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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31 조회 : 1,270




한 사나흘 동안 온 주위가 어둠침침하게 그리도 퍼붓던 장맛비가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려는 것 같았다.
그런 탓인지 새벽녘 봉창문 밖에 내리는 빗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 뿌연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여 답답하기 짝이 없는 아침 녘엔 가느다란 빗발이 눈에 보일 듯 말 듯 질금질금 뿌리다 이내 그마저도 멈추고 말았다.

비가 멈춘 후라 더욱 그런지 시야에 들어오는 앞산 자락의 숲과 나뭇잎들이 검푸른 빛을 띄우고 있는 모습들이 연연(娟娟)하게 보였다.

비가 멈춘 너른 들녘으로 어린 새끼들 먹잇감을 구하러 나가려는지 이른 아침부터 추녀 밑 둥지에서 제비들이 제법 시끄럽게 재잘거렸다. 질퍽질퍽한 똥을 쪽마루 두서너 곳에 지저분하게 떨어트리며 그리도 소란스레 짖어대던 어미 제비가 원행에 앞서 심호흡을 하듯 마당 빨랫줄에 가볍게 내려앉아 머릴 들어 날아갈 방향을 정하려는 것 같았다.

빗물에 촉촉하게 젖어 더 한층 파릇파릇하게 보이는 넓은 앞 들녘엔 희뿌연 비안개가 나부작하게 떠돌고 있었다. 그 사이로 논배미 물자리를 살펴보는 농부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눈에 띄어 생동감 있게 보였다.

산 밑에 바싹 달라붙어 있는 계단식 밭에는 동네 사람들이 온 사방간데로 흩어져 너나 할 것 없이 벼농사 못지 않게 겨울 식량으로 듬직하게 한 몫을 하는 고구마 순을 서둘러 심고 있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내리는 비의 양에 따라 불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했다. 비가 멈춰 냇물이 눈에 띄게 줄어들자 한동안 물속에 잠겼던 징검돌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지런하신 순아네 할아버지는 냇둑 개망초 꽃 사이로 몸을 굽혀 쇠꼴을 베고 있었다. 누에에게 줄 뽕잎을 따러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오시는 영호네 어머니가 댓가지로 엮어 만든 광주리를 손에 드시고 둔덕 너머 콩밭 가장자리에 줄서 있는 뽕나무들을 바라보시며 잰걸음을 하셨다.

원두막 수박 밭에는 동근이 아버지가 빗물에 밭고랑으로 내려온 수박 넝쿨을 조심스레 밭두렁 위로 들어 올려주고 있었다. 작은 만큼 똘박하게 보이는 텃밭에는 장맛비에 잘 견뎌내라고 대나무로 세워놓은 지짓대에 줄기를 붙들어 맨 탱글탱글한 토마토가 불그레한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께서는 순덕이에게 주시려는지 잘 익은 것으로 두세 개를 골라 따시고 조금씩 기울어진 듯한 오이 줄기와 고춧대를 바로 세워주고 있었다,

사립짝 안으로 들어서니 군데군데 움쑥움쑥하게 파인 마당이 왠지 너저분하게 보였다. 뒷간 두엄자리엔 지렁이들이 꾸무럭꾸무럭 몸을 돌돌 말았다 폈다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 지렁이를 그리 빨리 보았는지 누런 지시랑물(낙숫물) 또랑또랑 떨어지는 추녀 끝 안으로 바짝 들어서 있던 누런 암탉들이 둔한 날갯짓으로 퍼덕거리며 달려와 부리로 잽싸게 쪼아 목젖을 꿈틀거려 꿀꺽꿀꺽 삼키자 뒤따라 달려 온 놈들이 먹이를 놓친 아쉬운 눈빛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토방 위에서 늘쩡거리던 검둥이는 축축한 땅 위를 폴짝폴짝 뛰어 재빨리 달아나는 청개구리 한 마리를 보고 새퉁맞게 달려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무엇인가 감지(感知)해 보려는 듯 어벌쩡하게 앞발을 가볍게 들어 건드리려 했다. 후들쩍 놀란 청개구리가 폴짝폴짝 뛰어 울타리 밑 풀숲으로 잽싸게 몸을 감췄다 그러자 뻘쭘한 모습으로 한두 번쯤 울 밑을 싱겁게 바라보았다.

좁은 부엌에는 불땀 좋아 벌겋게 달아오르는 아궁이 앞에 부지깽이를 들고 계신 순덕이 어머니와 제 딴에는 무엇이라고 말을 하고 싶은지 자꾸만 지껄이는 순덕이가 다정스레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훈훈하여 잊혀졌던 기억 하나 새롯하게 떠올랐다.

지난 국민학교 4학년 그해 늦가을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어머니에게 재롱을 떨다 보면 둥그런 가마솥에 밥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솥뚜껑이 들썩거렸고 솥 가장자리로 거품 속에 허연 김이 힘차게 '푸푸' 소릴 내면 나는 어머니에게 말을 했다.

" 엄니! 우리 집 솥단지가 빽빽이 기차 달리는 것처럼 김을 팍팍 내고 있네 "

내 말소리에 어머니는 그저 빙긋이 웃으시며 내가 하는 말을 받아주셨다.

" 그러냐? 아이구 나는 정말루 몰랐는디 우리 새끼가 갈켜 줘서 인제서야 알았네 그려, 근디 그런 걸 누구헌티서 배웠냐? "

다 알고 계시면서도 시침을 뚝 떼시고 사물의 원리에 대하여 하나하나씩 깨우쳐 가는 자식의 모습이 그리도 대견스러운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 리고 가마솥에서 구수한 냄새가 솔솔 날 때는 솥뚜겅을 열고 밥을 푸신 후 노란 달챙이(모지랑숟가락)으로 솥 바닥을 닥닥 긁어 누룽지를 두 손으로 꼭꼭 뭉쳐 주셨다. 그렇듯 애틋한 모정은 세상 그 모두를 버려 한 치의 남김없이 자식에게 베풀어 주고도 조금 더 못해주는 안타까움에 바둥대는 깊은 심속은 늘 자아 희생적인 삶을 이어 가는 듯했다.

다른 날에 비해 서두를 일이 그리 많지 않은 공휴일이었다. 시간에 쫓겨 반복되던 각박한 생활에서 잠시인들 벗어나 모처럼 만에 가질 수 있는 시간의 여유로움이 오붓하기만 했다.

검푸른 소나무들이 앞 다퉈 다북하게 들어차고 푸른 잔디가 소곳소곳 돋아난 면 소재지로 향하는 야트막한 고개 너머로 희뿌연 구름 아래 십자가 끝머리 겨우 보였다. 교회에서 '댕가당댕가당,댕가당댕가당''주일을 알리는 갱연한 종소리가 더욱 살갑게 들려왔다.

논배미들 중에서 유난스레 가뭄을 절실하게 탔던 산 밑 계단식 다랑논에도 물이 잘름잘름하니 그토록 조였던 가슴을 쓸어내려 이제는 한시름 덜은 듯싶었다. 지대가 낮은 앞 들녘 논들은 오히려 논둔덕까지 물이 차올라 논물의 수위을 조절해야 할 정도로 배부른 여유로움이 생겨났다.

장맛비에 논물이 불어나자 농부들 못지않게 살판난 것이 개구리들인 것 같았다. 벌건 대낮부터 논구뎅이에서 목청을 돋우어 저마다 소리를 내다 논둑을 걷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면 미리 약속을 한 것처럼 숨을 죽여 다시금 조용해지기만 했다.

그리 촐싹거리는 개구리들을 잡으려나 황새 두어 마리가 마치 논임자처럼 긴 목을 쑥 빼어 내밀고 둘레둘레 살펴 길어 가느다란 다리를 벼 포기 사이사이로 건듯건듯 옮겼다.

그러자 겨우 자릴 잡아 뿌리를 내리려 하는 어린 벼들이 다칠까 봐 논둔덕에서 물꼬를 살피고 있던 상수네 아버지가 황새를 쫓으시려나 흙을 한 움큼 손에 쥐고 황새를 향해 냅다 던지면서 '훠이'하고 소리를 쳐도 좀처럼 달아나질 않았다. 그러자 손뼉을 세차게 치시며 다시금 소리를 크게 지르시자 그제서야 커다란 날개를 푸덕이며 눈치를 실실 보는 듯 느긋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좁다란 도랑이 터져 나가도록 세찬 물소리를 내며 시원스레 흘러가는 도랑가를 지났다. 비에 젖은 나뭇잎들이 한줌 햇살을 애태워 기다리며 서둘러 몸을 추스리고 있는 언덕배기에 오르니 하늘에 영롱한 빛깔이 탐스럽게 보이는 일곱 빛깔 무지개가 면 소재지로 가는 언덕마루 다보록한 소나무 위로 찬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랫마을로 물을 길러 가던 발길을 멈추고 투명하게 곱살한 빛에 나 자신도 모르게 매료되어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또다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국민학교를 갓 입학했을 때였다. 어머니께서는 받아쓰기를 한 공책 위에 담임 선생님이 빨간 색연필로 둥그렇게 돌리고 돌려 그어주신 동그라미가 그리도 좋으셨는지 남보다 뒤지지 않게 글자를 가르치시려고 개다리밥상 위에 1학년 국어 교과서와 누런색 종이의 공책을 펼쳐 놓고'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나하고 놀자, 철수야 철수야 너도 같이 나하고 놀자.' 라며 회초리로 글씨 한 자 한 자를 짚으시는 어머니를 따라 몇 차례 반복하여 읽고 나면 금새 싫증이 났다. 밥상 위에 몸을 구부려 공책의 네모난 공간 안에 꽉 차도록 반듯하게 글씨를 쓰라고 치근대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소리를 치셨다.

" 야! 상민아 저기 좀 봐라 하늘 바탕에 무지개가 떠 버렸다. 아따! 참 곱기두 하지 어쩌면 저리두 간조론허게 고울 수가 있을까?"

" 엄니! 어디에 떴는디? "

내가 더 호들갑을 떨며 자꾸만 주입식으로 반복되는 공부가 지루하게만 느껴지져 핑계거리가 없었는데 이때다 싶어 얼른 고무신을 끌고 마당으로 나섰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면 영롱한 빛깔의 무지개가 마음에 한껏 와 닿았다. 지루한 공부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꿍꿍이속으로 급히 오줌을 누러 사립짝 밖으로 나가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동네 아이들이 놀고 있는 언덕배기로 후다닥 달아나면 어머니는 어이가 없으신 듯 싸리 울타리로 바짝 다가서시며 큰소릴 치셨다.

" 어머나! 저 우라질 놈 좀 봐, 금새 고망쥐처럼 꼬랑지두 안 보이구 훌딱 도망 가버렸네, 그려, 상민아, 너 언능 와서 하던 공부 마저 안 할래,
너 그렇게 말 안 들어 먹으면 밥두 안 주구 쫄쫄 굶길테닌게 그리 알어라 "

어머니께서 못 이기시는 척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시면 나는 작은 입 사이로 혀를 조금 내밀며 삐죽거려 웃었다.

산 너머 논산역을 출발한 완행열차의 기적소리가 어슴푸레하게 들려오는 철로가 기현이네 집에서는 기현이 할아버지가 사람 몸에 약을 하면 아주 좋다고 자랑을 하시던 온몸이 새까맣게 생긴 오골계라는 닭 두 마리를 마당에 풀어헤쳐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 아끼는 보릿쌀 한 주먹을 큰맘 먹고 뿌려 주어 부리로 쪼아 먹고 있는 닭들의 모습을 기대찬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흥남이 아저씨가 읍내 논산 장날에 강아지를 사 오신 것이 불과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그렇게나 커서 가당치도 않게 텃세를 부리려 했다. 놀고 먹는 팔자에 주인 보기 미안해서 이번참에 제대로 밥값이라도 하려나 탱자나무 울타리 길을 걸어가는 나를 향해 설익은 사나움을 부려 제법 큰소리로 캉캉 짖으며 깝죽거렸다.

그리 짖어대며 집을 지키려 하는 모습이 기특하게 보이는지 마당 텃밭에 자라난 풀을 뽑으시던 흥남이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물지게를 지고 있는 나와 우라지게 짖어대는 흰둥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웃고 계셨다.

그래서 한없이 얄미워지는 흰둥이를 언제 기회를 보아 철로 길에 슬쩍 나오기라도 하면 검둥이를 시켜 한번쯤은 야무지게 혼쭐을 내주려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푸르름을 더해 가는 소나무들이 다복다복 기다랗게 숲을 이룬 산언덕에 영롱한 빛으로 곱게 수놓은 무지개가 떠올랐다.

무지개를 바라보며 가슴속 깊이 짙은 여운을 살뜰하게 남겨 주는 그런 오붓함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러 주길 바랬다. 하지만 하늘은 그런 곱다란 무지개를 오래동안 놔두질 않았다. 어느 틈에 소리없이 흔적을 지워 무지개 다리를 거두어들였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에 잠시 어린 마음이 더없이 우울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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