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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09 조회 : 1,296




으늑한 산골짜기에 아침 햇살이 부챗살처럼 고루 퍼져나고 있었다. 그 햇살이 파르스름한 문풍지에 다가서 너끈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단작스럽게 트여진 봉창 밖엔 늘 푸른 사철나무 가지에 재잘거리는 참새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어둑해진 방 안에 흐릿하게 맴돌던 어둑발의 잔 부스러기들을 서서히 걷어내며 선명한 아침 햇살이 빛을 모아 깃들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반질반질하게 손때가 묻은 손바닥 크기만한 외상 장부를 펼쳐 놓고 찬찬히 들여다보시며 반 토막쯤 닳은 연필심에 침을 발라 뭔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셨다.

조각난 천으로 곱살하게 이어 붙인 푹신한 이부자리에서 두 팔을 한껏 벌리고 반쯤 벌린 입 언저리에 가늘게 침을 흘리며 단잠에 들었던 순덕이가 잠에서 깨어나 가볍게 응석을 부리자 어머니께서는 그런 모습 더없이 귀여운 듯 손에 들고 계시던 장부를 얼른 한쪽으로 치워놓으시고 투정 부리는 순덕이를 품에 끌어안아 얼굴을 비벼 다독여 주셨다.

그런 가슴 따뜻한 모습이 가난을 헤쳐나가려는 우리 식구들에게 청량감을 불러일으키는 촉매(觸媒) 역할을 했다.

발걸음을 옮겨봐야 거기가 거기일 수밖에 없는 비좁은 방 안 윗목에서 순덕이 어머니가 잘 마른 고사리 나물 둥치를 추스리고 계셨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장에 나가실 때 가져가시려는 것 같았다.

순덕이 어머니께서는 단 한 점 혈육인 어린 순덕이를 위해 그렇게 한 푼 두 푼 조금씩 알뜰하게 돈을 모으셨다. 그런 재미에 더욱 부지런히 산과 들녘 밭으로 열심히 다니시는 듯했다.

납작 엎딘 초가집 단칸방에 바싹 달라붙은 작달막한 부엌에선, 아침밥이 뜸 들려나 가마솥 틈사이로 ‘푸푸’ 소릴 내며 허연 김이 힘차게 새어 나와 솥뚜껑이 가볍게 들썩였다. 조급(早急)을 떠는 둥우리 속에 닭들은 서로 먼저 밖으로 나오려고 문 앞에 몸을 비집어 푸덕거렸다.

그렇게 부산 떠는 닭들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지 검둥이는 느긋하게 두 앞다리에 힘을 줘 몸을 쫙 펴고 완두콩 꽃이 알록달록하게 피어난 사립짝 앞 텃밭으로 어슬렁거리며 나섰다.

불어오는 봄바람이 노란 송화 가루를 듬뿍 담아 끈끈한 송진 냄새를 온 집안에 가득 풍겼다. 그리고 앞 들녘으로 내친걸음 하여 아침 이슬 촉촉히 배인 보리밭에 청초록 비단 물결을 탐스레 이루고 아랫 동네 어귀 둥구나무쪽으로 사라져갔다.

달그락달그락하는 밥숟가락 소리가 좁은 방 안에 훈훈하게 번졌다. 이젠 제법 말문이 트여 ‘엄마엄마’ 하며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순덕이를 읍내 장터에서 사 온 황소 눈알만 한 알사탕을 손에 들려 주어 어렵게 겨우 달래놓고 집을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무겁게만 느껴졌다.

흙먼지 가볍게 푸석이는 좁다란 밭둑길을 내려서면 활처럼 굽은 다랑논 둑길이 나오고 논둑길을 휘어 도는 듯싶으면 한 사람 겨우 걸어갈 수 있는 좁은 오솔길이 나왔다. 그 오솔길은 잔솔나무 다소곳하게 우거진 둔덕마루로 이어졌다. 턱 낮은 둔덕을 넘어서면 좁다란 계곡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대여섯 개 놓여진 돌다리를 성큼성큼 건너면 은행나무가 서 있는 벼랑바위 앞에 닿을 수 있었다.

네 식구의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언제나 그 길을 따라 읍내를 향해 걸어가시고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 나도 그 뒤를 따라 학교에 가려고 주막집 정류장으로 향했다.

흰 바탕에 폭이 좁다란 검은 리본이 한 바퀴 선명하게 둘려진 모자를 눌러쓰고 옥광목(玉廣木)의 하얀 반팔 소매의 하복을 곱게 차려입은 옥순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민학교 다닐 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새로운 버릇이 하나 늘었는가? 가뜩이나 작은 얼굴에 뭐 그리 닦을 것이 묻었다고 곱게 접은 하얀 손수건을 연신 얼굴에 대며 말을 했다.

“야, 상민아! 요즘 니 얼굴 보기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더 어렵더라? 저녁나절에 집으로 올 때 버스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니 얼굴은커녕 코빼기도 안 보이던디. 뭐하느라고 다 늦게 막차를 타고 댕기냐?”

몹시 궁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응, 먼젓번엔 학교에서 웅변 연습하느라고 며칠 동안 늦었고, 엊그제는 역전 앞에 들어온 써커스 호랭이 구경 좀 하느라고 늦었어.”

그러자 옥순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내 얼굴을 쏘아보며 말했다.

“야! 공갈치지 마! 내가 어디 바보 멍청인 줄 아냐? 니가 써커스 구경을 하고 나면 막차도 놓쳐 버리고 바깥이 깜깜한 오밤중이 되는데, 어떻게 집으로 올려고 구경을 하냐?”
“야! 내가 안에 들어가서 구경을 한 게 아니고, 그냥 바깥에서 호랭이랑 원숭이 그리고 아주 웃기는 고깔 모자 쓴 장난꾸러기 아저씨를 진짜로 봤어.”

그러자 옆에서 걸어가던 옥순이가 그제서야 이해가 가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가파른 건널목을 넘어서 앞을 바라보니 검어 우중충한 지서 건물 정문 앞에 길을 가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모여있는 사람들 중에 술에 좀 취한 듯한 건장하게 생긴 청년 한 명이 무엇이라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지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하는 순경 두 분이 양쪽 팔을 붙들고 말리려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같이 걷던 옥순이를 뒤에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서 보니 남산리에 산다고 하는 청년이 지난해 늦가을에 장가를 들면 본가에서 분가를 하여 신혼집을 지을 기둥감으로 쓰려고 나라 산에서 소나무 몇 그루를 불법으로 벴다고 했다. 그 일로 얼마 전에 전근을 가고 없는 차석에게 적발되어 산림법 위반으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고생을 하다가 법원에서 징역 6월에 2년간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는데 그때 그리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고 빌었는데도 매정하게 뿌리치고 감옥살이를 시켰다고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고 없는 차석을 만나야 한다며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 다 들어 보라는 듯이 소릴쳤다.

“내가 소나무 몇 개 베어 낸 것이 죄라면 저는 그렇게 떳떳하게 순사질 했는감? 나보다 소낭구(소나무) 더 많이 베어 낸 사람도 동네 유지랍시고 그저 주머니 속에 몇 닢 돈이나 쥐어 주면 낼름 받아 쳐먹고 나처럼 돈 없고 빽 없는 만만한 사람들이나 잡아들였지 뭐. 그리고 그 뭐시냐? 언덕배기 점방집 할머니가 막걸리 누룩 담가 놓은 것을 쥐새끼처럼 찾아내서 밀주라고 겁주고 돈 뜯어먹고, 겨울철에는 눈구덩이 푹푹 빠져가며 오밤중에 이 동네 저 동네 노름방 들쑤셔 뒷돈이나 챙기지 않았는감? 그런데 내가 무슨 큰 죽을 죄를 졌다고 포승줄로 꼭꼭 묶어 놓고 바른말 하라며 귀싸대기를 헌 집 벽 털 듯이 후려치고 구둣발로 앞정강이를 차면서 모지락스레 욕을 퍼부어 경찰서로 넘겨 이 꼴이 되었는데 그쪽 집에서 호적에 빨간 줄 그어졌다고 다 된 혼사 깨버렸는디 내가 어떻게 억울하지 않것냐구유?”

울분(鬱憤)이 사그라지지 않은 듯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입가에 침이 허옇게 묻어나도록 리 소란을 떨어도 그저 다독거리는 순경들의 모습이 예전보다는 달라져도 너무 많이 달라진 듯하여 세상이 참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억울하다고 버럭버럭 소리치는 사람이나 이참저참 미리 재고 몸 사려 떠난 약삭 빠른 차석이나 다 똑같아 보였다. 그렇게 시절이 어수선하니 적당히 몸을 사리는지 예전과는 달리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기고 우유부단(優柔不斷)하게 그저 뭉그적거리고 있는 지서 주임의 느긋한 모습이 조금은 밉살스러웠다.

읍내로 달려가는 버스 차창 밖으로 내보이는 넓은 들녘엔 서서히 모내기 준비를 하려는지 군데군데 소를 몰아 써레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신작로 길을 걸어서 읍내 장터로 가는 아주머니 두서너 분이 차가 몰고 오는 흙먼지를 피하려 얼굴을 가득 찡그리시며 등을 돌려 길가로 조심스럽게 내려서고 있었다.

너른 금강 물줄기 따라 불어오는 강바람에 비릿하게 묻어나는 석탄 냄새가 비위를 거슬리는 역전을 지나려니 길모퉁이 중국집에서 오일마다 서는 읍내 장날이라 한몫 보려는지 아침 일찍부터 자장을 볶느라 딸그락거리는 국자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역 구내에 있는 급수탑은 화강암(쑥돌)를 네모반듯하게 깎아 둥근 원 모양으로 쌓아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지붕에는 강판을 얹어 밤색 페인트를 짙게 칠한 뾰족한 모습이 돋보였다.
담쟁이넝쿨로 온통 뒤덮힌 높다란 급수탑이 정거장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이는 역 구내에는 증기기관차가 물을 공급받으며 한가로이 멈춰 서 있고 역사를 오가는 손님들 몇 사람뿐 역사는 비교적 한산했다.

몇 그루 아카시아 나무에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핀 역 구내 끝머리 건널목 근처에 있는 성구네 집 앞에 닿았다. 다이아몬드형의 철망이 앞에 가려진 토끼집 안에는 그동안 빈 병을 주워 모아 놓은 돈으로 샀다는 눈알이 온통 빨간 하얀색 토끼 두 마리가 갈라진 코를 발름발름거리며 아카시아 이파리를 먹고 있었다.

손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몸에 두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게 보였다.

나무로 덧댄 벽에 검정 콜타를 칠을 듬뿍한 관사 건물 왼쪽에 성구가 책가방을 땅에 내려놓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땅속 깊이 묻어 놓은 나무 기둥에 널판자를 대어 못을 박아 고정시켜 놓고 새끼줄로 칭칭 감은 판자를 손날로 매게 쉴 새 없이 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고 한두 번 어깨를 으쓱거려 너스레를 떨었다.그런 성구가 하루 전날부터 당수도를 배우러 도장에 다닌다고 광목천으로 만든 도복을 나에게 보여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건널목 앞 의자에 앉아 그런 성구의 모습을 바라보고 계신 성구 아버지의 얼굴 표정이 그리 밝지는 못하신 것 같았다. 간장 공장으로 출근하려 집을 나서던 성자누나는 공부는 안하고 그런 짓만 하는가 싶어 걱정이 되는지 가볍게 눈을 흘기며 우리들 앞을 지나 공장 정문으로 향했다.

역전을 지나치며 한번쯤 본 듯싶은 창고 같이 생긴 곳에 성구가 다닌다는 도장이 있었다. 천장 높은 곳에 굵은 쇠줄에 매달린 군용 더블백을 발로 차며 흙바닥에 도복을 입고 구령에 맞춰 단련을 하는 모습들이 떠올랐다.

성구가 흰색 하복 윗도리 왼쪽 명찰 위에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의 주물로 된 당수 배지를 달고 있었다. 그리고 길을 걸으며 검은 띠만 따서 실력이 초단만 되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고 학교 교문 앞에 닿을 때까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온몸을 촐싹거리며 말을 했다

아침 조회 시간이 되어 담임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은 먼저번에 말한 것처럼 너희들의 시청각 교육을 위해,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를 강경극장에서 단체로 관람을 하여, 오늘 수업은 오전에 끝마친다.”

지루한 하루 수업에서 풀려나고 중학교 입학한 후 처음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한다는 말에 모두 마음들이 들뜨기 시작했다. 지난 교련 시간에 학교 밴드부의 연주 소리로 ‘콰이강의 다리’ 행진곡을 귀에 익을 정도로 너무 많이 들어온 터라 쉬는 시간에는 저마다 책상에 걸터앉아 휘파람으로 심심찮게 불렀다.

서구 유럽 사람처럼 귀족풍으로 생기신 영어 선생님으로부터 의문 대명사에 대한 문법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여 들었던 4교시 영어 시간이 끝났다.

영화를 보러 간다는 설렘에 점심 도시락을 코끼리 비스켓 먹듯 치워 버리고 저마다 책가방을 챙겨 운동장에 모여 인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각 학년 학급별로 두 줄로 서 교문을 나섰다. 극장이 있는 ‘서창동’으로 가려고 시내로 걸어가는데 역전 공터 곡마단의 밴드 소리와 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와 거리가 온통 붐비기만 했다.

뒤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서 걸어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가게 안에 있는 상인들은 물론 오가는 행인들도 잠시 발을 멈춰 바라보았다. 어쩌다 사람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유치원생도 아닌데 검정 돼지 소풍가는 날도 아니고 꼭 줄을 맞춰 가야하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하여 그만큼은 알게 모르게 자라난 듯했다.

시내 골목길을 두 번쯤 꺾어 돌아 베틀 공장의 염색약 냄새가 물신 풍기는 극장 앞에 닿았다. 극장 책임자 아저씨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입장을 하여 널따란 극장 안으로 들어서자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무대 위에 하얀 영사막이 기다랗게 쳐져있는 것이었다.

예전에 면소재지에서 보았던 이동 순회 영화반인 가설극장에서 보았던 영사막보다 휠씬 커다랗게 보였다.

이층 벽에 조그마한 구멍 두 개가 보여 자세히 보니 기사 아저씨가 영사기의 동그란 바퀴에 필름을 걸고 계셨다.

전교생이 모두 입장을 마칠 때까지 그리도 웅성거려 시끄러웠던 극장 안이 입장을 마치자 각 반 담임선생님과 훈육 선생님의 호령으로 조용해졌고 곧바로 영화 상영이 시작되었다.

‘대한 늬우스’가 나오자 극장 안이 숨 죽은 듯 조용해졌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는 영국에서 1957년에 제작한 영화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전혀 고전적인 감이 나질 않는 방대한 규모로 만들어져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수상한 대작품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태국과 미얀마 국경 사이를 통과하는 강에 세워지는 다리 공사를 둘러싸고 점령 일본군과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 온 영국 병사들간에 빚어지는 인간적 갈등과 전쟁의 허망감 그리고 무의미함을 배경으로 점령 일본군과 맞서야 하는 영국군의 긍지와 자존심등을 심도 있게 묘사한 상연 시간 157분의 영화였다.

마지막 장면 다리에 설치한 폭약과 연결된 스위치를 영국군 공병대장 니콜슨 대령이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몸으로 눌러 터트려 폭파하는 장면의 웅대한 스팩터클에 매료(魅了)되었고, 영국군 병사들이 발을 맞춰 휘파람으로 부는 ‘콰이강의 다리’ 행진곡 소리가 압권이었다.

실로 세월이 이렇듯 유수(流水)와 같이 흐른 지금 기억을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친구들과 같이 마음을 활짝 펴 웃고 뛰어놀던 그때 그 시절을 회고(回顧)하니 어둠침침한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어렴풋이 떠오른다.

지난 그 시절이 그리워 마음 한 켠이 애잔해지려 하면 허(虛)한 마음 달래고 싶어 휘파람 소리로 ‘콰이강의 다리’ 행진곡을 부르니 이는 정녕 나 혼자만의 추억 어린 감정은 아닐 것이란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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