 아버지를 무참하게 빼앗아 간 놈들에 극악무도한 만행을 알고나 있는지 되묻고 싶은 마음이 어린 가슴에 꽉 차올라도 끝내 가눌 수 없는 울분이 말 문을 닫아 그냥 울고 말았다.

여한 일이 있을지라도 티없이 자라야할 어린 우리들이지만, 불행하게도 처해진 시대적 현실은 참으로 냉혹하다 못해 처절한 아품을, 감당키 어렵게 부여해 끝없는 슬픔의 늪에 여지없이 빠트리고 말았다.
이토록 통한에 가득 찬 내 심정을 언제나 말이 없어 얄밉기 짝이 없는 저 하늘은 조금이나마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얄밉도록 모습을 알뜰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끝내 복바쳐 오르는 설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끝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에 두 눈이 일렁이었다.그로 인해 모든 사물들의 형체가 굴곡지게 바라보였다. 허나 금강평야 온 주위를 그리 숱하게 휘둘러 보아도 그 어느 곳 하나 흠잡을데 없어 실로 수려한 땅임에 틀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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