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을 넘어선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나 이제 말복이 되었건만 광포(狂暴)한 더위는 아예 물러설 생각을 접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 회포를 푼다는 칠월칠석도 목전에 다다른 것 같았다.
고추좀잠자리가 떼를 지어 노니는 마당의 앵두나무 밑에는 봄에 깐 병아리들이 이젠 중병아리 정도로 잘 자라 놀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엄지닭이 하는 짓을 눈여겨보았나, 두 발로 거름 더미를 후벼 지렁이 한 마리를 찾아내어 작은 부리로 쪼으려 했다. 그런데 지렁이가 기를 써 꿈틀거리자 제풀에 놀라 움찔거리다 어미가 있는 나무 그늘 아래를 향해 얼른 달아났다. 그러자 털에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선홍색 볏을 세우고 있던 장닭이 잽싸게 달려와 동글동글하게 몸을 오므려 꾸무럭대는 지렁이를 마구 쪼아 놓고 위세를 부리듯 잔뜩 뽐내며 암탉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마당 한쪽엔 모서리가 조금 깨어진 질뚝배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당에 놀던 닭들이 목을 축이라고 물그릇으로 놓아 둔 질뚝배기에 햇살이 자글자글하게 내려앉아 번질번질한 것이 조금은 질박하게 보였다. 무더위에 숨이 가쁜지 암탉 한 마리가 질뚝배기의 밑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단작스럽게 남아 있는 물을 입 안에 담고 오물오물 넘기려 했다. 그러다 낮 동안 햇살에 뜨거워진 물이 영 탐탁하지 않은지 어물쩍하게 넘기며 더는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 냉큼 나무 그늘 밑에 파 놓은 둥그스름한 흙구덩이로 향했다.
희누른색으로 변해 가는 싸리 울타리 등을 타고 오른 호박 섶에서 순덕이 어머니가 끝이 잘 달아 몽땅하게 생긴 수수로 엮어 만든 부엌비로 널따란 호박잎을 이리저리 들춰 알맞은 크기로 자란 호박을 찾고 계셨다.
요즘 매 끼니마다 반찬으로 호박나물 볶음이 올라왔다. 실파와 마늘을 다져 넣고 들기름을 둘러 달달 볶은 호박 나물을 만드시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호박나물에 고추장을 넣고 석석 비벼 사발밥 한 그릇을 거뜬히 비울 것만 같아 저녁밥이 꽤 일찍부터 은근히 그리워졌다.
조금은 멀리 바라보이는 산모롱이에 새뽀얀 한 덩이 고운(孤雲)이 홀로 놀고 있었다. 그리고 산등성 아래 우직한 검회색 바위가 푸른 숲과 청록의 나뭇가지 사이로 큼지막이 바라보였다. 앞 산자락 우묵골 언덕배기엔 먹이를 찾는 듯 한참 동안 빙빙 돌던 솔개 한 마리가 고픈 배를 채우려 엇비스듬히 기운 고구마 밭을 지나 마을로 향하려는 것 같았다. 산자락 아래로 서서히 내려서 차분하게 균형을 잡는 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아직은 덜 자란 어린 닭들을 솔개란 놈이 냉큼 채 갈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토방 위에 네 다리 쭉 뻗고 늘쩡늘쩡하게 졸지만 말고 제발 밥값이라도 좀 하라며 검둥이를 마당 안으로 불러 놓았다. 그리고 산자락을 바라보니 또 하나 작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밀려오는 그리움 속에 어머니로부터 이따금씩 말로만 들어오던 두 살 터울이었다는 내 누나가 잠들어 있는 그곳이 어디쯤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내 어머니에게 그리 수도 없이 물어보아도 언제나 귀에 들려주시는 대답은 ‘보기 싫은 니 애비 잠들어 있는 물레치기 그 근처 어디쯤이다.’라고만 불분명하게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더는 지난날에 아픔을 되뇌고 싶지 않으신 듯 좀처럼 가르쳐 주질 않으셨다. 그쯤이라는 곳이 어디쯤일까? 하고 오랜 세월을 두고 궁금 속에 나름대로 추측을 하다 이내 지쳐 그만두고 말았다.
내 나이 겨우 세 살 나던 그해 한여름 어느 날 단 하나뿐이었던 내 누이는 역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어린 내가 누이의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게 우리 식구들 곁을 떠나 산자락 그 어디쯤에 묻히고 말았다.
개동벌레가 꽁무니에 띄엄띄엄 불을 밝혀 나름대로 여름밤의 운치를 자아냈다. 그리고 한낮 동안 햇살에 달궈져 지칠 대로 지친 옥수숫대를 얄미운 바람이 흔들어 사그락사그락 소릴 냈다. 옥수숫대의 우듬지 위로 펼쳐진 어둑한 밤하늘에 깨어진 유리 조각을 흩뿌려 놓은 듯 달빛에 별들이 반짝반짝 거려 바라보기에 참으로 탐스러웠다.
더위에 지쳐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 밤이나 투덕투덕 널따란 파초 이파리 위에 투박한 소리를 내며 궂은비가 좀 궁상맞게 내리는 날 밤에는 무슨 이유인지? 어머니께서 석유 등불을 다른 날보다는 유난히 훤하게 밝혀 놓으셨다. 그리고 쪽마루에 앉아 틈틈이 깊은 한숨을 몰아 내쉬며 차분하신 목소리로 내 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려주셨다.
기근이 그리도 심해 부황이 들려 하던 그해 봄에 동네 어느 집 가릴 것 없이 모두 들녘으로 나서 손끝에 풀물이 진하게 물들도록 나물을 캤다. 먹을 것이 없어서 논 한가운데에 더부룩하게 자란 독사풀 가루와 자운영을 뜯으려 했다. 나물을 뜯으려고 몸을 구부리신 어머니 등 뒤에 업혀 그리도 칭얼거리는 나에게 내 누나는 심술궂게 장난치려 했다. 그러면 어머니가 지청구를 하시듯 그리 말려도 말을 억세게 안 들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짓궂게 연분홍빛 자운영 꽃을 따서 내 얼굴을 간질였다고 말씀을 하시며 불그레한 눈언저리에 가득 고인 눈물방울을 떨구셨다.
두 눈을 모아 어머니의 입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내 어린 가슴에도 작은 아픔이 끊임없이 찾아 들었다. 모다 아픔의 세월 속에 잃어버린 그 기억들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슬픔이 가득 뒤틀려 아려 오는 한(限)을 푸시듯 자못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리고 어머니 말씀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듣고 있던 나는 얼굴은커녕 그런 기억조차도 알 리 없는 내 누이에 대한 생각을 막연하게 내 나름의 상상에 의존했다.
그보다는 울먹이며 말끝을 맺는 둥 마는 둥 하시는 어머니가 너무도 안타까워 더는 바라보기 힘이 들었다. 그래서 모기장을 쳐 놓은 방 안으로 서둘러 들어가 억지로 자는 척 하며 모로 누워 흙내 가득 배어나는 벽을 맞바라보며 감정을 추스르려 꼼지락거리며 작은 손끝으로 소리가 나지 않게 애꿎게 흙벽을 긁기만 했다.
비록 이루어지 못할지라도 스르르 잠이 들기라도 하면 내 누이를 꿈속에서라도 꼭 한번쯤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더러는 내 누나가 죽지 않고 지금껏 살아 있었다면 여자중학교 졸업반일 테니까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반복해 보았다. 동네는 물론 인근 부락들 중에서도 얼굴이 제일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담뱃대를 만드는 공방집 성애누나보다는 우리 누나가 훨씬 더 예쁠 것만 같았다.
단발머리에 알맞을 만큼의 가늘고 흰 목이 유난스레 돋보이고 발그레한 두 볼에 콧날이 오뚝하여 새까만 속눈썹이 깜박거리는 눈동자엔 도타운 정다움이 가득하게 서릴 것 같았다. 그리고 열릴 듯 말 듯 오목한 입가에 늘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볼 것만 같은 생각에 내 스스로 마음을 달래 보았다. 그리고 깊어만 가는 여름밤 무더위 속에서 좀처럼 오질 않는 잠만 탓하며 잠시라도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았다.
마루에 앉아 계신 어머니는 그때까지도 어둑발이 가득 서린 앞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고 용서 없이 마구 달려드는 밤 모기를 쫓으시려 ‘확확’ 소리를 내시며 군데군데 종이를 덧대어 바른 부채를 애꿎게 부치셨다.
그렇듯 삶은 떨구지 못하는 가난의 고통을 원근(原根)으로 하여 내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정이 평생토록 지울 수 없는 가장 큰 아픔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리고 단 한 번 본 적이 없어 그 작은 얼굴 형체도 구별할 수 없는 두 살 터울이었다는 내 누이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시나브로 떠오를 때마다 아픔을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느꼈다. 더불어 아픔 끝에 묻어오는 아쉬움이 가득가득 서려 내 작은 몸뚱이를 모질게 감싸 안았다.
황토(黃土) 밭두둑에 검은 줄무늬가 선명한 수박들이 해를 향해 푸르딩딩한 배를 훌떡 내밀고 있는 원두막 앞에는 종구 아버지 일로 병막 터 정섭이형네 집으로 가시는가? 동네 이장님과 동근이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의젓하게 면내 유지의 반열에 오른 병수네 아버지가 거리가 좀 멀어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무엇이라 열심히 말씀을 서로 주고받으시며 병막 터로 걸어가셨다.
마을 뒤 들녘에 층을 이룬 다랑논과 거의 맞닿은 산기슭 한 모퉁이에 내 어린 팔을 활 펼쳐 한 아름 정도 되고도 남는 커다란 밤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울창한 숲 한쪽 나뭇가지가 지난해 여름 장마 때 벼락을 맞아 흉측하게 그을린 모습으로 원둥치에 붙어 있었다. 그 참나무에서 허연 거품처럼 나무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진액을 먹으려 달려드는 풍뎅이가 그리도 많았다. 그 풍뎅이를 잡으려고 동네 아이들이 밤나무 아래로 곧장 모여들었다.
바로 그 밤나무 우듬지 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짯짯이 밑을 내려다보며 틈새를 노리던 솔개란 놈이 가파른 언덕바지 너머 기현이네 집 텃마당에 놀고 있던 약병아리 한 마리를 잽싸게 낚아 움켜쥐고 산등성으로 날아갔다.
그런 소란스러움에 놀랐나, 이젠 제법 탐스럽게 잘 자라난 약병아리들이 짧은 날개깃으로 파득거리며 칡넝쿨로 엮어 만든 어리 속으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그러자 얼떨결에 당하셔 못내 분하신 듯 기현이 할아버지가 허겁지겁 흰 고무신을 끌다시피 마당 한 가운데로 나오셨다. 밉살맞게 여유를 부리듯 날아가는 솔개란 놈을 보고 애꿎게 커다란 목소리로 심한 욕을 퍼부으셨다. 그러면서 어이가 없으신 표정으로 허탈하게 하늘만 바라보시다 느슨하게 내려오는 아랫바지 괴춤을 치켜 올리셨다.
그 하고많은 집들 중에 왜? 하필이면 그리도 살기 어려운 기현이네집 약병아리를 채어 갔는지 나도 덩달아 솔개란 놈이 한없이 얄미워지기만 했다.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분이 덜 풀리셨는지 검게 그을린 굴뚝 모퉁이 앞에서 솔개란 놈이 날아간 산릉선 쪽에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셨다.
이른 봄부터 여름내 그리 애지중지 키워 놓았는데 그만 솔개란 놈에게 빼앗겨 허탈해 하시는 기현이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
한참 신혼 재미에 푹 빠져 있는 흥남이아저씨네 집 울타리에는 해를 거듭할수록 탱자나무 가지가 더욱 무성하게 자라났다. 봄이면 가지마다 똘방똘방한 연초록 작은 잎과 뾰족뾰족한 가시를 달고 초여름이 오면 그리 화사하지는 않지만 하얀 꽃들을 올망졸망하게 매달았다. 더불어 가시와 줄기를 온통 드리워 진초록 우단을 갈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늦가을엔 노란 탱자 알알들이 심심찮게 매달려 풍성함을 드러내었다.
동네에서 잘사는 종구네 집 담벼락은 꽤나 높았다. 그래서 대문을 들어서지 않고는 안에서 일어나는 모습들을 그리 쉽게 볼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특이하게도 자기네들의 모든 것을 남들이 쉽게 보지 못하도록 감추고 살려는 성향이 짙게만 보였다. 무엇보다도 도둑을 막으려는 심사가 다분한 듯싶었다.
그에 비해 가져갈래야 가져갈 것도 그리 없어 사립짝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사는 살기 어려운 우리네 삶이 어쩌면 더 자유로워 보였다.
당글당글하게 내리쪼이는 햇살에 여름내 검푸르던 벼줄기가 연초록 이삭을 하늘 향해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며칠 앞서 나온 벼 이삭들이 고개를 뻣뻣하게 곧추세우려 해 머지 않아 검푸른 빛을 걷어내고 놋황색 물결이 서서히 번져날 것만 같았다.
그런 늦가을이 되면 집집마다 들뜬 마음에 가을걷이를 했다. 여름내 조용했던 마을에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가 마음 설레게 ‘쿵쿵쿵쿵’소릴 내어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러나 청청한 밤하늘에 반짝이는 잔별들처럼 근심 걱정이 떠날 날 없는 고된 삶에 잔인하게 우리네 목덜미를 움켜쥐고 놓아 주질 않는 것은 그놈의 철천지원수 같은 장리로 얻어 쓴 쌀 빚이었다.
빛을 잔뜩 걸머진 사람들은 한여름 내 뙤약볕에서 온몸을 태우며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봤자 늘어나는 것은 빚뿐이니 애간장이 다 썩어문드러지는 듯했다.
그 장리변이라는 것이 빌린 돈이나 곡식의 원둥치에 십 분지 오의 변리를 덧붙여 갚아야 하는 있는 자들의 살만 찌워주는 불합리적인 제도였다. 그래도 꼼작 못하고 빌린 것의 반몫이나 되는 이자를 더 붙여 내야만 했다. 그렇게 턱없이 불어나는 엄청난 이자 등살에 허리가 휠 정도로 힘든 강박감을 받으며 살았다.
봄철에는 너무 급한 마음에 한 종지도 못되게 빌린 것만 같았는데 가을이면 원금은 놔두고라도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로 인해 마음으로 느끼는 부담감은 앞산에 무작스레 들어박혀 있는 큼직한 바위처럼 무겁게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장리 빚이었다.
그해 농사를 죽도록 져서 공출 내고 빚에 눌린 이자를 갚고 나면 모자라는 곡식 때문에 농사꾼들은 너나 가릴 것 없이 또다시 장리 빚을 쓰지 않을 수 없어 그런 악순환을 거듭했다.
또한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장리 빚만은 눈알이 씀벅 빠져나올 정도로 아파 생손톱이 빠지도록 아려 와도 꼼짝 못하고 갚아야만 했다.
한낮 해가 비켜서는 둥구나무 밑에는 냇가에서 쇠꼴을 베어 한 짐 가득 지고 오시던 순아네 할아버지가 지게를 받쳐놓고 잠시 쉬고 있었다. 그리고는 술내기 장기를 두고 계시는 삼식이 아버지와 경수아저씨 옆에서 구경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종구네 아버지 일로 진정서에 도장을 받으려고 동네 고샅길을 돌아 나오시는 순태아저씨를 바라보시며 말씀을 하셨다.
“참 팔자지 팔자여. 어찌 저리 온 동네를 발발대고 댕길까? 뭐니뭐니혀두 부지런한 건 누구도 못 따라가지 뭐.”
그러자 이 집 저 집 부지런하게 들락날락하는 순태아저씨를 바라보시던 준섭이 아버지가 순아 할아버지 말씀에 엉거주춤 하시며 답을 하셨다.
“뭐시냐, 안 그래두 아침나절에 읍내 경찰서에 동섭이성님 면회까장 댕겨왔다구 하던디. 몸이 되지두 않은가? 저러콤 거뜬거뜬 온 동네를 온통 싸댕기는 거 보면 저 쬐끄만 몸뚱아리 어디서 저런 힘이 솟구쳐 나오는지? 참 부지런헌 거 하나는 타고난 사람인가 싶네유. 그나저나 쬐끔 전에 동네 구장이랑 동근이 애비가 병수 애비랑 하냥 병막 터 정씨 영감한티 가 본다구 가던디, 뭐가 잘 풀릴란가 모르것네유.”
그러자 옆에서 장기를 두고 계시던 경수아저씨가 말을 하셨다.
“얼금뱅이가 한 고집 부린다고, 병막 터 정섭이란 놈이 이번 일에 대한 결정권을 꽉 틀어쥐고 있는 모양인디 어쩔란가 모르것구. 또 병막 터 정영감님두 뚝박새 모양 변통머리가 눈곱맨치두 없어 이마빡 어디 한군데 찔러봐야 피 한 방울 안 나올 틴께. 아마 모르긴 몰러두 쪼매 어려울 꺼구먼유”
경수 아저씨가 종구 아버지 일이 쉽게 풀리기 어려운 것처럼 말씀을 하시자 같이 장기를 두고 계시던 삼식이 아버지가 나섰다.
“뭐시냐, 따지구 보면 그 집 탓만 못허지유. 동섭이두 인정머리라구는 병아리 눈물맨큼두 없으니, 냉정하기는 두 사람 다 윷판에 개컬간이지유 뭐 안 그런가유? 어디 제 말이 틀렸는감유?”
술내기 장기가 끝나신 듯 장기판 위에 놓인 장기 알들을 주섬주섬 주워 모아 굵은 실로 얼키설키 매듭을 지어 엮은 망으로 된 주머니 안에 넣고 계셨다.
동네 고샅길로 막 들어서려는데 우현이네 집 담 모퉁이에 있는 돼지우리 앞에서 자지러지게 소릴 지르는 약병아리 소리가 나 얼른 달려가 보았다. 아직은 더 자라야할 봄 병아리가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돼지막 앞을 가로막아 놓은 둥그런 막대기 틈 사이로 들어가 구유에 붙어 있는 퉁퉁 불어 터진 보리 밥풀떼기를 부리로 쪼려다가 뒤룩뒤룩 볼 살이 처져 늘어지는 돼지에게 물렸나 죽는다고 소리를 냈다.
그러자 우현이 어머니가 두루뭉술한 살구나무 작대기로 돼지 등을 냅다 후려치셨다. 그러자 두어 차례 호되게 얻어맞은 돼지가 죽는다고 소리를 냅다 질러댔다. 그리고는 그리 넓지도 않은 돼지우리 안을 뱅글뱅글 어지럽게 돌고 있었다. 그러자 나이든 씨암탉이 괘씸한 듯 엉덩이를 바짝 들어 한 두 차례 항문을 오므렸다 펴는 듯싶더니 돼지우리 앞에 ‘찍’하고 묽은 똥을 한 차례 내리갈겼다. 그리고는 분잡을 떨고 있는 돼지를 약이나 올리듯이 고개를 갸웃거려 힐끔힐끔 쳐다보며 여유롭게 토담 밑 찔레나무 그늘 아래로 슬슬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