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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46 조회 : 1,128




가파른 산자락을 가뿐하게 내려온 아침 해는 더할 나위 없이 찬연키만 했다.

어느 해보다도 유난스레 건조한 날씨가 많았다. 그로 인해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눈에 보일 정도로 물이 메말랐다. 여름이 중반으로 접어들자 기승을 부리는 더위가 절정에 치달았다. 달아오르는 열기로 아침부터 기분이 잔뜩 찌푸려졌다.

산등성 너머 그 어디쯤에서 마을을 향해 달려오는 증기기관차가 두어 번 정도 내지르는 기적 소리가 조금은 날카롭게 들렸다.

그런 기적소리마저도 숱한 나날 그리도 진저리나게 들으면서 살아온 터라 그다지 민감한 반응을 느끼지도 못했다. 산자락에 부딪혀 되살아나는 기적의 여음(餘音)이 서낭당 고갯마루를 넘어 내 귓가에 별다른 의미 없이 들렸다.

산 기스락과 맞닿아 홀가분하다 못해 외롭게 느껴지는 오목한 뒤뜰엔 철 따라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제가끔 심심찮게 피어났다. 그 수와 종류가 너무도 다양해 바라보기에 더없이 풋풋하고 싱그럽기만 했다.

청아(淸雅)한 아침 이슬이 야생화의 꽃과 잎사귀에 가득 묻어나 더러는 작은 물방울이 동글동글 탐스레 맺혀 있었다. 그리고 분주하게 날아드는 벌들이 잉잉거리며 꽃 주위를 맴돌다 이내 꽃에 내려앉아 온몸에 노란 꽃가루를 잔뜩 묻힌 채 꽃 속 깊이 파고들어 꿀을 모으려 했다. 강한 햇살에 녹아버릴 것 같은 연한 호박꽃 노란색 꽃잎에도 꿀벌 한 마리가 들붙어 있었다.

우직한 저 산을 가벼이 밀쳐내고 빠져나오려는 듯 부풀대로 부풀어 올라 희다 못해 새치름하게 보이는 한 무더기 뭉게구름이 들녘으로 홀가분하게 발걸음 하려 했다.

달려오는 증기기관차가 마을 어귀 샛강 철교를 건너는가? ‘투두둥투두둥’ 마치 양철 북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종일토록 오르내리기를 수차례씩 반복하는 기차는 눈이 시도록 뻔쩍뻔쩍하는 두 갈래 은빛 선로에 듬직하게 들붙어 검푸른 들녘을 꿰뚫듯 시원스레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기관차의 굴뚝 밖으로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가 아침 햇살 가지런히 머무는 봉곳한 둔덕을 온통 검게 뒤덮었다. 그러다 요란스럽게 울렸던 기적 소리가 들녘으로 퍼져 나 어디론가 사라져 가듯 보일락 말락 부연 연기의 끝자락이 허공에 실실이 흐트러졌다.

햇살에 눈이 부실 정도로 곧게 뻗어난 철로와 고즈넉하게만 바라보이는 들녘 한곳에 소담하게 자릴 잡은 작은 간이역의 모습은 정서적으로 큰 위안이 되어 숱한 생각을 자아내게 했다.

그와 더불어 찬란하게 퍼져나는 아침햇살에 번쩍거리는 국민학교 교실 유리창은 언제나 스스럼없이 바라볼 수 있는 친밀감을 끝없이 안겨주었다.

산 기스락 끄트머리에 달라붙은 마을과 채화면소재지가 맞닿는 어름에 있는 철길 건널목 오름길에 동근이 아버지와 방앗간 일을 보시는 순태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미루어 짐작컨대 아마도 읍내 경찰서 대기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종구네 아버지 면회를 가시려는 듯해 보였다.

그 사람의 진면모(眞面貌)를 보려고 하면 그 사람이 큰일을 당했을 때 외형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그 사람을 도우려 찾아드는 사람들의 수(數)를 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동네 규모가 작다고 하여도 읍내 경찰서에 종구 아버지를 면회하러 가는 사람의 숫자가 고작 두 사람 뿐이니 덕은 베푼 만큼 되돌아온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일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철칙(鐵則)에 따라 제가끔 주어진 명대로 그리 부대끼며 한세상을 살다 그 언젠가는 한줌 진토(塵土)가 되어 다시금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배우며 살아왔다. 그러나 오욕(五慾)에 하나인 재물에 대한 집착 속에 탐욕을 못 버려 그토록 혈안이 되어 얼굴에 꽉 들어찬 욕심의 기름때가 번지르르하던 종구 아버지의 모습이 그리 썩 유쾌하게 보이질 않았다.

그런 꺼림칙한 느낌은 비단 어린 나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동네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가난 속에 허덕이다 종구네 집에 지은 빚 때문에 견디다 못해 동네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도 못하고 그런저런 합당하지도 못한 이유로 등 떠밀리듯 고향을 떠나 유랑의 길로 들어선 두서너 집 사람들의 슬픈 면면이 새삼스레 떠올라 마음 한쪽이 씁쓰레하기만 했다.

‘가마솥 안에 콩이 타지만 않는다면 알맞은 열로 볶을수록 더욱 고소한 감칠맛이 난다.’는 말처럼 우리들 삶도 그렇듯이 고소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만 같았다.

더없이 너른 들녘 한 자락 들메 마을에 같은 해 다소의 날짜에 간격은 있었을지언정 두 주먹을 발끈 쥐고 울음을 터트리며 태어났다. 그리고 더불어 살아온 14년이라는 결코 짧지도 않은 세월의 흐름 속에 우정은 돈독해졌을 것인데 어른들의 이질적인 반목으로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질 못했다. 더욱이 지난 6년 동안 같은 학교를 같은 길로 같은 시각에 같이 오르내렸던 종구가 고향 친구였기에 우정을 그리 쉽사리 버리기엔 무엇인가 가슴속 깊이 저려 오는 안타까움에 울적해지기도 했다.

울음을 터트려 태어난 이곳에서 더불어 살아오는 동안 가슴 벅차게 기쁨이 울렁거렸던 순간과 때론 가슴 아리도록 아픔을 부여받아 친숙할 만큼 이물 없었던 내 주위의 모든 것들과 더불어 무탈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결단코 단 한 조각도 전혀 원치 않았는데 부모들이 남겨 놓은 허물들로 서로가 갈등과 반목(反目) 속에 지금껏 부자연스럽게 지내야 하는 종구와의 관계가 제일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조금 멀리 떠난 석란의 경우가 조금은 그런 듯싶었는데 그보다는 늘 가까이 한동네에 살면서도 전과는 상이하게 돌변한 옥순이의 태도가 다시금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그런 감성에 젖어 술렁이는 마음을 부채질하듯 아침 해가 옹골찬 모습으로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바로 그날인 1960년 8월 2일 국회의사당에서는 전국 각 지역구를 대표하는 선량들인 민·참의원들이 모여 제 5대 국회의 첫 개원식이 열렸다.

그리고 이어 본회의에서는 대통령에 윤보선 그리고 국무총리에 장면 박사를 선출했다. 그리고 전 국민의 여망이 담긴 민주주의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4.19 학생 의거를 시금석(試金石)으로 탄생하여 그 다음 해인 1962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집권 9개월의 단명으로 막을 내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 제2공화국의 첫 장을 열었다.

그러나 내각책임제 하의 제2공화국은 4.19 학생 의거로 막을 내린 제1공화국의 대통령인 이승만과 집권당인 자유당으로부터 약 12년 7개월 동안 지속된 독제에서 풀려나 새롭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전 국민의 여망과는 달리 하나로 통일된 모습을 보이질 못했다. 수권 정당인 같은 민주당 안에서도 대통령인 윤보선을 필두로 하는 구파와 국무총리인 장면 박사를 핵심으로 하는 신파로 갈라져 서로가 대립의 각을 세운 상태에서 불안정한 출발을 했다.

그리고 사회 각계각층에서 분출되는 욕구를 적절히 수용하여 통제하지 못해 날만 밝으면 데모와 가두시위가 빈발하여 극에 달했다. 그로인해 사회질서가 지극히 문란해져 전국 각지에서 시도 때도 구분 없이 빈발하는 데모와 가두시위에 국민들 대다수가 염증을 느낄 정도의 그런 혼란한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런가 하면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권과 국군을 통솔하는 군군통수권만을 부여하고 내정에 관한 모든 실질적 권한이 국무총리에게 부여되었다. 그런 정치적인 구조에서 서로 첨예하게 대립을 하여 권력을 선점하려 혈안이 되었다. 또한 계파의 이익에만 치중하다 보니 집권당으로써 막중한 책무를 다하지 못해 전 국민들로부터 정신적 공감대를 얻지 못해 서서히 신망을 잃어 가고 있는 처지였다.

그 무렵 농촌의 사정은 너 나 할 것 없이 거의 대다수가 정말 어렵다 못해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 양식이라야 밭에서 캐낸 고구마에 콩을 섞어 쌀을 넣는 시늉만 했다. 그리고 김장김치랍시고 담가놓은 그 짜디짠 우거지김치를 손가락으로 쭉쭉 찢어 밥숟가락에 둘둘 말아 밥 반 김치 반으로 배를 채웠다. 그리도 못하는 형편이 더 어려운 집은 거무튀튀한 잡곡밥 한 사발에 물을 한 바가지 정도 넣고 끓여 밥알보다 물이 더 많아 밥도 아니고 미음도 아닌 멀건 밥물에 짠지로 배를 채우며 허기진 배를 달래며 그 긴 겨울을 보냈다.

겨울 양식이 거의 밑바닥이 들어나는 봄이 되면 산과 들녘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나물을 캐어 나물죽을 쒀 먹고 살았다. 심지어는 채 여물지도 못한 보리이삭까지 베어 죽을 쑤어 먹으며 견뎌냈다. 그러다 보리 철이 되면 그제야 한시름 덜고 보리쌀에 감자를 섞어 넣은 밥으로 뙤약볕 아래 등껍질 벗겨지는 여름을 겨우겨우 견뎌냈다. 그리고 논배미에 벼 이삭들이 팰 무렵이면 보리쌀에 감자가 다 떨어져 가는 어중성반한 때가 되면 집집마다 양식 걱정을 봄 못지않게 하며 살았다. 살기 위해, 아니 살아나려고 발버둥 치며 한 해를 보내는 과정이 그리도 힘들고 어렵기만 했다. 변화를 모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두운 삶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해마다 되풀이하는 암담(暗澹) 그 자체였다.

그런 어려운 시기에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좁은 방 안이 꽉 들어차도록 보리쌀도 아닌 흰쌀 한 가마니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양식 걱정할 일이 없어 편한 듯 보여도 도대체 어떤 연유로 내 집에 쌀가마니가 오게 되었는지 도무지 풀리질 않는 의심스러운 기분이 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래도 그 누구에게 단 한 번 속 시원하게 터놓고 물어볼 수도 없어 그저 어정쩡하기만 했다.

한낮 해는 시뻘건 불덩이를 금방이라도 땅에 떨굴 것처럼 우글우글 끓어올랐다. 울타리를 타고 오른 넓적한 호박잎들과 뒷간 지붕 위의 박 이파리들도 더위에 지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앞 들녘 밭에 희멀쑥한 수숫대 잎사귀와 검푸른 콩 이파리들 그리고 들깨 이파리들과 어지간한 더위에는 잘 버텨내는 고구마 순도 마냥 지쳐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가뜩이나 이런저런 생각에 번잡스런 마음이 더욱 무겁기만 했다.

반질반질하게 햇살이 도는 뜨거운 쪽마루 바닥에 찬거리가 없어 생절이라도 하시려고 어머니가 밭에서 뜯어다 놓은 푸성귀 위에 날개 빛이 푸르스름한 파리들이 몰려와 서너 마리씩 군데군데 오글거렸다. 순덕이 어머니가 두꺼운 마분지를 오려 싸리나무 막대기에 바늘로 실을 꿰여 만든 파리채로 ‘탁탁’ 소리를 내시며 파리를 잡아 울 밑 그늘에 어슬렁거리는 닭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 작은 파리 한 마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밀치고 달치고 하는 모습을 바라보려니 마치 속된 인간 사회의 어지러운 한 면을 보고 있는 듯했다.

아랫마을 옥순이네 집으로 내려가신 어머니의 뒤를 따라 마을에 가려고 텃밭을 내려서 언덕배기 위에 올랐다. 언덕배기 나무 그늘 밑에는 고만고만한 나이 도래의 기현이 친구들이 놀고 있었다. 방죽가 갈대숲에서 잡아 왔는지? 냇둑에 뚫어 놓은 구멍을 파헤쳐 잡았는지? 금방 물어 버릴 것처럼 우악스레 집게를 잔뜩 벌리고 있는 수놈의 집게발을 실로 야무지게 묶어 땅에 내려놓고 모두들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살기 위해 달아나려고 재빨리 기어가는 게를 바라보며 모두들 좋다고 손뼉을 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 바라보니 게에게 손을 물려 화가 나서 짓궂은 장난을 하였는지 야물게 생긴 수놈이 한쪽 집게발을 잃은 채 한쪽 남은 집게발이 실로 꽁꽁 묶여 있었다. 그러자 게가 화가 잔뜩 난 듯 허연 물거품을 가득 뿜어내며 무척이나 억울한 눈빛으로 조그마한 두 눈을 올려 바짝 치켜뜨고 있었다.
저도 이제 한쪽 밖에 남지 않은 집게발로 먹이를 구하려면 무척이나 힘들 것 같아 왠지? 마음이 짠해졌다. 어쩌면 험한 세상 아버지를 잃고 한 분 남은 어머니에게 의지해 힘들게 살아가는 내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린 동생들을 윽박질러 게들을 빼앗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방죽 둑에 놓아 주니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제가끔 빠른 동작으로 뿔뿔이 흩어져 풀숲으로 숨어들었다.

마땅한 놀 거리가 없어 더위에 무료함을 달래 보려고 저희들 딴에는 힘을 들여 잡은 게를 동네 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찍소리 못하고 빼앗겼나 싶어 못내 서운해 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후 또다시 게를 잡으려 가는 건지 아니면 더위를 식히려 냇가에 미역을 감으러 가는지 우르르 몰려 뛰어가고 있었다. 한낮 햇살에 잘 달아올라 번쩍번쩍 눈 시린 은빛을 내는 레일을 받치고 있는 철로 갱목 위를 산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갔다. 그러자 ‘타다닥 타다닥’ 자갈들이 발길에 차이는 소리를 남겼다. 그렇게 뛰어가고 있는 모습들이 너무도 귀엽기만 했다.

더없이 푸르고 맑기만 한 하늘이 그토록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어린 동생들과 그리고 나 또한 끝내 지켜주길 마음속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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