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 끝머리 목포에서 머나먼 서울까지 국토(國土)를 거슬러 올라 줄기차게 이어진 철로길이 호남선이다.
그 철로길의 중심축(中心軸)에서 용도(用途)에 따라 이리저리 분리되는 선로들이 여러 갈래로 늘어선 강경역 구내의 모습이 다소 번잡스럽게 보였다. 역 구내로 진입하려는 열차의 선로를 개폐(開閉)시키려나, ‘타다다다당,타다다다당’ 묵직한 쇳덩이가 연쇄적으로 서로 부딪는 소리가 소름이 돋아나도록 크게 들려와 역사 쪽을 바라보았다.
『1345 열차 채운역 발차, 1642 열차 당역 대피.』 라는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역 구내 안팎으로 울려 퍼졌다.
그때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연결하는 접점 용안역을 경유하여 서울로 가는 증기기관차 비들기호 완행열차가 뭉클뭉클 검은 연기를 하늘로 내뿜으며 채운산 산기슭을 끼고 돌아 강경역에 안착을 하려나, 남서쪽 외곽 철제 시그널 앞에 다다르고 있었다.
강경 역으로 진입하려는 열차는 남녘 끝머리 역인 목포역을 출발하여 중간 깃점인 대전역을 경유하여 종착역 서울역까지 운행하는 완행열차였다. 종착역인 서을에 도착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무려 10시간 넘게 걸렸다. 그리고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역이라고 생긴 곳은 하나도 빠트림 없이 쉬어 가는 정말 짜증이 날 정도로 느려 터진 열차였다.
느림보 완행열차가 느릿느릿 역사로 진입을 하려고 하니 성구네 아버지가 불편한 몸으로 깃발을 흔드셨다. ‘땡땡땡땡땡땡땡땡’ 조금은 길게 울리는 경보음과 함께 빨간 신호등이 깜빡깜빡 눈빛으로 말을 대신하는 건널목을 열차가 잽싸게 통과했다.
그리고 앞쪽에서 채운역을 출발하여 마주 바라보고 달려오는 화물열차를 피하려고 간선(幹線)에서 갈라지는 이선(異線) 철길을 따라 우측 홈으로 들어와 서서히 정차를 했다. 열차에서 내리고 오르는 손님들의 모습이 플랫폼에 띄엄띄엄 보여 역구내가 왠지 모르게 허전해 보였다.
그러자 역 구내에 있는 스피커에서 약간 코가 막힌 듯한 애교 섞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경 강경 여기는 강경역입니다. 여행하시는 승객 여러분 장거리 여행에 얼마나 피곤하시겠습니까? 열차에서 내리시는 손님은 차내에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살펴 내려주시고, 위험한 철길을 건너지 마시고 지정된 통로를 통하여 안전한 집찰구(集札口)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연무대 방면으로 여행하실 손님은 당 역에서 13시 30분에 출발하는 연무대행 열차가 있사오니 일단 대합실로 나와 다시 갈아타주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그 시각쯤에 멀리 시발역인 서울역을 출발하여 웬만큼 큰 역이 아닌 시골 작은 역은 그냥 무정차로 통과하여 남녘으로 쉴 새 없이 질주하는 화물열차가 강경천 철교를 건너 기적소리를 한차례 힘차게 울렸다.
그렇게 안내 방송 소리가 흘러나와 옆에 같이 걸어가던 성구를 향해 말을 했다.
“성구야 누군지는 몰라두 정말루 방송 되게 잘한다. 목소리도 곱구.”
그러자 성구가 피식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말을 했다.
“야, 상민아! 너도 가만히 생각을 혀 봐라. 글쎄 저 곰보딱지가 밥숟가락만 빼면 마이크에 대고 하루 종일 저 소리만 시끄럽게 매일같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반복하는디 저 정도도 못하면 나가 죽으야지, 안 그러냐?”
성구가 내 생각과는 달리 별로 큰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지나 내나 명색이 철도 유공 공무원 자녀라고 뭐 별스럽게 자랑할 것도 없는 처지에 어찌됐던간에 자기 아버지 목숨하고 바꿔서 얻은 직장인데 그 정도 공 안 들이고 되것냐? 얼굴이 박박 얽어서 그 나이가 되도록 어디 마땅한데 시집도 못 가고 있은께, 그거라도 하고 살아야지.”
성구와는 별개인 남에 일인데도 성구가 관심이 그리 가는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언젠가 역전으로 함께 걸어갔을 때 흘러나오는 방송 소리를 들으며 성구가 스치는 말로 들려준 것이 문득 떠올랐다.
역에서 방송을 하는 여자가 아직 처녀인데 어려서 천연두를 심하게 알았는지 여자의 외적 생명인 얼굴 모습을 잃었다. 그래서 혼기를 휠씬 넘긴 채 노모님을 모시고 철도 관사에 기거(起居)를 하며 살았다. 그리고 임시직인 방송 요원으로 역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 사람 살아가는 곳이 어디인들 그렇치 않으랴만은 철로에 종사를 하며 일생을 바쳐 살아가는 철도 공무원들과 그 가족들의 애환을 작게라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침 햇살에 가만가만 달궈지는 포플러 나뭇잎 사이를 뚫고 ‘맴맴맴맴’ 여름의 상징인 매미의 울음소리가 여름의 시작을 알리 듯 나무숲 어딘가 한두 군데에서 들려왔다. 어찌 보면 짧기만 한 여름 한철을 보내려고 칠흑같이 깊고 어두운 땅밑에서 일곱 해를 꼬박 기다려 모진 여름 더위 마다 않고 찾아준 매미가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학교를 향해 걸어가던 성구가 잠시 뒤를 돌아 자기 아버지 모습을 보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지난날 두 다리에 목발을 짚고 동네 고샅길로 나서는 내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이 그도 싫어 짜증을 부렸던 그런 아픈 기억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성구야, 너하고 나하고는 못할 말 없는 친구지간이닌께 내가 하는 말 오해를 하지 말고 들어 봐. 먼젓번에 내가 너한테 얘기를 했지만 그때 나도 너처럼 그런 모습의 우리 아버지가 그리도 싫었고 남들 보기에 무척이나 부끄러웠지만 막상 아버지께서 돌아가셔 이 세상에 안 계시고 나닌게 얼매나 가슴이 쓰리고 아팠는지 몰라. 그저 먼 산만 바라봐도 눈에 눈물이 고이고 저녁 해 떨어질 때는 마음이 무지하게 아파 남몰래 눈물을 얼매나 흘렸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그러닌께 그러지 말어. 지금은 그렇지만 막상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가슴 치며 후회한들 다 소용없으닌께 아버지에게 잘해 드려라. 그래도 넌 그런 아버지라도 계시닌께 을매나 좋냐? 안 그려?”
성구의 얼굴을 바라보자 성구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을 했다.
“니가 말 안 해도 나도 그런 건 알어. 그런디 아무리 참을라고 해도 건널목을 오고 가는 사람들이 불쌍한 눈으로 우리 아버지를 바라보면 그냥 달려들어 사람들의 얼굴을 한 대 후려갈겨 주고만 싶어지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서 그런 거야. 나도 우리 아버지 불쌍하고 저렇게 고생하는 거 다 알어. 그래서 돈 없어서 비싼 보약은 못해 드려도 사람들이 염소가 하두 좋다고 말들을 해서 빈 병 하나라도 더 모아 목돈 만들어 가지고 사방간데 풀은 많으닌께 염소 새끼 한 마리 사서 잘 키워 가지고 늦가을에 보약해 드릴려고 마음먹었어. 그래서 지난번 장날에 산양동 산 밑 화장터 옆에 사시는 염소 파는 아저씨한테 부탁을 해 놓았는디 기별이 와서 오늘 학교 끝나고 나면 염소를 몰고 올라고 해. 야! 참 상민아. 너도 학교 끝나고 나랑 같이 빨랑 댕겨 오자. 그리고 염소 몰고 와서 너랑 나랑 역전 중국집에 가서 내가 사줄 테닌께 짜장면이나 한 그릇씩 먹자.”
성구가 나에게 자랑이나 하려는 듯 염소를 살 돈이 들어 있는 듯한 아랫바지 주머니 입구를커다란 옷핀으로 단단하게 꽂아 놓은 두툼한 곳을 가리켰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수더분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동안 나처럼 깊은 생각 없는 철부지로만 보였던 성구의 깊은 효심에 무릇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통학 버스를 놓치고 밤중에 십여 리 길을 걸어서 집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같이 가고만 싶었다.
그리고 지난날 내가 내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그토록 싫어했던 그 불효에 대한 죄를 조금이라도 씻을 수만 있다면 하고 나 혼자 속마음으로 무한(無限)한 후회를 하여 보았다.
호남선 철로 따라 이어진 앞 들녘에서는 애태워 생각하는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논 자락에서 그 누가 부르고 있는지 삶에 찌든 민초들 저마다의 애환을 해학적으로 담은 육자배기 노랫소리가 구성지게 들려왔다.
그해 유난스레 긴 봄가뭄으로 학교 앞 연못에 물이 적어 부유물이 떠 있어 물빛이 혼탁하게 보였다. 연못에 떠 있는 수련의 이파리 사이로 물이 부글거려 물을 가두어 키우는 등이 검은 잉어와 붕어들이 숨이 좀 가쁜지 주둥이를 물위로 내밀어 벌름거렸다.
시커먼 진흙 속에서도 한 떨기 우아하고 탐스런 빛을 은은하게 내비치는 수련의 자태가 잔 잔한 감흥을 주어 발길을 잠시 멈추게 했다. 소담스런 수련을 바치고 있는 널따란 연잎 위에는 청개구리들이 단작스럽게 붙어 있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짝짓기를 하려나, 암놈의 꼬리 끝에 집요하게 달라붙으려 하는 수놈 실잠자리가 부산하게 날개를 떨며 들러붙으려 했다.
길가 숲에는 연못 갈잎 사이를 헤집고 나오려던 등 모양이 직사각형인 갈게 몇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사방으로 흐트러져 빨리 도망을 치고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엔 빛깔 고우며 꼬리가 짧고 부리가 뾰족하게 긴 물총새 한 마리가 머릴 갸웃거리며 재잘스럽게 울어댔다.
이따금 솔솔 불아오는 솔바람에 책상 위에 놓인 책장이 ‘토르륵토르륵’소릴 내며 재빠르게 넘겨지고 있었다.
교실 한쪽에서는 자기 아버지가 읍내 극장 간판 그림을 그린다는 효수가 커다랗게 원색으로 인쇄된 극장 포스터 한 장을 들고 와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자랑을 하여 바라보았다. 그때 당시 좀 유명했던 영화 ‘오발탄’ 의 그림이었다.
읍내에서 제일 큰 약방을 하는 병선이가 둥근 병에 들어 있는 노란 알약 원기소를 가지고 자랑을 하며 성구에게는 서너 알 정도를 주고 나는 아직도 낯이 설어 그런지? 한 알도 주지 않았다. 작은 것 하나에 차별을 받아야 하는 생각에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악대부에서 트럼펫 부는 운철이가 열심히 악보를 보고 있어 조금은 멋지게도 보였다.
활기찬 하루의 일과 시작을 알리려 교무실에서 치는 종소리에 따라 아침 조회 시간이 되자 담임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번 농번기를 맞이하여 내일부터 4일간 농번기 방학을 실시할 것이니 각자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을 열심히 도와드리기 바란다.”
그러자 학교 창고 옆 악대부 교실 기와지붕 머리에 우루루 몰려와 종일토록 시끄럽게 지저귀는 참새 떼들마냥 발로 마루를 구르고 손뼉을 치며 학교 수업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후련함에 모두들 그리도 좋아라 했다.
말이야 농번기라고는 하지만 읍내 시가지에서 장사를 하는 집 아이들과 공무원인 부모를 둔 아이들은 시골에 있는 친척집에 놀러 간다는 둥 팔자 편한 소리들을 하고 있었다. 시골에 살면서도 척박한 자갈밭 땅 한 평이 없는 나에게는 농번기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자연 속에 묻혀 살 수 있는 균등한 기회마저 잃어버린 아쉬움에 가슴 아파했다.
아침 조회가 끝나고 1교시 수업이 들어가기 전, 성구가 농번기 방학 중에 우리 집에 놀러오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갑작스런 제안에 내가 당황하며 선뜻 대답을 하지 않자 성구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무슨 생각을 하는 듯했다. 속마음으로 내 사는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망설였을 뿐인데 하며, 내가 성구의 사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꿰뚫어 보았듯이 나도 성구를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대로의 내 사는 모습도 보여 줘야 옳다는 생각을 했다. 괜스레 무거워지는 마음에 미안스럽고 시원스레 대답을 할 수 없는 환경이 그저 한없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 무거운 마음으로 오전 수업 마지막 시간인 영어 시간에 ‘의문 대명사’에 대한 문법을 배웠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성구와 함께 도시락을 먹고 나서 늘 성구에게 얻어먹기만 하여 미안스러워 성구를 툭 치고 함께 나왔다. 아침에 어머니가 주신 용돈으로 울타리 너머로 꽈배기를 사서 성구와 같이 나눠먹었다.
그때 ‘나바위’ 성당 쪽 군산 방향 하늘에서 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성구와 함께 쨍쨍한 햇살에 눈이 시려 손으로 이마를 가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초록 국방색(國防色) 칠을 한 경비행기 한 대가 앞머리에 달린 프로펠러를 힘차게 돌리며 학교 지붕 위로 나지막하게 날아오고 있어 교실 창문들이 가볍게 들썩이며 울렸다.
오후로 접어들어 국사 시간이 되었다. 국사 담당 선생님이 입담이 아주 좋으셔 재미있게 가르쳐 주셨다. 마치 가설극장에서 상영한 영화 ‘양산도(陽山道)’를 보았을 때 ‘바야흐로... 그리하여... 그랬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라고, 아주 구성진 목소리를 내던 칫솔같이 짧은 콧수염을 방정맞게 기른 변사(辯士) 아저씨보다 더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하셨다. 그날 조선왕조을 세우는 발판이 된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에 대한 역사 공부를 했다.
염소 새끼를 파시는 아저씨네 집은 학교 앞 채운산 뒷자락에 있는 화장터 둔덕 너머에 있어 읍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조금은 음산하게 느껴지는 산자락 밑에 있는 우묵진 화장터에는 겨우 엽전 한 푼 입에 물고 북망산천(北邙山川) 먼 길을 떠나는 망인(亡人) 한 분을 받았는지 붉은 벽돌 높이 쌓아 올린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하늘가로 흐트러지고 있었다.
밋밋한 야산에 나무막대로 울타리를 쳐 놓았다. 십여 마리의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가 낯이 선 우리들이 나타나자 커다란 눈알이 아주 코믹스럽게 생긴 숫염소 한 마리가 텃세를 부리듯 두 발로 껑충껑충뛰며 ‘메에에메에에’ 소리를 내어 조금은 방정맞게 울었다.
성구가 아래주머니에 꽂힌 옷핀을 풀어 돈을 꺼내 지불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이리저리 살피고 살펴 그중에서 제일 토실토실한 놈으로 골라 목에 줄을 매었다. 얼마 후 성구네 집을 향해 걸어오는데 논산 훈련소의 장병들에게 쌀과 부식을 대주는 부대인 급양대(給養-隊) 앞에 쌀가마니를 가득 실은 군용트럭 예닐곱 대와 보급 수령을 선도하는 헌병 순찰차가 보였다.
그리고 차량을 인도 할 헌병이 저녁 햇살을 온통 받아 번질번질하게 광이 나는 검정색 화이버(Fiber)를 눈이 가리도록 멋스럽게 앞쪽으로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더불어 하얀 실을 모아 곱게 꼰 견장을 양쪽 어깨에 두르고 번쩍번쩍하게 닦은 버클이 눈이 시도록 빛을 발했다. 또한 아랫바지에 주름을 칼날처럼 잡은 군복에 구두 앞 코빼기에 광을 잘 내어 어쩌다 파리가 앉으려 하면 낙상할 정도로 잘 닦은 군화를 신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허리춤 가죽 케이스 안에 권총을 차고 차에 오르려는 헌병 하사관의 절도 있는 모습에 성구가 한껏 매료된 듯 정신을 놓고 보다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저도 나중에 커서 군대를 가면 꼭 헌병이 되겠다고 했다.
염소를 끌고 관사로 돌아와 성구 아버지가 앉아 계신 건널목 아래 철로 둑에 염소를 단단히 매어 놓았다.
그리고 역전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곱배기를 둘이서 배가 터지도록 먹고 책가방을 가지러 성구네 집으로 돌아오는데 ‘야! 꺼꾸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니 간장 공장에서 퇴근을 해서 집으로 돌아 오던 성자 누나가 우리를 보고 하는 말 같아 얼른 고개를 뒤로 돌려 성자누나를 바라보았다.
‘야! 꺼꾸라. 너는 어쩔라구 그 따위 염소는 뭣 땀시 사 오고 그러냐? 온 사방간데 찌린내 나고 똥 싸면 누구 귀찮게 할려구 그러냐?’ 하며 조금은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을 하여 함께 움직인 죄로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그리고 처음에는 성자 누나가 왜 성구를 그렇게 부를까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성구가 태어날 때 꺼꾸로 나오느라고 오랜 시간을 오래 끌어 자기 어머니가 난산으로 출혈을 심하게 하셔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런 뼈아픈 사연 속에 태어난 성구를 식구들은 꺼꾸리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뻘쭘 선 나무 전봇대가 오후 한나절이 지루했던지 기지개를 켜는 역전 앞마당으로 걸어왔다. 성구가 도복을 옆구리에 끼고 도장에 가려고 골목길로 모습을 감췄다.
농번기 방학에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다는 성구의 부탁을 못 들어준 것이 온종일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성구를 그렇게라도 한번 웃겨 주려고 ‘야! 꺼꾸라.’ 하고 불렀다. 그러자 성구가 얼른 뒤를 돌아보며 ‘너 죽인다.’ 하면서 주먹을 쥐고 웃어 나도 함께 따라 웃었다.
시내 중심부를 향해 반듯하게 트인 큰길을 따라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려니 서산마루에 걸터앉으려 하는 저녁 해가 나름대로 하루의 여흔(餘痕)을 곱살하게 남기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