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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57 조회 : 1,120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갈게는 갈댓잎을 먹고 살아야 하느니라.’

그런 말이 얼핏 듣기엔 그럴듯해도 또 다른 일면(一面)에는 무척이나 거부감이 오는 소리 중의 하나였다. 자라 오는 동안 그 말을 내 어머니는 물론 동네 어른들로부터 참 귀가 따가울 정도로 수없이 들으며 살아왔다. 좀 더 정확히 말을 하자면 지각(知覺)이 들어 그런 말들이 시사(示唆)하는 의미를 알게 되어 나름대로 그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갖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코흘리개 어렸을 적엔 철없이 또래 아이들과 그저 어울려 놀기에 바빠 그런 말 자체에 주의를 기울여 본 적도 없어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할 듯싶다. 너무 어렸던 탓에 또 관심을 둘 만한 의식을 갖지도 못하여 그저 어른들이 늘 스스럼없이 하시는 말 정도로만 알았다.

그리고 국민학교 시절엔 ‘뱁새가 황새걸음 따라 가려고 하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말을 듣고 배우게 되었다. 어린 내 의식으로는 가난하게 살면서 잘사는 집 사람들 흉내를 내는 것에 대한 금물(禁物) 정도로 알았다.

그러니까 되돌려 기억을 해 보면 국민학교 4학년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둥그런 바퀴의 바퀴살들이 햇볕에 반사되어 멀리서 바라보아도 은빛이 번쩍번쩍하는 두 발 자전거를 탄 종구가 으스대며 고샅길을 다니던 것이 그렇게 부럽고 탐이 났었다. 그래서 나도 갖고 싶은 마음에 멋모르고 어머니에게 사달라 조르다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그토록 실감나게 혼쭐이 나면서 들은 말이었다.

그저 어린 생각에 ‘종구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그렇게 갖고 싶은 것 다 가질 수 있고 삼시 세끼 밥도 하얀 쌀밥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지만, 가난한 나는 시커먼 보리쌀에 감자가 더 많이 섞인 감자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가?’하며 체념하듯 늘 서운하고 부러운 마음을 갖고 살았다.

그렇게 무디어진 사고가 서서히 논리적으로 깨우쳐 가는 5학년 때부터 너무도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삶의 질적인 차이에서 오는 불만을 비록 겉으로 터놓고 말은 못해도 은연중 그 모든 불만을 어머니에게 갖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기엔 그럼 나는 가난한 뱁새라 치고 종구는 부유한 황새란 말인데 한마을에서 똑같은 해에 태어난 우리들이 ‘뱁새와 황새’로 따로 구분되었을 리는 없는 것 같아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동네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종구와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주 옛날에 외갓집은 그리 부유하지는 못하였어도 양식 걱정 없이 살았고 외할아버지가 나름대로 덕망을 쌓아 모든 동네 분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셨다고 했다.

그리고 종구네 아버지도 전라도에서 맨 처음 이곳 우리 마을로 이사를 왔을 때 너무도 생활이 간고하여 집 한 채 얻을 형편이 되질 못했다. 연로하신 노부모님들과 기거할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여 외할아버지가 바깥 행랑채를 내주셔 그곳에 같이 살면서 농사철에 동네 남에 집일을 거들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무엇이 이렇게 운명을 뒤바꿔 놓았나 하고 숱한 의문을 가졌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된 것은 내 나이 13 살 되던 해 국민학교 6학년 때 이른 봄이었다. 연초록 움의 싹을 틔우는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뜰 앞 매화꽃이 곱살하게 피어오르려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쪽마루에 앉아 저녁밥을 먹을 때였다.

진종일 장사를 하시느라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시는 어머니가 너무도 안쓰러웠다. 온갖 무거운 짐을 어머니에게 남겨주시고 그리도 허무하다 못해 비참하게 생을 달리하신 내 아버지에 대한 아픔과 미움이 앞서 가슴에 담고 있던 울분을 넋두리처럼 하고 말았다.

“참! 종구는 복두 많아 조상님 잘 만나서 떵떵거리고 사는디, 우리 집은 그 잘난 조상님 복도 없어서 이 고생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것네.”

그러자 밥을 드시던 어머니께서 내 말을 들으시고 눈을 잔뜩 흘기시며 말씀을 하셨다.

“그래 니 눈엔 종구네 집이 그렇게 부럽더냐? 아무리 똥배 부르게 큰소리 치구 살아 봤자 본바탕은 절대루 못 감추는 법이여. 허기사 ‘꿩 잡는 게 매’라구. 니놈 말마따나 죽은 조상님 귀신들이 돌봐줬나는 모르것지만, 종구네 애비 말로는 그새 동안 일본 놈 밑에서 머슴살이하면서 세경으로 받아 모아 두었던 돈으로 법적 절차를 밟아서 정당하게 샀다구 우겨대지만, 동네 사람들 알 사람은 다 아는 일인디 그까짓 머슴 세경이 을매나 된다구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긋다. 패망을 한 일본 놈들이 그새 중간 을매나 못된 짓을 했던지 원한 있는 사람들헌티 몸둥이에 맞아 죽을까 봐 야밤에 정신없이 대충 옷 보따리만 챙겨 들구 도망칠 때, 그 뭐시냐 그 먼데 부산 땅까장 신병 안전을 위한 뒷바라지를 해주고 일본으로 가는 배를 무사히 탈 수 있게 해준 대가를 톡톡히 받아 그 돈으로 엄청나게 많은 떵 덩어리를 거저 얻다시피 했으니 아주 엄청스런 횡재를 한 거지 뭐.”

나에게 쉽게 이해를 시키시려는 듯이 상세하게 설명을 하시며 그런 종구네 집을 무척이나 아니꼽살스레 생각을 하고 계셨다. 그렇게 내막을 전혀 몰랐기에 부럽게만 보이던 종구네 집 재산의 형성 과정의 깊은 내막을 상세하게 속 시원히 모두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안 보는 데서는 다른 아이들한테 ‘우리 아버지가 두 다리 없는 절뚝발이 병신이고 허구헛날 술독에 빠져 산다.’는 말을 하며 그리 심하게 흉을 보았다. 이제는 그런 종구에게 전혀 기죽지 않고 나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영향으로 그해 초여름 아카시아 꽃향기가 산바람 따라 온 산골짜기에 가득 퍼져 날 때
비석골에서 종구와 심하게 싸웠던 일로 지금껏 두 집 사이에 숱하게 얽힌 사연 속에 처절한 아픔을 당하는 악순환이 거듭되어 왔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종구네 아버지가 우리 집에 쌀 한 가마니를 주었는지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갈 것 같았다. 그래도 어머니의 미심쩍은 행동에 짙은 의아심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물론 집집마다 보리쌀이 거의 다 떨어져 가는 여름 장마철에 그나마 남아 있는 양식이라고는 하지(夏至) 때 캐낸 감자뿐이었다. 그토록 어렵기만 할 때 쌀 한 가마니가 갖는 상징적 의미가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겐 실로 엄청나게 컸었다.

어머니 입장에서 그 어려운 고비를 넘겨 식구들과 굶지 않고 살아남으시려고 종구 아버지와 옥순이 어머니 사이에서 어떤 큰 역할을 하셨는지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암튼 종구 아버지가 주는 쌀 한 가마니를 선뜻 거절치 못한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따로 있었다.

물론 남의 빚에 이자를 갚지 못한 죄로 그리 되었으나 어린 나의 꿈과 희망이었으며 추억이 어린 생명 줄이었던 논 세 마지기를 빚에 쪼들리다 못해 어이없이 잃어버리게 한 장본인인데 옥순이 어머니가 재혼을 하시려 하는 그 상대가 하필이면 종구 아버지였다.

내 아버지가 돌아 가셨을 때 동네 사람들 앞에서 선심을 쓰는 것처럼 주었던 산자락 땅 몇 평에 모신 아버지 산소를 파 가라고 까지 하면서 그토록 모질게 고통을 주어 쓰라린 아픔을 당했으면서도 그런 기억들을 모두 잊어버리시고 종구 아버지의 그런 일에 깊이 관여(關與)를 하셨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어찌 되었든 옥순이로부터 받는 원망 또한 쉽게 넘겨서는 안 될 일이기에 양심에 큰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듯이 어렵기 그지없던 그때 너 나 할 것 없이 빈곤한 삶에 허덕였다. 불행하게도 가뭄과 기근이라도 겹치는 보릿고개 춘궁기에는 등에 바짝 달라붙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휑한 눈으로 먹을거리를 찾아 산과 들녘으로 나섰다. 그래서 송홧가루는 물론 송피도 벗겨 먹었고 들녘에 나는 나물들을 뜯어 나물죽으로 연명을 하며 살았다.

‘하늘도 막지 못한다.’는 처절한 가난에 종속(從屬)되어 살았던 우리들 모두는 어쩌면 산에 소나무를 갉아먹고 사는 송충이와 강둑의 억센 갈대밭에 사는 갈게처럼 처절했던 한때를 겨우 넘기며 살아남은 기억들이 애탄하게 남겨졌다.

안마당 머리에 조금은 철이 이른 듯싶게 빙빙 돌고 있던 예닐곱 마리 고추잠자리 중에 수컷인 빨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빨랫줄에 걸쳐 놓은 바지랑대 끝에 앉아 간당간당하다 다시 일어서 몇 번쯤 주위를 빙빙 돌다 어디론가 날아가려나, 햇살에 곱게 물들어 가는 새털구름이 여유롭게 떠 있는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싸리 울타리 더북한 풀숲에는 살이 쪄 배부른 방아깨비가 긴 다리에 연한 날개를 파닥이며 둔한 몸짓으로 날려 했다. 그러자 마당에 놀고 있던 순덕이가 잡으려는 욕심에 작은 돌멩이를 얼른 주워 어설프게 던지니 ‘푸드드득’ 소릴 내며 풀숲 사이로 다시금 숨어들었다.
아주 어설프게 집어 던진 돌멩이가 애매하게 앵두나무 앞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늘 밑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천연덕스럽게 졸고 있던 닭들이 돌멩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푸드득거리며 벌떡 몸을 세워 마당으로 빠른 걸음을 하고 순덕이가 방아깨비를 놓쳐 무척 아쉬워하기에 울타리 풀숲에 다가서 이리저리 한참을 뒤척여 겨우 방아깨비를 잡아 기다란 두 다리를 손끝으로 쥐니 마치 방아를 찧듯 몸을 끄덕거렸다.
그런 모습이 퍽 재미 있게 보이는지 순덕이가 내 곁으로 바싹 다가와 작은 손에 쥐어 주니 저도 나처럼 따라서 해 보려 했다. 그렇게 흉내를 내보려다 그만 방아깨비를 놓쳐 버려 죽어라 날개를 푸덕이며 조금 멀리 달아나자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어 마구 비벼대며 커다랗게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귀엽게만 보였다.

햇살이 자글자글하게 내리쪼이는 방죽가 맷맷한 미루나무에서 아픔으로 메말라 까칠해진 우리네 삶을 대변(代辯)하듯 울어대는 참매미 소리가 요란스런 만큼 처량하게 들려왔다.

펑퍼짐한 둔덕 아래 검푸른 벼 이삭 등을 타고 넘어 아랫마을 둥구나무 아래서 뜨거운 한낮부터 풍물 소리가 구성지게 들려왔다.

온 동네 어른들이 한데 어울려 울려 퍼지는 풍물 소리에 맞춰 춤을 추시는 모습들이 싸리 울타리 너머로 보였다. 상수네 아버지가 솜씨 좋게 두드리시는 꽹과리 소리가 유난스레 쨍쨍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이번에 각 마을에서 뽑힌 면의원들이 어제 면사무소 회의실에 모여서 뽑은 면의회 의장 선거에서 병수네 아버지가 당선이 되셔 축하를 해주는 것 같았다.

이제는 명실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면내 유지로 염대장님이라고 불리는 막강한 분과 쌍벽을 이뤄 치열한 접전 끝에 시대적 변화를 요구하는 젊은 세대들의 힘을 얻어 이변을 일궈내시며 선출이 되신 듯했다.

그 염대장이라는 분은 면내에서 오랜 세월 동안 가지고 있던 풍족한 재산을 기반으로 전란 중에는 치안대장도 했고 휴전이 된 후에는 면내에서 대한청년단 단장도 역임하였으며 그리고 얼마 전까지 면내 의용소방대장도 하셨다.

전깃불 하나 안 들어오는 아주 외진 곳 들메 마을 면내에서도 제일 낙후된 마을에 모처럼 만에 큰 경사가 일어난 것 같았다. 면내에서 땅 좀 많이 가지고 사는 종구네 빼놓고는 뭐 하나 제대로 내놓을 수 없는 빈약한 마을이었다.

수 해 동안 국민학교에서 운동회 때 하는 부락대항 계주는 물론 면에서 일 년에 한번 면민 침목을 위해 실시하는 척사(윷놀이)대회에서도 단 한 번 우승은커녕 준우승도 해본 적이 없어 경사는 큰 경사임에 틀림이 없는 듯했다.

그런 이유였는지 용꽃 마을에 있는 주조장에서 배달하는 아저씨가 짐자전거에 나무로 만든 막걸리 술통을 자전거 양쪽에 두 개씩이나 달고 신바람 나게 벼랑바위 앞을 지나 둥구나무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덩달아 들뜬 마음에 어머니가 소나무 판자를 깎아 만들어 주신 나막신을 끌고 동구 밖 둥구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발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게다짝이 맨발바닥에 달라붙어 부딪치는 소리가 ‘따닥따닥’ 하며 들려왔다. 기현이네 집 앞을 지나려는데 발밑에 무엇인가 미끈거리게 느껴져 내려다보았다. 볼썽사나운 흥남이 아저씨네 개가 똥을 길바닥에 누웠는지 발에 밟혔다.
개똥이 게다짝 밑바닥에 달라붙어 얼른 한쪽을 벗어 풀잎에 대고 쓱쓱 문대어 신으려니 너무도 약이 올랐다. 암튼 수일 내로 검둥이를 시켜 꼭 야물딱지게 혼을 내주려고 마음먹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둥구나무 밑에 다가섰다. 그렇듯 동네 경사가 어른들 만의 몫은 아닌 것처럼 동네 꼬마들까지 모두 모여 울타리를 이루는 듯 빙 둘러서 풍물을 치시는 어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서린 우리네 한을 한데 모아 털어내듯, 머리에 눌러쓴 벙거지에서 열 발도 넘을 듯 긴 백지 꼬리 상모(象毛)가 동글동글 원을 경쾌하게 그리며 절묘하게 흔들렸다. 고샅 갓길 흙 담장엔 구성진 풍물 소리에 집집마다 아낙네들이 몰려나와 담 너머로 고개를 반짝 들고 있었다. 흥겹게 어울려 격 없이 춤을 추시는 어른들의 모습이 마냥 재미있게 보이셨는지 안안(晏晏)하게 웃음을 지으며 눈을 모아 바라보고 있었다.

둥구나무 그늘 아래는 널따랗게 멍석들이 펼쳐 있고 네모난 상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잔칫집 같은 분위기가 풍물 소리 속에 무르익어 가고 벌써부터 한곳에서는 술좌석이 벌어져 동네 어른들이 호활(厚德)하게 너털웃음을 짓고 계셨다. 막걸리가 담긴 술 주전자를 두어 차례 흔들어 술사발이 넘쳐날 정도로 부어 주고받으시는 모습들에 묻어나는 넉넉한 정이 더욱 더 후덕(厚德)하게 보였다.

평상 위에는 병수네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이 안줏거리를 준비하시고 계셨다. 둥구나무 밑 한쪽 외진 곳엔, 삼식이 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시며 가마솥에 장작불을 때고 계셨다. 병수 아버지가 당선이 되셔서 동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려고 한턱을 내시는 듯했다. 그러니까 엊저녁 무렵 동네가 요란하게 ‘돼지 멱따는 소리’가 한차례 그리 시끄럽게 들리더니 돼지 한 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삼식이 아버지가 뜨거운 김이 줄줄 흘러내리는 가마솥 뚜껑을 여셨다. 허옇게 확 올라오는 뜨거운 김 속에 부연 살이 투실투실하게 붙은 넓적한 돼지 뒷다리를 하나를 꺼내시려고 이저리 뒤척이셨다.

그리고 삼식이 아버지가 조금 전부터 덥지도 않은지 아궁이 앞에 바짝 달라붙어 있던 방앗간 순태아저씨를 향해 말씀하셨다.

“아따, 이 사람아! 저리 좀 비키라구 뜨건 물에 디어 벗어질라. 얼른 비키지 않구 뭐허는가? 날 한질라 더워서 죽것구먼. 무신 청승을 떠느라구 그 뜨거운 디에 오리 궁둥이 매냥 잔뜩 쭈그려 앉아 있나 내사 알다가두 모르것네 그려.”

그러자 아궁이 앞에 앉아 삭정이 하나를 꺾어 실없이 불장난을 하시던 순태아저씨가 멋쩍은 얼굴로 자발머리없이 몸을 촐싹거리시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내가 맥없이 기냥 요기 앉아 있것는가? 포수가 노루목을 지키드라구. 남들이야 비곗덩어리에 푸석푸석한 살코기가 좋을라나 몰라두, 날랑은 내복 중에서두 폭삭허게 익은 새끼보가 허벌나게 좋더구먼 그려.”

그러자 가마솥에서 잘 익어 김이 뭉실뭉실 나는 묵직한 뒷다리를 칼끝을 깊숙이 찔러 칼자루에 힘을 잔뜩 주어 싸리 채반 위에 얼른 들어 올려놓으시던 삼식이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참! 자넬랑은 지 아무리 억센 타관 객지 난전 어디다가 빨가 홀딱 벗겨 놔두 죽지는 않것네 그려. 저리두 넉살머리가 좋으니 뭔 짓은 못헐 것이여.”

삼식이 아버지께서 돼지 뒷다리 고기가 얹혀 있는 싸리 채반을 들고 평상으로 가시고 동네에서 그럭저럭 말마디나 한다고 하는 분들이 거의 다 오신 듯했다.

그리고 동네에서 둘째가는 부자인 영택이 아버지의 모습도 보였다. 비록 가진 것이 풍부해 능력이 있다 하여도 좁은 동네에서 한꺼번에 각시를 두 명씩이나 데리고 살아 동네에서 평판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더욱이 두 번째로 들어 온 각시는 나이가 아주 어려 막말로 딸자식 나이 정도밖에 되질 않았다.
그런 탓에 동네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치기가 껄끄러웠는지 그리 한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그런데 자기 딴에는 평소에 병수 아버지와 교분이 두터워 이번 잔치에 막걸리 한 통을 내시며 아주 오랜만에 동네 사람들 앞에 어렵게 얼굴을 보였다.

그러나 유독 종구 아버지만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묵골 정영감네 일로 신경을 쓰다 보니 심신이 피로해서 그런 것 같지만 깊은 속내는 따로 있었다. 시류의 변화에 따라 면내에서 새로이 얼굴을 드러내는 그들 모두가 종구 아버지 눈에는 그리 탐탁하게 보일 리 없었다.

한 세대가 지나고 나면 다음 세대가 오는 것이기에 서서히 쇠잔해져 가는 자기의 위치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해 오는 거부감인 듯해 보였다.

어찌 보면 그런 거부감은 그분의 성격 탓으로만 돌려 지나친 아집이라고 규정하기보다는 숱한 세월 동안 자기의 그늘 밑에서 눈치를 살피며 살았던 주위의 숱한 소작농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힘이 없어 보이던 소작농들이 급변하는 세태에 따라 서서히 깨우쳐 종구 아버지의 영역을 벗어나 하나둘씩 등을 돌리려 했다. 어두웠던 지난날 자기로부터 좀 지나치다시피 당했던 일부 사람들은 자기를 혐오하여 비인간으로 치부하여 내몰고 가려는 작금의 현실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깔려 있는 동네 사람들 앞에 선뜻 나서기가 꺼림칙하였던 것 같았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물질이 풍요로운 만큼 물욕에 어두워져 흐려진 정신은 극도로 피폐해져 주위와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루며 더불어 살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는 것 같았다. 자기 스스로 소외된 공간에 몸을 가두고 외부와 단절하여 폐쇄적으로 살아가야만 하니 언젠가 공민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의미 깊게 배워 뇌리 속에 남겨 놓았던 말이 떠올랐다.

‘남에게 덕을 베푸는 자는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있어 결코 외롭지 않다.’는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이란 말이 새삼스레 다시 한 번 떠올랐다.

마냥 푸르고 맑게 갠 여름 하늘도 동네에서 일어난 경사를 함께 축하해 주는 듯했다. 높이 치솟아 오르는 농악 소리에 깜짝 놀란 듯 느티나무 잎사귀 뒤에 몸을 잽싸게 숨긴 매미는 그 뒤로는 단 한 차례도 울지 않았다.

그리고 ‘고을 원님 덕분에 나발 분다.’고 동네 아이들은 아주머니들이 도마 위에 고기를 올려놓고 써는 곳에 침을 꿀꺽 삼키며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넌지시 고기 한 점이라도 얻으면 후다닥 들고 한쪽으로 가서 조금씩 베어 먹으며 그리도 좋아했다.

동네 사람들이 풍물 소리에 맞춰 온갖 시름 다 잊고 격 없이 한데 어울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시큼한 땀내 찌든 살을 맞대고 덩실덩실 춤을 추니 그런 모습들 하나하나가 정겹기만 했다. 그리고 일부 나이가 지긋하신 동네 아주머니들은 함께 손뼉을 치시며 어울리셨다. 동네 사람들 속에 어머니와 오랜만에 얼굴을 보게 되는 옥순이 어머니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옥순이 어머니가 반갑기보다는 한발 앞서 종구 아버지와 재혼하려고 결정을 하게 된 깊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 보았다.

늘 남들 앞에서 종구 아버지가 거드름을 피우며 버릇처럼 말씀하시는 동서남북 온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자기 땅덩어리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 많은 재산이 탐이 나서 종구 아버지와 재혼을 하려 마음을 먹었는지 퍽이나 궁금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내 친구 옥순이가 나보다는 몇 배 더 많은 혼란스러움에 빠져 고심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건넬 수 없이 갈피를 잡지 못해 극도로 어수선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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