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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33 조회 : 1,232




휴전으로 전쟁의 포성이 멈춘지도 수 해가 지났다. 그러나 처참한 전쟁이 흉물스럽게 남긴 흔적들이 들녘 논자락에 처참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아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반쯤 부서져 기울어진 육중한 소련(蘇聯)제 탱크(T-34)한 대가 뒤꽁무니를 논배미 한구석에 매가리 없이 푹 쳐박고 있어 흉물스럽게만 보였다.

엇비스듬하게 균형을 잃은 채 시뻘겋게 녹이 슬어가는 기다란 포신(砲身) 위에 들녘을 지나던 작은 새들이 잠시 쉬어 가려나, 저마다 거침없이 내려앉아 지친 몸을 가듬으려 간동거렸다.

그리고 마을 앞에 놓였던 철교가 한 두 차례 공중폭격(空中爆擊)으로 군데군데 잘려나가 마치! 엿가락처럼 휘어져 내린 모습을 자라나는 동안 늘 가까이 다가서 눈으로 본 적도 있어 아! 전쟁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 정도에서 어린 내 의식 수준이 머물렀다.

가끔씩 ‘우우우우웅’ 찢어질 듯싶은 금속성 소리를 온 하늘에 커다랗게 남기며 금강 둑 너머 서편 끄트머리에 모습을 나타냈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들이 짙은 놋황색 물결을 이루는 널따란 논배미 위에 이내 닿을 듯이 아주 낮게 떠 끝 모르게 펼쳐진 너른 들녘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몇 차례 빙그레 돌면서 짯짯이 내려 살펴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앞산 산마루턱을 넘어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앞 머리에 프로펠러가 달린 녹색 군용 정찰기를 어쭙잖은 어린 눈으로 보았을 뿐이었다.

지각(知覺)이 극히 낮은 어린 나이에 그리 낮게 비행을 하는 군용정찰기가 곧 손끝에 닿을건만 같아 빨랫줄을 바치는 바지랑대를 들고 나와 두들기면 곧 닿을 것 같은 어리석은 착각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그저 자라나면서 동네 사시는 웃어른들로부터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귓속이 따갑도록 들어와 어림짐작으로 놈들의 만행이 극에 달해 참혹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을 뿐이지 그다지 실감은 나질 않았다..

그보다는 직접 몸으로 부대껴 생생하게 느낀 것은 내 아버지의 목숨을 잔인하게 빼앗아 간 전쟁의 참상과 어처구니 없는 죽음으로 내몰게 한 사회적 모순에 대한 울분과 원망이 나를 더욱 민감하게 했다.

그런 모진 아픔을 추스리기도 전에 송두리째 무너져 내려앉은 삶이라도 이어 나가려고 바둥거린 근간(根幹)이 되었던 작은 땅덩어리를 그리 힘없이 잃고 말았으니 그리라도 살기 위해서 아니! 내 어머니 말씀처럼 억울해서 더 억척스레 살아남기 위해 어머니는 젊으신 나이에 기약도 없는 젓깔장수로 나서 모진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책임 여부의 전자가 내 아버지의 죽음을 몰고 온 전쟁이었다면 후자인 그 작은 땅덩어리를 잃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처해진 삶의 열약한 환경적 요소가 그리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어 가난에 들볶여 눌려 살다보니 살을 에이는 긴 겨울 굶주림 속에 헤어나고자 어쩔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논문서를 잡히고 선택한 것이 종구네집에서 장리변(長利邊)을 얻어 쓰게 되었다.

그 장리변이라는 것이 이른 봄에 쌀 한 가마니를 얻어 쓰면 그 해 가을에 쌀 한 가마니 반을 갚아야 하는 무거운 원금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높은 이자에 시달렸다. 그리고 제때에 갚지 못하는 죄로 낮밤을 가리지 않고 찾아와 거친 음성으로 마구 퍼부어대는 성화에 견디다 못해 두 해를 넘기지도 못하고 결국엔 내놓을 수 밖에 없는 궁지로 야멸치게 몰고 간 종구 아버지가 우리 두 모자에게 남겨준 아픔에 대한 무게의 비중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만만치 않았다.

잃어버린 땅에 대한 책임 여부를 놓고 자의와 타의로 양립(兩立)시켜 그 한계를 논하기 이전에 어린 나는 냉혹한 환경적 영향에 억지로 길들여져 갔고 거친 세상이 모지락스레 요구하는 자제력을 수용하기엔 극히 힘들고 난해하기만 했다. 그저 세상 밖을 향해 낮은 목소리라도 체계 있게 표현을 못하고 살 뿐이지 늘 불만적 요소는 뇌리 속에 깊숙이 잠재되어 갔다.

그 시절 어린 내 눈에 비친 세속은 대다수 가진 사람들은 더 채우고만 싶어 날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없이 사는 사람들은 빚에 얽매여 남 재산 늘려주기 바쁘고 그도 견디다 못해 새벽녘에 줄행랑을 쳐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서도 두 집 정도에 이르렀다.

어쩜! 그들은 가진 자의 오만스러움 속에 그들만의 사욕을 채우려 혈안이 된 듯해 보통 사람들과는 눈빛부터가 판이하게 보였다.

그런 환경적 궁핍 속에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가진자에게 비굴할 정도로 허리를 굽혀가며 비위를 맞추려는 것 같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토록 빚에 눌려 그 빚을 갚으려 등껍질이 벗겨지도록 일을 하면서도 그나마 어렵게 얻은 소작농 논밭뙈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지나칠 정도로 종구네 아버지에게 아첨하며 살아가는 몇몇 어른들의 기회성도 누누히 눈에 띄어 그런 모습들이 어린 눈에도 한편으로는 애틋하게도 보였다.

그런 모순된 모습을 눈 아프게 바라보고 자라온지라 그 언제가 될런지 예단(豫斷)하기는 어렵지만 먼 훗날 나만큼은 그런 속박된 환경에서 처하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갖고 험난한 세상 고된 삶과의 끝없는 줄다리기를 하며 살아가는 것 같았다.

아침녘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눈은 자연스레 어두룩한 방 안에 힘겹게 찾아드는 빛이 얼룩거리는 봉창문을 버릇처럼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눈 밑 아래 얼룩진 반다지 옆 아랫목 방바닥에 푹 내려앉아 납작해진 보리쌀 자루가 마음에 자꾸만 걸렸다.

당장 한두 끼니를 떼우고 나면 먹을 것 걱정을 하여야 할 궁박(窮迫)한 입장에 처하다 보니 잠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옥순이네 집으로 양식을 꾸러 나서신 것 같았다. 좀처럼 벗겨지지 않으려 잔뜩 찌푸린 칙칙하게 내려 앉은 하늘만큼이나 마음은 이리저리 하루 내 무겁기만 했다.

그런 무거운 짐을 연약한 여자의 몸인 어머니에게만 한 짐 가득 안겨 주고 무책임하게 세상을 등지신 내 아버지가 한없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속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지난날 아기자기했던 일들을 반추(反芻)한다는 그 자체가 어찌 보면 조금은 마음 편치 않게 느껴졌다.

오히려 그런 잔잔한 감상에 젖어있는 것이 고생에 시달려 주름이 잡혀 가는 눈언저리와 부르튼 발가락을 매만지시는 내 어머니 고통에 비하면 아둔한 여유인 듯싶었다. 그리 생각하다 보면 더욱 우울타 못해 가슴에 숨이 막혀 오는 듯 답답해졌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런 불안한 삶이 지속되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막연한 질문을 내 자신에게 수도 없이 해보았다.

물지게를 지고 둥구나무 밑에 닿으니 산등성이로 낮게 흐트러지는 검은 연기는 아마도 곧 기관차가 마을 앞을 통과하려는 암시(暗示)인 듯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려는 찰나에 기적 소리 요란스레 울려 착 가라앉은 날씨 탓인지 그리 가깝게 더욱 크게만 들려왔다.

귀에 익은 듯한 밭은기침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고샅길을 빠져나온 종구네 아버지가 미장일을 하러 읍내에서 오신 아저씨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마치고 새로 지은 집터에 가시려 하는 것 같았다.

동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터인 연자방앗간 앞에는 동네 꼬마들이 목수 아저씨들이 일을 하고 남긴 납작하게 기다란 나무판자 조각과 네모반듯한 막댓가지를 주워 와 장난감 칼을 만들어 크레용으로 색칠을 해 나름대로 멋을 부려 칼싸움 놀이를 하고 있었다.

지난 설 때 고향에 다녀간 뒤 근 반년을 넘게 오질 않아 오랜만에 집에 다니러 온 동네에서 유일하게 아직까지 시집을 안 가고 있는 군산 고무신 공장에 다니는 기순이 누나가 양쪽으로 가랑머리를 곱게 따고 고샅길로 걸어오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쳐 반갑게 인사를 하니 누나도 나를 쳐다보며 얼굴 가득 웃음을 띄웠다.

우물 터에서 동네 사람들이 자꾸만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어 다가서 보았다. 장마에 내린 빗물 탓인지 물이 부옇게 보였다. 이번 장마가 끝나고 나면 우물 밑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물을 퍼내어 소독을 하고 동네 사람들이 친목을 도모(圖謀)하려고 막걸리와 음식도 장만하여 풍물도 치며 춤도 추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려 한다는 소리를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었다.

옥순이가 어떤 모습으로 나를 대할까? 하는 생각에 옥순이네 집에 갈까 말까 몇 번을 망설였다. 양식을 꾸러 나가신 어머니가 궁금해서 시침을 떼고 옥순이네 마당 안으로 들어서니 어머니와 옥순이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 맷돌에 보리쌀을 넣고 돌려 가루를 곱게 빻아 애호박에 굵은 멸치를 넣고 보리수제비를 끓이려 하셨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일껏 마루에 앉아 두 어른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하던 옥순이가 나와 얼굴이 마주치자 얼른 얼굴을 돌리고 아무런 말이 없어 머슥해지기만 했다.

그러자 옥순이 어머니가 옥순이를 곱게 흘겨보시며 말씀하셨다.

“아이구 꼴에 그래두 가시내라구 무신 내외를 허는감? 너는 상민이가 모처럼 만에 왔는디 사람이 왔으면 왔냐구 인사라두 해야지 사람 무안허게 땡감 물어뜯은 얼굴을 하구 있냐?”

그러자 맷돌 구멍으로 보리쌀을 한 움큼 넣으시던 어머니께서 가볍게 웃으시며 말을 이으셨다.

“야, 점례(옥순이 어머니 이름)야! 니 말이 딱 들어맞는가 부다. 옥순이가 다 컸다구 우리 상민이헌티 내외를 하는 모양이구먼 그려. 엊그제 아침나절에두 울타리 너머루 바라보닌께 멀쩡한 큰길 냅싸두고 옥순이 너 혼자서 일부러 철길루 걸어가던디 혹간에 니들 둘이서 무신 쌈박질이라두 혔냐? 안 그러면 내동 잘 붙어 댕기다 갑자기 떨어져 다니게 야들이 필시 뭔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구먼?”

그러자 옥순이가 이렇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고 있어 어머니와 내가 조금 무안스런 표정을 지으려 하니 옥순이 어머니가 미안스런 얼굴로 옥순이를 향해 큰소리를 치셨다.

“참! 저년 하는 꼬락서니라니 지에미 욕먹이기 딱 알맞지 어디 어른이 말하는디 버르장머리 읍시 불쑥 일어서구 지랄이냐? 참 소갈머리 하구는 밴댕이 속창사구처럼 좁아터져 가지구 어디다 써 먹을래?”

그런 옥순이의 태도에 조금은 무안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수제비를 먹고 가라는 옥순이 어머니 말씀에 ‘물을 길어 가지고 빨리 집에 가서 숙제를 해야 한다.’고 거짖 핑계를 대어 찝찝하면서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마음으로 옹골차게 꽃망울이 맺혀 있는 텃마당 도라지 밭을 지나 우물가로 오고 말았다.

조금 부옇게 보이는 샘물이 옥순이에게 당한 듯 어정쩡한 기분만큼이나 썩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동네 우물 터 말고는 물을 길어 갈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양철통에 물을 채우고 고샅길을 걸어가면서 문득 생각을 해보았다. 힘겹게 길어가는 물통 속에 담긴 물이 하얀 쌀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실없이 해보았다.

언덕마루에 올라서니 우뚝 선 두 그루 장송(長松)의 의젓한 모습이 오롯이 보여 반갑기만 했다. 거친 숨 돌리려 잠시인들 쉬어 가고 싶어 풀밭에 앉았다. 이 짧은 시간 만큼은 그 무엇도 의식치 않아 아무런 끌림 없이 나만의 독백 속에서 꼭 거창스런 철학적인 사색이 아니더라도 숲에서 새나는 자연스런 산의 꾸밈없는 소리를 들어 그라도 작게나마 위안을 삼고 싶었다.

어쩌다 길가를 스쳐 지나는 사람들이 힘겨워하는 이런 내 모습을 본다면 물지게를 등에 지고 힘에 부쳐 그러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 하나만이라도 꼭 지켜내고 싶은 내 작은 자존심이었기에 그럴수록 더욱 티 나지 않게 꿋꿋하게 걷고만 싶었다.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 열기로 달아오른 내 폐 속에 깊숙이 들어차고 아랫도리 반바지 속살로 배어들었다. 그 촉감이 퍽이나 시원스러기만 하니 마치 수학 시간에 난해한 문제를 풀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답을 찾았을 때처럼 후련하기만 했다.

밭둑을 넘어선 빗물이 옥수수 밭고랑에 듬성듬성 고여 있어 줄나란히 서 있는 옥수수 이파리가 부는 바람 따라 숨겨둔 이야기를 나누듯이 수런수런하고 푸릇푸릇하던 수염이 옅은 분홍빛으로 조금씩 물들기 시작했다.

어깨에 묵직하게 달라붙은 물지게 볏짚 지푸라기로 꼬아 만든 멜빵끈을 잡아당겨 다시금 집을 향해 걸어가려니 힘에 겨워 숨을 모아 내쉬며 앞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능선 너머로 내 아버지의 환영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힘에 버거운 지친 그리움 한 덩이가 나를 사로잡으려 다시금 소리 없이 밀려들어 주체할 수 없었다. 정말로 가누기도 힘들기만 한데 어찌하라고 그런 타들어 가는 속마음도 모르는 까치란 놈은 먹이를 찾아 밭고랑을 늘쩡늘쩡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밭두렁엔 내 키를 휠씬 넘게 자라 짙은 구름 머리에 무겁게 이고 있는 수숫대가 답답하리만큼 눈앞을 가로막아 줄 늘어서 있는 모습들이 마치 교련 시간에 우리들이 사열을 받으려 부동자세로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좁다란 부엌에 덧대어 이어낸 나뭇간은 추녀 끝이 낮고 짧아 들이치는 비에 군데군데 흙이 떨어져 나갔다. 뻐끔뻐끔 구멍 난 틈 사이로 침울한 그늘 속에 갇혀 있던 습한 바람이 은연히 새어들었다. 가난에 헐벗은 내 삶처럼 구멍 뚫린 벽이 왠지 황량하게 보였다. 그래서 내 아픔 모두를 오므려 거머쥐듯 푸실푸실 흙내 나는 마른 벽에 물지게의 고리를 쓸쓸하게 걸어 놓았다. 그것은 숨돌릴 틈도 없이 조여 오는 각박한 삶에 대한 서툰 분노가 아니였다. 그렇타고 공연스레 억지를 부리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런 아픔을 떠안고 가려는 듯 시원한 바람이 산마루턱에서 한차례 불어왔다.

좁은 방안으로 들어서니 저녁노을이 봉창 밖에 희멀건하게 어른거려 어둠살이 밤을 서둘러 부르고 있었다. 답답해지려는 마음에 서둘러 밖으로 나오니 불그레한 잔영(殘影)을 남기며 소리 없이 스러져 가는 노을빛이 애잔스레 보였다.

조금은 먼 듯한 거리지만 때맞춰 밀려오는 어둠살 속에 더욱 자그맣게 보이는 자동차들이 띄엄띄엄 틈을 두고 늘어서 흐릿흐릿 불을 밝혀 꼬릴 물어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읍내를 향해 제가끔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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