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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06 조회 : 1,417




오후부터 짙은 회색 비구름이 몰려오더니 날씨가 꽤나 어수선해졌다. 축 가라앉은 기분에 오후 내 우울키만 했다. 교실 유리창 밖으로 초가집 예닐곱 채가 올망졸망하게 붙어 있는 단조(單調)로운 시골 동네의 모습이 얼푸름하게 보였다.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멀숙하게 키 큰 미루나무들의 가지가 바람에 흔들려 적적함을 더했다

노을이 짙어 가는 저녁녘이 되자 종일토록 비켜설 듯 말 듯하던 구름이 시원스레 자릴 내주었다. 그제서야 늦부지런 떠는 저녁 해가 밉살맞게 얼굴 반짝 내밀었다. 널따란 운동장 가장자리에 밋밋하게 뻗어난 미루나무엔 그림자가 여릿하게 깃들고 있었다. 주홍빛 노을에 뭉긋뭉긋 물들은 구름들이 금강 둑 언저리 모래밭을 한 걸음 한 걸음 거슬러 가고 있었다.

생기가 가득 차 활기롭기만 하던 교정이 저녁 방과(放課) 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쇠잔(衰殘)해져 가는 햇살에 점차 비워지는 교정이 조금은 쓸쓸하기도 했다.

물론 경제적인 부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주어진 시간의 여건이 여의치 않아, ‘써커스’ 곡예(曲藝)의 묘기를 관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곡마단 입구에서 재주를 그리도 잘 부린다는 원숭이와, 여러가지 동물들의 모습과 붉은 코에 고깔모자를 쓴 익살꾼 삐에로 아저씨의 모습을 천막 밖에서라도 눈동냥 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내 친구 성구와 함께, 키 작은 향나무가 아담스런 모습으로 줄지어 서 있는 길을 따라 교문을 나섰다.

학교 앞 큰길가를 지나는 화물차가 마구 내뿜는 검은 연기가 흙먼지와 뒤섞여 짜증나게 했다. 흙먼지를 피하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른 등을 돌리다, 서로 얼굴이 마주치자 그냥 배시시 웃고 말았다. 옹골진 자갈들이 너저분하게 깔린 신작로엔 ‘잘그락잘그락’ 차바퀴에 부딪히는 자갈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리 서둘지 않고 여유롭게 향하는 소달구지의 모습이 소읍(小邑)의 여유로운 저녁 정취를 포근하게 자아냈다.

길가에 서 있는 가로수에 오가는 차량들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부옇게 내려앉았다. ‘우릉우릉’ 떨림을 반복하는 전신주 윗머리에, 노을빛이 담뿍 내려앉아 이제 하루 해가 서서히 기울려는 것 같았다. 전깃줄 위엔 온종일 들녘을 헤집다 둥지로 돌아가려는 제비들이 바쁘게 몸놀림을 하고 있었다.

읍내에서 잠시라도 여유를 부리며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도 않았다. 막차 시간까지 남아 있는 공백(空白)이 촉박(促迫)하게만 느껴졌다. 꾸무럭한 흐린 날에는 읍내의 전경이 더욱 침울하게 보였다. 희끄무레한 건물들의 지붕 머리 위로 비추는 노을빛이 애잔스럽게 느껴졌다. 넉넉하게 비워진 역사(驛舍)로 진입을 하려 굽어진 산모퉁이 따라 휘돌아 나오는 저녁 열차가, 기적소리 하늘 높이 내어 지르며 점점 가까히 눈앞에 다가왔다.

철로 건널목엔 ‘땡땡땡땡’ 소릴 내며 빨간 외눈박이 신호등이 깜빡거리고,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성구 아버지가 오가려는 사람들의 앞을 가로막아 빨간 깃발를 아픔만큼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황산동 입구 자전거포에선 기름때 반지르한 소대를 팔목에 낀 아저씨가 일을 끝마치려는 듯 허리를 펴시며 말을 하셨다.

“아! 선뜻 일 마무리 못하고 어쩌자고 그리 꾸물럭거리만 하냐? 그까짓 쥬브(튜브) 하나 때우는 것을 여직껏 붙들고 앉아 있으니, 그러다가 해 다 떨어질라.”

주인 아저씨는 얼굴 군데군데에 검은 기름 자국이 묻어난 빡빡머리 일 배우는 아이를 그렇게 채근댔다.

길 건너 추녀 나지막한 양철 지붕 기름집에서는 고소한 깨 볶는 냄새가 새록새록 묻어났다. 한동안 그토록 하얀 꽃잎이 볼품스럽게 피었던 벚꽃 나무엔 푸른 잎들만 무성하고, 그 아래 빨간 우체통이 멍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검정 증기기관차가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역사의 낮은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써커스단’의 천막과 깃발들이 보였다. 밤 공연을 앞두고 손님들을 불러 모으려나, 구성지게 연주를 하는 밴드의 노래 가락이 자믓 흥을 돋우고 있었다.

통학 열차를 기다리는 학생들로 점점 붐비기 시작하는 역전 앞마당에는, 읍내 상업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들 몇 명이 엿목판을 둘러 싸고 엿치기를 하고 있었다. 누런 가락엿을 두 동강으로 딱 분질러서 잘려진 부분에 구멍을 조금이라도 더 크게 내어 이기려고, 입을 갖다대고 ‘후’ 소리를 내며 힘껏 불고 있었다.

황산동 사거리에서 역전으로 가는 큰 길가엔, 교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녀 학생들의 행렬이 길게 줄을 이루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연무대에서 강경으로 열차 통학을 한다는 석란이를, 먼발치에서라도 한번쯤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잠시동안 머뭇거렸다. 그리고 주위를 찬찬히 둘러 보고 있는데 성구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며 말을 했다.

“상민아! 너 혹시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냐?”
“아니 내가 기다릴 사람이 어디 있냐?”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얼버무리고 말았다.

써커스 구경을가려고 골목길을 접어 들려는데 깔깔대며 걸어오는 여학생들의 소리가 들려 뒤 돌아보았다. 네댓 명이 떼를 지어 걸어오는데 석란이의 모습이 보여 말을 하고 싶었지만 반가운 마음뿐, 그저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한 채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석란이와 나는 싱겁게 눈 웃음만 주고 받았다. 제법 성숙해진 석란이의 모습에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려, 발길을 서둘러 곡마단 앞으로 걸어가고 말았다.

송진 냄새나는 톱밭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제재소 담벼락을 지났다. 그러자 널따란 공터에 여러가지 색상의 깃발들이 바람에 나붓거렸고 높은 지붕 머리에 올라간 밴드들이 흥겹게 연주를 하고 있었다.

통나무 기둥으로 엮어 놓은 출입구에, 나무 판자로 얼기설기 세워 놓은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가 보였다. 그 매표소 앞에는 챙 끝이 아주 짧고 납작한 모자를 머리에 눌러쓰고, 양쪽 다리통이 아주 좁다란 맘보 바지를 입은 아저씨 한 분이 서성거렸다.

그때 옆에 있던 성구가 하는 말이, 그 아저씨가 입담이 좋아 사람들의 배꼽을 잡게 하는 곡마단(曲馬團)에서 사회를 보는 아저씨라며 알려주었다.

통나무로 가려 놓은 울타리 안에는, 국민학교 동창생 까불이 응선이가 말한 것처럼 똥구멍이 정말로 빨간 원숭이가 있었다. 길다란 쇠줄에 목이 매인 채 재주를 부리듯 기둥나무를 한 손으로 붙들고 휘둥글게 뜬 눈으로, 앞에 서 있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랗게 둥근 쇠창살 우리 안에는, 산짐승의 제왕이라는 붉은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정교하게 둘러진 크기가 송아지만한 호랑이가, 온종일 공연을 하느라 피곤하였던지 하품을 하여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자 밖으로 드러나는 뾰족하고 날카롭게 생긴 커다란 하얀 송곳니가 무척이나 무섭게만 보였다.

그렇게 정신을 놓고 구경을 하고 있는데, 성구가 팔로 내 옆구리를 가볍게 치며 천막 안쪽을 가리켰다. 천막 안에서 키 작은 난쟁이 남녀 어른 두 사람과, 나이가 겨우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천막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성구가 나를 향해 말을 했다.

“야, 상민아! 저기 있는 두 사람이 부부지간이고, 옆에 있는 애는 자기들 딸이라는데, 저 꼬맹이가 재주를 엄청나게 잘 부려, 사람들이 박수를 무지하게 치더라.”

성구가 어깨를 들썩거려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데, 장애를 이기고 저렇게라도 살아 볼려고 애를 쓰는 그 사람들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와 더불어 문득 집에 있는 내 동생 순덕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암울한 시대를 만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 모두가, 더 이상 힘든 시험에들지 말기를 빌었다.

읍내 하늘가에 한동안 차분하게 내려앉았던 발그레한 노을빛이 흔적을 지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저녁 어스름이 소리 없이 찾아들었다. 더 늦기 전에 막차 시간에 맞춰 버스 정류장으로 가려고 하니, 연무대로 향하는 저녁 막차가 출발을 하려나, '꽥' 외마디 소리를 내어 질러 귓고막이 울리도록 진동음을 남겨 바라보았다. 기관차 꽁무니에 객차 두 칸과 화물차 한 칸을 단출하게 매달고 역사를 버리듯이 서서히 빠져 나가고 있었다.

성구와 헤어져 버스 정류장을 향해 홀로 걸어가는 길이 새삼스레 쓸쓸하기만 했다. 어둠을 등에 지고 낯선 곳에 홀로 선 이방인처럼 서먹하기만 한 외로움이 비좁은 가슴에 밀려오고 있었다.

저녁 막차라 그런지 차 안이 허전하리만큼 비어 있었다. 앞자리 창가에 앉아 스쳐 지나는 시내 중심가 가게들이 하나둘씩 밝히는 누런 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읍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개울가 소화다리를 건너려는데, 물엿을 고는 달짝지근한 냄새가 콧속에 스며들어 밖을 바라보았다.

기와 지붕 건물 과자를 만드는 공장의 좁다란 굴뚝 위로 연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경찰서 로타리를 지나 남교동 임시 정류장에 버스가 잠시 멈춰섰다. 차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는 어른 겨우 두 사람뿐, 내 친구 옥순이는 먼저 집으로 간 것 같았다.

높다란 강둑을 내려선 버스는 차량들이 뜸한 틈을 타 덜컹거리면서도 제법 빨리 달려가고, 모처럼 빈자리에 앉아 있는 키가 작달막한 조수 아저씨는, 차창에 기대어 졸다 깨어나기를 몇 번 반복했다.

불그레한 전등알 불빛이 밖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면 소재지 주막집 가게에는, 늘그막의 두 부부가 점방 문을 닫으시려는지, 낮 동안 벽에 기대 놓았던 나무 덧문 짝들을 번호 순서대로 더듬더듬 찾아 닫고 있었다.

어둠이 점점 깃들기 시작하는 하늘에 부지런히 마실 나온 새치름한 눈썹달이 떠 올랐다. 찾아드는 어둠 속에 앞산이 서서히 제모습을 감추려 해, 어슴푸레 바라보이는 등잔 불빛 희미한 집을 향해 더딘 발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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