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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10 조회 : 1,510




강경 읍내는 푸르디푸른 남쪽 하늘을 다소곳이 바라다보며 유원(幽遠)한 모습으로 예스럽게 자릴 잡아 운치를 자아냈다. 읍내 북쪽 끝머리에는 느티나무가 하늘 끝에 닿을 듯하게 용트림하는 봉화재가 우뚝 서 있고 깎아지른 듯싶은 벼랑 아래로 탁 트인 원경(遠景)이 무릇 시원스레 펼쳐졌다.
곱디고운 그림같은 너른 세도 벌을 가르며 굽이도는 금강 물줄기는 은파(銀波)를 번득이며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다. 봉화재 옥녀봉에 오후 해가 느직느직 몸을 일으켜 선홍빛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파아란 하늘에 몽실한 솜구름이 유유히 떠도는 읍내 한구석에 벌그레 녹이 슨 함석 지붕의 허름한 강경극장이 있었다. 정면에 걸려진 입간판(立看板)에 솜씨 있게 잘 그려놓은 그림과는 걸맞지 않게 간판 한쪽 모서리가 바람에 조금씩 건들거리는 허름한 극장 건물이 행길 가운데까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맨숭맨숭한 벽면에 빼꼼히 열린 창문 유리창에 햇살이 강렬하게 비쳐 눈이 시려와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중학교에 입학을 한 후 마음먹었던 시내의 건물들의 면모와 길을 눈에 익힐 겸해서 성구와 함께 극장을 나와 시내를 향해 걸었다. 성구는 어려서부터 읍내를 늘 보아오면서 자란 탓인지 나처럼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듯싶어 자라 온 환경의 차이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길 건너 국수를 뽑는 공장에서 ‘통통통통’ 간질거리게 소형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햇볕 잘 드는 옆 마당에는 올곧은 대나무 토막에 걸쳐진 희누름한 국수 가락이 치렁치렁 길게 내려져 햇살에 더욱 노릇노릇하게 보였다.

오후 햇살이 가느스름하게 나무판자 틈새로 깃드는 작은 인쇄소에서는 군내 각급 학교와 관공서에 납품할 인쇄물을 찍어 내는지 ‘덜컹덜컹’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길 밖까지 새어 나왔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벽면에 푸른 담쟁이넝쿨들이 얽히고설켜 가득가득 들어찬 우체국 안에는 몇몇 사람들이 그리운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려 엽서와 우표를 사려나 서성이고 육중하게 보이는 건물 유리창 밖으로 전보를 치는 무선송신기(無線送信機)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들렸다.

사람들의 내왕(來往)이 붐빈 시내 중심가로 접어들어섰다. 우리 반 성천이네 가게인 양복점의 하얀 아크릴 간판이 눈에 띄었다. 아직은 낮인데도 환하게 우유빛 전구를 몇개 켜 놓은 진열장 안이 그리도 훤하게 보였다. 그리고 진열장 안에 있는 마네킹 위에 맵시있게 깁은 양복을 멋지게 걸쳐 놓았다.

길모퉁이 전신주에는 방금 극장에서 보고 나온 '
‘콰이강의 다리’를 선전하는 극장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누런 백로지(白露紙)에 붉은색과 검정색 그리고 파란색 물감을 고루 섞어 엉성한 붓글씨로써 놓은 포스터가 한 바퀴 둥그렇게 감겨 붙어 있었다.

나무 전신주 앞에는 미닫이 유리 창문이 널찍이 달려 있는 추녀 낮은 한약방이 자릴 잡고 있었다. 한약방 안에는 천장에 뜻 모를 한자로 써 놓은 커다란 누런색 약봉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일을 배우는 듯싶은 젊은이 한 사람이 마룻바닥에 앉아 작은 작두로 약초를 정성 들여 썰고 있는 모습이 유리 창밖으로 내다보였다. 그 옆 자리에는 하얀 무명 한복 차림에 머리에 말총으로 만든 검은 탕건을 쓰시고 알이 동그란 가는 뿔테 돋보기 안경을 콧등에 걸치신 한약방 주인이 곱게 썰은 약초를 앙증맞게 아주 작은 손저울로 달고 있었다.

길가 한쪽에는 두부장수 아저씨가 두부가 담긴 목판을 올려놓은 지게를 지고 방울을 쳐 ‘두부 사려’ 소리를 치며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길 가던 누렁이 한 마리는 방울소리가 신기한 듯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뻘쭘하게 바라보았다.

한약방 옆에 바싹 사이좋게 달라붙은 전파사에서는 흙먼지를 가득 이고 있는 네모난 나무상자의 스피커가 놓여 있었다. 그 스피커에서 언젠가 동네에서 서너 번쯤 들어본 듯싶은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흘리며,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라는 간드러진 여자 가수의 목소리가 음악 반주에 맞춰 구성지게 흘러나왔다.

가게 좌판(坐板) 위에 잘 말린 건어물들이 다보록하게 쌓인 길 건너 건어물 가게 앞에는 며칠 전 역 앞 정육점에서 본 것 같은 상이용사 아저씨 두 분이 보였다. 한 분은 잘린 한쪽 발을 양쪽 겨드랑이 목발에 의지한 채 한 손에 연필을 들고 또 다른 한 분은 쇠 갈쿠리가 달린 의수(義手)를 내밀어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햇살에 번득이는 쇠갈쿠리를 바라보며 잊었던 아니! 잊으려고 애를 썼던 내 아버지에 대한 뼈아픈 기억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모진 아픔을 몰고 또렷한 한 조각 그리움이 밀려오니 모처럼 가져 보려했던 나만의 시간이 왠지 모르게 답답해지는 마음에 기분이 칙칙해지는 것 같았다.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 황산동 장터로 가려고 하니 시내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샛강이 보였다. 그 샛강가 둑 옆에 단층으로 지은 화강암 교회 건물이 눈에 띠었다. 지붕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가 면소재지 교회 십자가보다 몇 배나 더 크게 우뚝 솟아 조금은 웅장하게 보였다.

옆에 같이 걸어가던 성구가 손가락으로 교회를 가리키며 읍내에서는 제일 큰 교회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누나 성자도 그 교회에 나간다고 하여 그제서야 성자 누나가 기독교 신자인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천변(川邊) 둑 위에 오꼬시(밥풀과자)와 아메다마(눈깔사탕)를 만드는 과자 공장에서는 반쯤 트인 문 사이로 건장하게 생긴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알사탕을 만들려나 반질반질하고 둥그런 통나무 기둥에 잘 고아진 엿뭉치를 두들겨 치면서 기다랗게 늘이고 있어 고소하고 달달한 냄새가 콧속 깊이 스며들었다.

싱그러운 6월의 바람이 한차례 시원스레 불어와 가로수의 잎사귀를 가볍게 흔들었다. 저녁 햇살에 길게 드리워진 가로수 그림자를 밟으며 기차역으로 이어지는 큰길로 들어섰다.

손님을 부르는 장사꾼들의 소리가 넘쳐나는 장터 골목 입구를 ‘삐거덕삐거덕’ 소리를 내며 빠져나오는 소달구지 위에 크고 작은 장짐들이 가득하게 실려있었다. 그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는 촌로의 마음은 손에 쥔 줄을 바짝 감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 조급한 주인 마음은 아랑곳없이 배가 더부룩한 황소는 두리뭉실 살이 찐 통통한 엉덩이에 항문 주위를 두어 번 들썩들썩하더니 이내 ‘퍽퍽’ 소리를 내며 푸석한 포도(鋪道) 위에 몇 덩이 쇠똥을 거리낌 없이 떨구었다.

도로 위에는 트럭이 짐을 가득 쌓아 올려 기우뚱거리며 달려가느라 ‘타다닥타다닥’ 가로수 나뭇가지에 닿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투가 조금은 느린 듯해 보여도 정감이 물씬 배어나는 충청도 느릿한 말에 각기 다른 옷차림의 얼굴들이 비좁아 더욱 정이 드는 장터 골목 안을 분잡스런 만큼 가득 메워 저마다 삶의 소리을 내고 있었다.

성하(盛夏)의 계절로 접어들려는 입목, 싱그런 풋사과처럼 풀 내음 잔뜩 묻어오는 바람이 저녁녘 허기를 재촉했다. 흙벽돌 위에 검은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놓고 구수한 파전 굽는 들기름 냄새와 차양(遮陽)을 친 순댓국집에서 지푸라기에 둥그렇게 묶여 허연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순대가 미각을 한껏 돋우었다.

비좁은 골목길 오가는 사람들끼리 서로 몸이 맞닿자 슬며시 옆으로 비켜서 길을 터 주고 소금기 찌든 비릿한 내음 나는 생선전엔 찬거리 자반을 사려 흥정하며 주고받는 아낙네들의 손끝에 묻어나는 세상인심(世上人心)이 넉넉해 보였다.

울긋불긋 고운 박하엿 목판을 누런 광목천으로 매어 목에 걸고 ‘철컥철컥’ 가위 소리를 내며 구성지게 읊어대는 입담이 오가는 발길들을 멈추게 했다. 그러자 덩달아 신바람이 나는지 겉옷 파는 아저씨가 발을 굴러 손뼉을 치며 박자가 맞지 않는 서툰 노랫가락으로 손님들을 불러 모으려 했다.

길모퉁이 대장간에서는 농기구를 손질하려나 시뻘겋게 불에 달은 조선낫을 집게로 물어 담금질 하려고 물동이에 담그니 ‘픽픽’ 소릴 내고 있었다. 대장간 건너편 길가엔 꺾어 말린 고사리와 껍질 벗긴 도라지 그리고 한 움큼씩 묶어 놓은 머윗잎를 팔러 나온 칠순의 할머니가 치마를 제쳐 속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거스름돈을 꺼내고 있엇다.

주름마저 메말라 번질거리는 손등이 바라보기에 무척이나 측은했다. 가냘픈 손가락에 겉도는 때 묻은 은가락지가 살아 온 날 만큼이나 닳고 닳아 햇살에 번득여 애절함을 다시금 자아냈다.

가느다란 나무 지팡이로 길바닥을 더듬거려 칠 벗겨진 하모니카로 찬송가를 부르며 어린 딸 여린 손에 이끌려 이 가게 저 가게를 돌며 구걸하는 모습이 한 덩이 뭉클한 연민의 정을 느끼게 했다.

길 따라 넓게 펼쳐놓은 옹기전에는 아주머니들이 모여 손가락을 구부려 빈 독을 톡톡 두드리니 ‘땡땡땡땡’소리가 해말끔하게 들렸다.

온통 소란스런 시골 장터 삶의 소리들을 잠시인들 멈추려나, ‘뻥이유’하는 소리와 함께 ‘펑!’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허연 김 속에 보리 냄새 물씬 풍겨나는 보리 튀밥이 때 묻은 둥근 철망 안으로 앞 다퉈 퍼져 나오고 젊은 아낙네 등에 업힌 어린 아기가 ‘뻥’ 소리에 놀라 선잠에서 깨어난 듯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뻥튀기 아저씨가 조금은 미안한 듯 머쓱하게 웃음을 띄우며 얼굴에 묻어나는 땀을 손으로 쓱 문댔다. 그러자 손에 묻었던 검정이 얼굴에 묻어나 무척이나 우습게 보였다.

내 어릴 적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하얀 클로버꽃 줄지어 피어난 금강 둑 십 리 길을 멀다 않고 따라나섰다. 장 구경을 하려는 마음에 발이 아파도 떼를 쓰지 않고 그리도 신이나 앞을 서 걸어갔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저녁 해 등에 지고 발길을 돌리려니 어미 품 떠나 팔려 나온 아기 염소 울음소리 애처롭게 들려오고 찬연스레 빛 밝혀 종일토록 세상을 보듬던 태양이 하늘 가득 붉은 노을로 물들이려려 했다.

저녁 막차를 놓칠 새라 발걸음 서두는 내 모습이 그 노을빛에 차츰차츰 묻어나고 있었다.

장날 저녁녘 버스는 출발할 때부터 엄청나게 붐벼 가벼운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버스가 시내 중심부를 빠져나와 남교동 정류장에 닿았다. 버스를 타려 몰려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니 이 좁은 버스 안에 저 숱한 사람들이 다 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조심스럽게 일었다. 그중에 내 동네 친구 옥순이와 유난히 키가 커 보이는 영선이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좁은 버스 안의 시달림이 지겨워도 어느 정도는 면역이 된 듯하여 견딜만 했다. 주홍빛 황혼이 불그레하게 찾아드는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들녘은 서서히 모내기 철이 다가오는지 논배미 구석구석 못자리에는 다 자란 검푸른 볏모들이 바람에 바들바들 흔들리고 있었다.

하루 내 들녘을 누비느라 지쳤나, 물먹은 솜처럼 내려앉으려는 저녁 해의 노을빛이 곱살스레 퍼져 나는 주막집 지붕 위로 저녁 연기가 소옴소옴 피어올랐다. 주막집 앞뜨락엔 저녁녘이면 파란 잎사귀를 제치고 봉곳봉곳 피어나는 깔때기 모양의 분꽃이 소담스레 보였다.

좀 멀리 바라보이는 산릉선으로 살금살금 찾아드는 어둠살에 마음 서운해지려 하면 외진 저 산속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의연히 버텨내는 들풀의 끈질긴 생명력을 빼닮고 싶었다.

스러지는 저녁 해가 저물어가도 슬프지 않았던 어제 같은 오늘이 있었기에 마음 비워 오늘만큼의 내일을 기약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애를 써 찾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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