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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55 조회 : 1,145




그즈음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이 크고 작은 혼란을 가중(加重)시켰다. 더불어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어수선하기만 하여 답답할 정도로 온몸이 들뜨고 있었다.

동근이 아버지 말씀대로 올 가을에 종구네 아버지와 옥순이 어머니가 이미 마음을 정해 한집으로 합쳐 사는 것은 기정사실(旣定事實)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저 날짜 가기만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옥순이와 화해를 해보려 해도 뚜렷한 해결책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 보니 마음의 혼란스러움은 늘 그 턱에서 머물러 어수선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런 분위기를 바꿔 보면 좀 나을 것 같다 싶어 동구 밖 둥구나무 밑까지 왔다. 둥구나무 밑 평상에는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진작부터 자리를 잡으시고 싸리 삼태기를 만들고 계셨다. 평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싸리나무 가지들을 거듬거듬 한데 모아 끄나풀로 묶으시며 옆 자리에 앉아 계시는 진식이 할아버지와 말씀을 나누셨다.

“그러구 보닌께 일이사 그리 되었지마는 이참에 득 본 사람은 뭐니뭐니 혀두 병막 터 사는 정영감뿐이네 그려. 어차피 서로 간에 맴 상하는 건 뻔한 일이라 합의를 해주면서 영감탱이가 낭구 값은 오라지게 욕심껏 받아냈을 것 같구. 그 일루다가 동네 고샅길 거들먹거리던 동섭이 콧잔댕이 자라 등짝처럼 납작허게 맨들어 놨으닌께 동네서 자기 체면은 제대루 세웠네 그려.”
“그러게나 말일세. 암튼 기와집 한 채 저리 떡 벌어지게 지어 놓으니 쳐다보기는 좋다만 저 집 바라볼 때마다 동섭이 속은 썩어 문들어져 시커먼 숱뎅이가 될 것이네 그려. 아 입장을 바꿔 놓구 생각들 혀봐! 자네 같으면 안 그러것는가?”

그때 새터 마을 풀뭇간에서 곡괭이 날을 벼려 오시던 민균이 아버지가 삼태기 만드시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두 분의 말씀을 거드셨다.

“허긴 영감님 말씀 듣고 보닌께 그렇긴 허네유. 뭐시냐 아래께 돼지막 지붕에 올려 줄라구 우묵골에 억새 좀 베러 가서 봤드니 꼭 잔치 끝나 버린 집구석 매냥 산꼴짜기 한구팅이가 썰렁헌 게 동섭이가 집 짓는다구 그집 낭구를 설찮허게 베어 버렸더라구유. 그나저나 가짠하게 보았던 억새에 손가락이 베인다구 허드니 이번참에 동섭이가 딱 그 짝이 나번지구 말었네유.”

그러자 진식이 할아버지께서 장죽을 입에서 떼시며 비선봉 산기슭 아래 자리 잡은 종구네 집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그러게 욕심이 화근을 불러온 거지 뭐. 정도껏 허구 끝나야 되는디 그놈의 사람 맴이라는 거시 어디 그렇던가? 깨구락지 뱃속 같은 못된 욕심이 눈을 멀게 맨들어서 불쌍헌 놈이 달랑 가지구 있는 쌀 한 가마니마저 벽창호처럼 뺏어 그여이 백 가마니 채우려 하드라구. 멀쩡허게 빤뜻한 집 놔두구 뭔 놈에 욕심으로 집을 두 개씩이나 가질려구 허니 죄다 그놈의 욕심이 일을 이 지경까장 맹길어 버렸지 뭐.”
“어쩟던 간에 낭구 값 톡톡이 물어 주고 합의를 해서 운 좋게 나왔는지는 몰러두유. 지가 알기로는 이번 일루 벌금이 꽤나 나올꺼구먼유. 지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어디 두고들 보시더라구유.”

상수 아버지께서 이번 일을 일으킨 종구 아버지의 행동이 못마땅하신 듯 한차례 밭은기침을 크게 하시며 고샅길로 향하셨다.

어른들이 주고받으시는 그런저런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이미 다 원론적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인지라 따분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아직 까지는 동네 분들이 종구 아버지와 옥순이 어머니가 같이 살게 되는지를 모르고 있는 듯했다.

좁은 동네인지라 불과 몇 분 거리에 있는 옥순이네 집에 찾아가 옥순이 앞에 선뜻 나서 뭐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도 없었다. 그저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어 자꾸만 무료해지는 심정에 하는 수 없이 허전한 마음으로 다시금 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수심이 그리 깊지 않은 방죽 가장자리에는 곱게 머리를 들고 있는 연꽃들이 은은한 자태를 양껏 뽐내었다. 선명함 속에 섬세한 빛깔을 잃지 않고 퍼져나는 향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연잎 사이에 더부살이를 하는 듯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드문드문 논병아리들이 물 위에 떠 있었다. 그러자 하얀 집오리들이 저희들 영역(領域)으로 찾아들은 논병아리들이 못마땅한지 힘찬 날갯짓을 하며 자맥질을 하려고 물속에 뛰어들려 했다.

새파란 물결이 불어오는 바람에 잘름거리는 제법 널따란 방죽가를 지나 쨍쨍한 햇살 아래 목이 터져라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짜증이 날 정도로 당차게 들려오는 반비알진 언덕배기에 올랐다. 그리고 풀숲에 목을 길쭉하게 내민 강아지풀을 뽑으려 풀잎을 뒤척이니 풀잎에 붙어 있던 작은 메뚜기들이 정신없이 이리저리 사방으로 튀어 달아나고 있었다.

무료한 심사를 그렇게라도 달래보려 강아지풀을 뽑아 입에 물고 잘근잘근 깨물었다. 불어오는 산바람이 한데 모아 놓은 모래알들이 거칠거칠한 참나무 그늘 밑에 앉으려는데 참나무 밑둥치 나무껍질을 들추고 옴죽옴죽 기어 나오는 등빛이 시퍼런 딱정벌레 한 마리가 눈에 띠였다.
반질반질 윤기가 도는 청록색 융단(絨緞)을 기다랗게 펼쳐 내려놓은 것처럼 보이는 가파르게 내리뻗은 산자락 밑에 햇살 따스하게 찾아드는 남쪽을 향해 덩실하게 서 있는 종구네 기와집은 부의 상징처럼 웅장한 모습으로 도드라지게 보였다.

그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땅바닥에 찰싹 들러붙은 것처럼 잿빛으로 바래져가는 볏짚 지붕이 유난스레 낮아 보이는 내 작은 초가집은 단출한 모습으로 더없이 초라하게만 보였다.

뒤뜰에 알맞을 만큼 둥그스름하게 솟아오른 둔덕엔 뽀얀 목화 솜털 같은 구름들이 서로 닿을 듯 말 듯 한가로이 떠 있었다. 햇빛을 듬뿍 받은 새파란 여름 하늘 아래 거의거의 크기가 엇비슷한 소나무들이 서운치 않을 만큼 들어서 산자락과 조화를 이루었다. 푸른 소나무와 한데 어울려 더욱 돋보이는 불그레한 홍단풍은 계절을 잃어버린 듯 보여 이른 봄부터 불그레한 모습으로 다소곳하게 한쪽 자리를 메웠다.

늘 푸른 소나무들이 따끔따끔하게 내리쪼이는 한낮 햇볕에 은회색 빛으로 번득거려 은모래가 차곡차곡 쌓인 백사장 모래톱에 파도가 조용히 밀려오듯 바람결에 ‘쏴아쏴아’ 솔바람 소리가 귓가에 가느스름하게 들려왔다.

둔덕을 넘어서면 계곡과 계곡 사이 움푹 파인 우묵골로 이어지는 너른 들녘엔 계단식 밭들이 크고 작은 높낮이로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논물대기가 힘든 천수답 논배미에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세워 놓은 회색 콘크리트 수로의 교각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죽 늘어서 앙증맞게 오뚝 솟아 골짜기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아직도 마음은 온통 사념의 숲을 헤매건만 아둔한 두뇌에 끝내 갈피를 잡지 못했다. 번잡스러운 마음을 속절없이 넘길 수밖에 없어 그렇게 여름 하루는 지루하기만 했다.

아랫마을 옥순이네 집에 볼일이 있으신지 잰걸음으로 원두막 밭두둑을 넘어서는 어머니 모습이 보였다. 서로 마주치기라도 하면 무엇인가? 또 다른 번거로운 소리를 들어 겨우 조금은 누그러진 듯 감정이 흐트러질 것만 같아 언덕배기 아래로 서둘러 몸을 숨기고 말았다.

언덕 아래로 내려서는데 고막을 세차게 울리는 굉음이 들려오고 몸에 가파른 진동을 느껴 땅에 주저앉아 목을 바싹 치켜들어 북쪽 산마루를 바라보았다. 햇살에 은빛 날개를 반짝이며 몸집이 커다란 군용수송기 한 대가 한여름 파르스름한 하늘에 나지막이 떠올라 몸을 갸우뚱거리며 서쪽 하늘 어딘가로 까막까막 향하고 있었다.

면소재지로 이어지는 비교적 곧바른 달구지 길엔 병수 아버지가 면소재지에 볼일이 있으신지 자전거를 타고 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동네 어른들이 모이시기만 하면 종구 아버지 이야기 다음으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면의원으로 선출된 병수네 아버지를 두고 ‘개천에서 용 나왔다’ 고 하시며, 동네 생긴 이래 처음으로 인물 한번 놔왔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셨다.

너른 밭두둑에는 햇살에 희끔희끔 번득거리는 수숫대들이 쭈뼛쭈뼛하게 목을 힘껏 내밀어 그런 모습들이 퍽이나 역동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둥글둥글한 수박들이 여기저기 몸체를 드러내어 풍성하게만 바라보이는 동근이네 원두막을 지나 검둥이가 꼬리를 어지럽게 흔들어대는 사립짝 안으로 들어섰다.

등짝에 달라붙은 반팔 러닝셔츠가 살짝 부풀어 오르게 산마루턱에서 산바람이 불어왔다. 앞이 시원스레 탁 트인 서편 들녘에서 벼 이삭들을 비스듬히 눕히며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을 들쑤시듯 불어오는 들바람이 산골짝과 서로 맞부딪쳐 오묘한 소리를 남겼다.

산골짝을 되돌아 나오는 바람은 마당 여기저기에 너저분히 깔린 솔가리들을 흙먼지 속에 휘몰아 높이 들춰 올리려는 듯 한차례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빨랫줄에 걸쳐 있던 대나무 바지랑대가 몇 차례 심하게 건들건들하다가 이내 땅 아래로 쓰러져 나뒹굴었다.

덜 자란 병아리들이 갑자기 부는 회오리바람에 온몸의 털이 들척여 주체하기 힘들게 보였다. 푸슬푸슬하게 연초록 가시가 붙어 있는 밤송이가 달려 있는 밤나무 그늘 아래로 재빠른 몸짓을 하며 쪼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싸리나무로 만든 울타리를 뒤덮은 호박 줄기 사이로 들붙어 구불구불하게 줄기를 뻗은 연분홍 나팔꽃이 바람에 저도 힘에 겨운지 꽃잎이 떨어져 나가도록 나풀거렸다. 그리고 검푸른 빛이 돋아나는 산초 송이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몸이 무거운지 가느스름한 산초나무 가지가 바람 따라 흔들려 산초열매의 은은한 향이 풍겨났다.

마당에서는 순덕이 어머니가 지난가을에 담갔던 김장김치가 다 떨어져 빈 독에서 냄새가 나자 볏짚을 동그랗게 오그려 불을 붙여 김칫독 안에 넣고 연기로 냄새를 제거하시려는 듯해 보였다. 독안에 몇 차례 연기를 두르신 다음 독을 땅 위에 거꾸로 세워 놓으셨다. 순덕이는 그런 모습이 마냥 신기한지 순덕이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는 슬금슬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조용한 듯싶던 산골짝에 검둥이가 갑자기 카랑카랑하게 짖어대며 뛰어나가 소리가 들려오는 담 모퉁이 쪽을 바라보았다.
다소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게 떠오르는 외삼촌이 밭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내 나이 일곱 살 나던 해 그러니까 좀 더 자세히 말을 하자면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을 하기 한 해 전이었다.

외삼촌이 순아네 소달구지에 이삿짐을 가득 싣고 어디론가 떠나가셨다. 그 뒤로는 설 명절은커녕 추석 명절에도 그리고 어머니 생일날에도 단 한차례 내왕(來往)이 없어 남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더더욱 돌아가신 아버지 장례식 때에도 코빼기도 한번 보이시질 않았다. 그런 연유로 피부로 그다지 가깝게 느껴지지도 않던 외삼촌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나타나셨기에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불행하게도 그토록 오랜만에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도 동네 아이들처럼 자기 삼촌이라고 달려가 냉큼 안길 수 있는 반가움보다는 표현키 어려운 반감이 일고 있었다. 말이 좋아 함께 피를 나눈 혈족이지 먼동이 터 올라 뒷산 너머로 기울어져 가는 살점이 다 깎여버린 초라한 초승달의 초라한 모습처럼 피를 나눈 혈족이라는 애틋한 감정이 모두 메말라진 상태였다.

그렇게 내 감정이 무디어지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버지 병원 치료비 때문에 종구네 집에 논문서를 잡히고 장리 빚을 내었는데 원금은커녕 이자를 갚지 못해 내 어머니가 종구 아버지에게 그리 모지락스레 피눈물 나게 당하셨다. 부뚜막 아궁이의 검정 그을음처럼 새까맣게 타 들어 가는 아픈 가슴을 쓸어내려 홀로 외로이 앉아 흐느끼시고 계실 때 단 한 점 혈육인 외삼촌은 얼굴 한번 비친 적 없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말에는 그곳 전라도 산골 사람들에게 산주님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혼자만 마음 편하게 살았으니 더더욱 미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때론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과연 피를 나눈 남매지간인가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며 더러더러 아픔이 솟구쳐 오를 때마다 원망을 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낯선 손님이었기에 짖어대며 달려드는 검둥이를 뒤로 떨쳐냈다. 그리고 그리 썩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집안 어른이기에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막상 어렵기만 한 환경에서도 7년이라는 길지도 않지만 그리 짧지도 않은 세월 속에 탈 없이 나름대로 자라난 어린 나를 바라보시던 외삼촌의 얼굴이 굳어지셨다.

그리고 한동안 소홀했던 혈육의 정이 느껴져 마음이 편치 않으신 듯 내 얼굴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야! 우리 상민이 참말루 많이 컸구나. 이젠 으디서 만나드라두 영 몰라보것다. 그리구 이번참에 강경 읍네 있는 중핵교에 들어갔다면서? 참 잘했다 잘했어. 암튼 공부 열심히 혀서 불쌍한 니 에미한티 잘해 줘야 헌다 알았냐? 그건 그렇구 니 에미는 읍내루 장사 나갔냐?”

내 속마음으로는 내 어머니가 무엇이 그렇게 불쌍하게 느껴졌으며 그런 생각이 있는 분이 그토록 나 몰라라 하시며 살았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마음상태가 그렇다 보니 대답조차 하기 싫었지만 그러지도 못해 겨우 작은 소리로 대답을 했다.

“아니에유. 엄니는 쪼금 전에 아랫마을루 볼일 보러 가셨구먼유.”

검둥이가 갑자기 짖어대며 부산을 떨자 마당에 계시던 순덕이 어머니가 낯모르는 손님이 찾아오나 싶어 부엌에서 나오셔 사립짝 앞으로 나가셨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던 외삼촌이 순덕이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시며 갑자기 머리를 갸웃거리셨다. 그러자 서로 마주 바라보시던 순덕이 어머니도 역시나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쪽마루에 앉아 계시던 외삼촌이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리시며 나에게 낮은 소리로 물으셨다.

“상민아, 저 아주머니는 누구라냐?”
“순덕이 엄니유 우리 집에서 한식구처럼 사는디 왜유? 뭔 일이라두 있는 감유?”

외삼촌에게 도리어 반문을 했다. 그러자 내 말을 듣고 계시던 외삼촌이 자꾸만 순덕이 어머니 얼굴을 짯짯이 바라보셨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 나셨는지 머리를 끄덕이시며 말씀하셨다.

“상민아! 저 아줌니 언제부터 니네 집에서 같이 살았냐? 참 조선 땅덩어리 좁아터졌다구 허드니 이를 두구 허는 말인가 보네 그려. 세상에 저 어린것 데리구 저리라두 살려구 허니 참 딱하지 딱혀! 그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어디루 떠나가번지더니 전생에 무신 인연인가 하필이면 내 누이동상 집에서 만나게 되네 그려.”

외삼촌이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시자 순덕이 어머니도 그제서야 기억이 떠오르신 듯 외삼촌에게 수줍은 얼굴로 머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외삼촌도 같이 고개를 숙여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셔 이미 서로 잘 알고 계신 듯 보여 무척이나 서먹했던 분위기가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

순덕이 어머니가 순덕이와 함께 지난해 늦가을 처음 우리 집에 오셨을 무렵이 생각났다. 어머니가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종이 위에 글로 쓰셔 물으시니 순덕이 어머니가 다시 비뚤배뚤한 글씨로 전라도 ‘운주’ 라고 쓰셨다.

그래서 내 어림짐작으로 삼촌이 이사를 가신 그곳과 거의 같은 지역이라 서로 간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덕이 어머니는 외삼촌이 어찌 그 먼 곳 자기 고향에서 머나먼 이곳까지 오셨나 생각하시며 반가운 마음으로 서둘러 점심밥을 지으시려 쌀을 가지러 바가지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외삼촌은 쪽마루에서 일어나셨다. 집터라고 통틀어서 몇 발짝 거리밖에 되지 않지만 열약하기 짝이 없는 그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내 어머니와 내 모습이 측은하셨던지? 아니면 뒤늦게라도 본마음이 들어서 그러셨는지? 쓸쓸한 표정으로 두루두루 살펴보셨다.

그러다 쪽마루 한쪽에 놓인 생선 비린내를 물씬 풍기고 있는 젓갈 동이를 유심히 보시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산자락 밑에 유난스레 커다랗게 보이는 종구네 기와집을 바라보시며 나에게 물으셨다.

“저 집이 이번에 새루 지었다는 종구네 집이라냐? 집 하나는 자기 욕심대루 양껏 큼지막허게 지었구먼.”

동네 사는 고향 사람들 누구인들 다 그렇게 하였겠지만 모태를 묻어 두었던 곳 몇 년 만에 찾아온 고향이라 그런지 감회가 깊으신 듯했다. 그리고 키 낮은 싸리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이는 고향 마을 이곳저곳을 놓치지 않으시려 어렸을 적 추억이 서린 고샅길 구석구석까지 짯짯이 바라보셨다.

그런 애틋함처럼 산자락 밑 큰길가엔 읍내 장터에 갔다가 여유롭게 마을길로 들어서는 순아네 소달구지에서 울려 나오는 워낭 소리가 검푸른 벼 이삭 등을 타고 나지막한 둔덕 너머로 낭랑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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