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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11 조회 : 1,369




빈곤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날 수 없어 어렵기 그지없던 그 시절에 벽시계는 둘째치고 손목에 걸친 시계 하나 없이 살았다. 그런 탓에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낮에는 해의 움직이는 방향과 햇볕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의 위치와 길이를 살펴 시간을 알려고 했다. 그리고 달과 별의 뜨고 짐에 따라 변하는 주위를 살펴보며 시간을 가늠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밤에는 무거운 정적(靜寂)을 깨트리며 달리는 밤 열차의 소리를 들으며 어림짐작으로 밤의 깊이를 재며 살았다.

그래도 짜득짜득 들러붙은 가난이 지겨워 이따금씩 투덜거렸을 뿐,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살았다. 문명의 이기로 개화된 바깥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리 살았던 우리네 모습이 무척이나 갑갑하게 보였을지라도 어려서부터 배워 온 그대로 큰 변화를 원치 않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려고 했다.

머리맡 산만댕이에 해가 떠오르면 논과 밭을 알뜰히 가꿔 주어진 몫을 다하려 애를 쓰며 살아 온 순박한 우리네 삶은 나뭇가지 흔들림에 바람의 세고 여림을 피부로 느끼고 나뭇잎 색깔의 변함에 따라 계절의 흐름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루의 흐름에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미덕(美德)이 그래도 그 시절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부질없는 세속 흐트러진 속내를 꿰뚫어 헤아려 보려는 듯 저녁샛별 하나가 면 소재지 교회 십자가 위에 초롱초롱 떠 있었다. 앞 들녘 논배미에선 밤을 지새워 울려나 어설프게 박자 맞추려 하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쉴 사이 없이 귀에 따갑게 들려왔다.

그 틈 사이 뒷산 소쩍새는 아린 마음만큼이나 목을 꺾어 피를 토하듯 그리도 애끓게 울어댔다. 남몰래 가슴 깊이 숨겨둔 애틋한 선약이라도 있었는가? 줄기에 나팔 모양의 꽃봉우리를 촘촘히 매달고 뉘 모를 풀숲에서 곱게 피어나는 청 초롱은 남보라 빛 초롱을 서두름 없이 은은하게 밝히려 했다.

미끈하고 맵시 있게 보이려 허리춤을 바짝 조여 만든 새하얀 하복 저고리 앞가슴 부분이 조금 봉곳하게 보이는 듯한 옥순이가 입을 열었다.

“야, 상민아 오늘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정임이를 만났는데, 석란이네 아버지가 순사 생활 그만두었다고 하더라.”

작은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응 그래? 그럼 여기로 다시 이사를 올지도 모르겄네?”
“그건 나도 알 수 없고, 석란이네 아버지가 지서장 자리를 그만뒀다는 그 말만 하던데.”

전에는 석란이에 대하여 그렇게 무감각했던 내가 조금은 관심을 두는 것이 옥순이 눈에는 조금 이상하게 보였는지 고개를 가볍게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자꾸만 아래로 처지는 책가방이 힘에 겨운가 손을 번갈아 바꿔 가며 거무스레 어둠이 짙어 가는 벼랑바위 앞을 지나 다박다박 동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카시아 나무가 하얀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어슷하게 뿌리를 박고 서 있는 언덕배기에 새치름히 떠오른 달이 흐릿하기만 했다.

어둠살이 가려 놓은 저 산릉선이 하늘과 맞닿아 하나의 선을 이룬 듯해 보여도 가까이 다가서 보면 선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눈앞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 달 또한 잠시 구름 속에 몸을 가렸을 뿐 아주 형체를 지운 것은 아니기에 눈앞에 확연하게 보이고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것에 크게 연연할 일은 아닌 것만 같았다.

존재치 않음은 존재를 위한 준비 과정인 듯싶었다. 세상사 모두가 있고 없음을 반복하니 이 모두가 정연한 자연의 이치인 듯싶었다.

초저녁 이슬에 젖은 황토 냄새가 물씬 배어나는 호젓한 오솔길에 꼬리 끝이 뾰족한 가녀린 달이 산골 밤하늘의 무거움을 홀로 지고 가려 하니 조금은 더 어울려 놀고 싶은 듯 구름이 앞을 가로막아 붙잡아 두려했다.

추녀 끝이 짧은 초가집 작은 봉창문 틈새로 새어 나오는 흐릿한 호롱 불빛이 마음을 차분하게 추스려 주었다.

우묵 파인 계곡 검츠레한 바위를 에둘러 싸고 피어난 찔레나무에서 싱그런 내음을 은근스레 풍기는 하얀 꽃 무더기가 소복(素服)을 한 여인네의 단아(端雅)한 모습처럼 달빛 아래 더욱 소박(素朴)하게만 보였다.

점점 짙어지는 어둠 속에 의뭉하게 웅쿠려 있는 텃밭 돌무더기에 봄가뭄에 지쳐 힘겹게 보이는 돌감나무 나뭇가지에 매달린 진초록 감들이 흐미하게 보였다. 가지에 매달린 감들이 지난해보다는 그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래도 작은 열매를 실하게 맺고 저렇듯 밤이슬에 젖어가며 정성껏 키우고 있는 과묵한 모습이 어둠 사이로 거무틱하게 바라보였다. 이제 햇살 듬뿍 받아 단비에 갈증을 풀고 빨간 알알이 탐스럽게 익어갈 날이 은연중(隱然中)에 기다려졌다.

희뿌옇게 변한 밤하늘에 별빛 몇 개 총총한데 구물구물 흘러가는 구름 덩이가 조금은 답답하게 보였다. 몸속 깊이 담아 놓았던 숱한 말들을 입 안에 가득 담고 맑은 물에 헹구어 아가미로 걸러내는 물고기처럼 일그러진 아픔들의 찌꺼기를 달빛이 어려 오는 저 푸른 허공에 투명하게 내뱉고 싶었다.

온 사방이 보일 듯 말 듯 어물어물하게 어둠 짙어가니 혼자서 걸어가는 밤길이 조금은 오솔하기도 했다. 그래서 멋쩍게 혼자만의 소리를 내어 보아도 그때뿐 온몸을 싸고도는 깊어가는 밤의 적적함은 좀처럼 떠날 줄 몰랐다.

여름 밤을 재촉이나 하는 듯 너른 들녘 논배미에서 청승맞게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한층 더 요란스럽게 들렸다

야트막한 둔덕을 넘어서려는데 ‘상민아!’하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레이는 기쁨과 포근한 안도감에 허겁지겁 달려갔다. 솟아난 돌부리에 발끝이 걸려 아픔에 발가락이 저려도 마음은 이미 어머니의 구겨진 치맛자락에 매달려 있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밤이슬에 오롯하게 잎을 펼친 머위 이파리들이 다북다북한 집모퉁이에 순덕이를 등에 업으신 어머니 모습이 좁다란 방문을 헤집고 새어 나오는 불빛에 어슴푸레하게 보이니 정겨움에 가슴 뭉클거리고 어느새 쏜쌀같이 달려와 다리 가랑이에 몸을 부벼 들러붙으려는 검둥이가 천연덕스럽게만 보이니 이 모든 꾸밈없는 것이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해주는 기쁨에 원천(源泉)이 되었다.

지붕 위에 솔가지를 얼기설기 올려놓고 볏짚으로 사방 벽을 촘촘하게 두른 허스름한 뒷간 모퉁이 구름 사이 얼굴 내민 달빛에 희뜩희뜩 비치는 포리똥(보리수)나무에 연한 회색빛 이파리 사이로 시큼하고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고 나무 밑에는 검둥이가 어렸을 적 그리도 온 마당을 시끄럽게 굴리고 다니던 깡통이 버려진 채 세월이 지난 만큼 검붉게 녹이 슬어 있었다.

낮은 싸리 울타리 앞에는 무릎 밑에 닿을 만큼 자란 싱그러운 초록빛 향일성(向日性)해바라기가 땅바닥에 납짝 엎딘 채송화 틈사이로 뾰조름이 줄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세월의 때가 촘촘하게 배어나 반들거리는 쪽마루 기둥에는 순덕이 어머니가 산에 오르실 때 어깨에 메고 다니시는 볏짚 꼴망태가 군데군데 황토에 묻어 끝을 뾰족하게 갈아 놓은 호미와 함께 걸려 있었다.

뿌연 등잔 불빛이 새어 나오는 부엌에서는 순덕이 어머니가 된장찌개를 덥히는 듯하여 학교에서 내가 돌아오면 같이 저녁을 먹으려 기다리고 계셨던 듯했다.

쪽마루 안쪽 쭈그렁 바가지 안엔 쌀겨에 양잿물을 섞어 만든 검정 빨랫비누가 덩그러니 담겨 있고 마루엔 낮에 산에서 캐 오신 듯 도라지 뿌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어머니가 읍내 생선전에서 골라 오신 조기 모습을 그리도 빼닮은 손바닥만한 황세기(황강달이) 몇 마리에 풋마늘 잎을 듬성듬성 썰어 넣고 간을 맞춰 잘 끓여 놓은 찌개에 헤실헤실한 보리밥이라도 온 식구들이 머릴 맞대고 숟가락 소리를 내니 비록 허전한 산골짝이지만 삶의 정이 뜨겁게 묻어나는 열기가 가득 차오르기만 했다.

얼마 전 둔덕마루에 올라섰을 때 동네 안 골목길에 동네 사람들의 발걸음이 조금은 분주해 보여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조금은 궁금했는데 수저로 밥을 뜨시던 어머니께서 말씀 하셨다.

“종기네 할머니가 저녁나절에 세상 뜨신 모양인데 사람 도리상 한번 들여다봐야 될 것 같구나 그나저나 종기 에미 그 여편네 올 시한내 노인네 병수발하느라 면 소재지 한약방으로 탕약을 지으러 발 부르트게 다니고 냇가 찬물에 손 담그면서 똥빨래 허느라 그 모진 고생 다하더니 기어코 세상 뜨고 말았구먼 그려 노인네사 그 나이 만큼 살고 눈감었으닌께 더 이상 원도 한도 없을 거니 호상이지 뭐 그 집 사는 형편이 그래도 넉넉하여 뒷산 밭 자락에 묏자리 팔 데라도 있으니 크게 걱정할 것도 없건네 에휴! 때 되면 저렇게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북망산천(北邙山川) 길로 가는 건데.”

무릇 속절없는 삶이 허무하신 듯한 표정으로 어둑어둑한 방 벽 봉창 위턱에 걸린 아버지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다 차오르는 감정을 누르시려는 듯 밥상 옆에 놓인 물그릇을 손에 드시고 벌컥벌컥 마시고 계셔 어린 마음에 갑자기 숙연해지는 방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서둘러 말을 했다.

“엄니! 전에 지서장으로 있던 그 키 큰 양반 알지? 그 양반이 순사노릇 그만두었다고 하데.”

조금이라도 딱딱한 얼굴 표정이 누그러지길 은연중에 마음속으로 바라며 어머니의 얼굴을 살피자 어머니께서 별다른 표정이 없이 오히려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세상이 변했으닌께 그 사람도 자기 갈 길 찾느라 그러는가 보구나 그놈에 순사 직업이라는 게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라 그리 탐탁한 것은 아니닌께 그놈에 지긋지긋한 난리를 겪으면서 그 새중간에 사람들하고 얽히고설켜 좋게 나쁘게 저질러 놓은 일들이 마음에 찝찝하게 걸리고 나이는 들어가니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그만뒀나 보구먼 그려.”

형체가 부스러지지 않은 황세기 한 마리를 찌개 냄비에서 꺼내 흐릿한 등잔불에 바짝 들이대고 조심스레 가시를 발라 살코기를 순덕이 입에 넣어 주시고 작은 입을 벌려 받아먹는 모습이 그리도 귀엽던지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 계셨다.

발을 더듬거려 흐린 달빛에 어림짐작으로 고무신을 구겨 신고 앞뜨락에 내려서니 비릿한 풀 내음 한가득 담긴 밤바람이 갈참나무 늘어선 산마루턱에서 불어왔다.

방죽가 높다란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초상집 마당에 등을 달아 놓았나, 마을 지붕 머리 틈 사이 가물가물 불빛들이 보이니 흙냄새 자근자근 맡으며 태어나 온몸에 흙을 묻혀 그 속에서 기뻐 노래하며 웃었고 때론 시린 무르팍 움켜쥐고 남모르게 뒤돌아 아파하며 울었으니 주어진 만큼의 삶의 여정(旅程)에 마침표를 남기고 하나둘씩 앞 산자락에 흙으로 되돌아가는 듯싶어 가슴속 끈끈하게 파고드는 허전함을 달래 보려 머릴 들어 광활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 심사(心思) 아는지 모르는지 송송하게 돋아난 별무리 한 자락이 찬연(燦然)스레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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