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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6 조회 : 2,009




1950년대 논산군내에는 논산과 강경,두 개의 읍이 존치하고 있었다.
제반 행정기능의 중추를 이루는 기관인 군청과 지역에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청이 논산 읍내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법질서를 유지하는 사법 기관인 대전지방법원 강경지원및 대전지방검찰청의 강경지청은 물론 관활 지역의 치안질서를 담당하고 있는 관서인 강경경찰서까지 강경이란 지명을 그대로 상용하고 있었다.

그때 강경경찰서의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세운 건물로써 붉은 벽돌로 쌓아 올려 정문에는 둥근 타원형의 출입구를 만들어 겉으로 보기에는 준엄하면서도 다소는 선입관이 거북스럽기도 했었다.

아마도 이런 경향은 아주 옛날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어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강경이 상업도시로 전국에 명성을 높게 떨칠 정도로 발전했단 그 유명세의 후유적인 영향을 그때까지도 지속적으로 받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처럼 강경이라는 소읍이 주는 선입관은 싫든 좋든 간에 지난 세월들이 유산처럼 남겨 놓은 옛것에 대한 익숙하지 못한 고집스런 애착과 그와 비교가 되는 우리들 몸에 친숙하게 와닿는 자잘한 가옥들이 주는 거북하지 않는 수더분함이 공존하는 그런 곳이었다.

좀더 쉽게 말을 하자면 예스럽게 지어진 건물들 앞에 밤의 어둠을 밝혀주는 가로등이 달려있는 전신주를 비켜 바로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서면 온 주위가 서운하리만큼이나 어둠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그렇듯 밝음과 어둠이 확연하게 다른 모습으로 대두되어 조금은 억지스런 예스러움과 친근하게 다가 설 수 있는 부담없는 촌스러움이 공존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더불어 발전의 역동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멈춰버린 듯한 아쉬움에도 결코 섵부르게 채근대지 않는 느그한 기다림 속에 편안한 휴면을 취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은 읍내이었다.

그나마 교육 시설은 중고등학교 과정인 보통상업고등학교가 논산군내에서는 최초로 강경 지역에 세워지게 될 정도로 교육면에서 질이나 시설이 군청ㅅ재지인 논산 읍내보다는 월등하게 발전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진학 년령에 다달은 자녀를 가진 군내의 모든 학부모들이 강경 읍내에 있는 수준이 높은 학교로 진학을 시키려고 온갖 힘을 썼었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였다.
금강 나루를 건너 부여군에 속해 있는 그 면적이 아주 넓은 세도면은 물론 조금 멀리 떨어진 서천군 한산면에서 까지 향학을 위해 강경지역으로 운집 하였다.

그보다 더 했던 것은 엄연히 행정구역이 다른 타도인 전라북도 익산군내 황화면,용안면 및 여산면과 망성면에 사는 학생들 까지도 강경으로 대거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그런저런 이유로 입시생들이 강경읍에 있는 학교들에 편중되다 보니 자연스레 경쟁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군내 학교에서도 상위권의 성적을 갖인 학생들이 대거 몰려 경쟁이 치열하기도 했었다.

그런 탓에 톻학이 여의치 못한 타지방에서 온 학생들이나 같은 군내의 먼 거리에 사는 학생들을 상대로 독방을 내주어 하루 세끼를 먹여주고 재워주는 학생들을 상대로한 하숙집들이 읍내에 그리도 많았었다.

그리고 도시 기능의 활력를 불러 일으키는 상권 또한 내륙에 치중해 있어 교통이 그리 발달하지 못했던 그 당시 논산읍내 보다는 강경이 일찍부터 금강 줄기를 따라 군산으로 이어지는 서해안에서 일어나는 간조와 만조를 적절히 이용하는 수로로써 옛부터 수상 교통이 발달하였다.

그로 인해 다량의 신선한 해산물이 반입되어 오일 마다 열리는 장터를 통해 내륙지방으로 다량 방출 되었다.
그리고 그에 반하여 내륙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들과 물물로 교환하는 형태가 활달하게 이루워졌다.

그로 인해 장날에는 각지에서 몰려드는 상인들과 장을 보려 온 사람들로 파시까지도 성황을 이뤄 작은 소읍인 강경 땅이 황산동에 있었던 놀뫼포구를 중심축으로 온통 들썩거렸다.

그런 탓에 이북의 평양과 약령시장으로 잘 알려진 대구를 비롯하여 전국 3대 시장으로 그 명성이 전국적으로 알려질 만큼 상권이 발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호황에 힘 입어 객주가 생기고 나룻터에 주막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문전 성시를 이루웠기에 자연스레 논산보다는 한 수 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경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와 발걸음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 때는 시쳇말로 ' 논산이 강경 덕에 먹교 산다' 는 말이 나오기도 했었다.

그런 이유였는지 강경과 논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채운면민들에게는 양쪽 읍내 까지의 거리가 거의 비슷비슷했었다.
그래도 자연스럽게 논산읍내보다는 강경 읍내 쪽으로 내왕을 자주 하여 친숙도가 논산보다는 더하였다.

들메마을에서 강경 읍내로 걸어서 가려면 동구 밖 나들목을 거쳐 화산리 들주막으로 빙 둘러 갈 필요가 없었다.
마을 앞 들녘 북서쪽으로 가로 질러 갈 수 있는 논둑길을 따라 신다리 쪽으로 가면 거리가 더 가까워 그만큼 시간이 절약되었다.

마을 밖을 나서 신다리까지 걸어 가는 과정에 별도로 난 길이 없었다 . 그저 온 사방이 들녘 논배미들로 둘러 쌓여 있어 사람 한명이 겨우 걸어갈 수 있는 비좁은 논둑길이 전부였다.
그 길을 이루고 있는 논배미의 생김새에 따라 대여섯 번쯤 꺽어 휘어돌아야 신다리에 이를 수 있었다.

그 신다리에 올라서면 읍내 강경으로 이어지는 십리 자갈 길인 신작로가 길게 뻗어나 시원스럽게 보였다.

신작로 양 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높다랗게 자란 미루나무와 더불어 읍내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올곧게 바라 보여 아늑한 시골길의 운치를 나름 자아내고 있었다.

강경읍내로 진입하는 나들목은 길이 네 갈레로 나뉘어 있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 나들목을 일컬어 사주거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읍내 앞으로 흐르는 강경천을 건너려면 수문이 여러개 달려 있는 다리를 건너야만 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곳 다리를 사주거리다리라고 불렀다.
그 다리 입구에는 외딴 작은 초가 지붕의 주막집이 능수버드나무를 벗 삼고 있어 오고가는 길손들의 유일한 쉼터가 되었다.
그래서 멀기도 하고 또는 가까운 길을 걸어 온 뭇 남정네들이 코와 입으로 드리 마신 자갈길 흙먼지가 낀 껄끄러운 목구멍을 걸쭉한 막걸리로 풀어 넘기는 곳이었다.

그렇게 강경읍내를 향해 걷노라면 사주거리까지 길이 시원스럽게 빤히 바라보였다.
그래서 시 오리 길이 괘나 멀게 느껴졌어도 눈으로는 가깝게 보였다.
그리고 날이 맑은 날에는 거리가 가참하게 느껴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멀게만 보였다.

그리 활력적이고 진취적인 강경읍내를 자세히 바라보노라면 옥에 티처럼 소읍의 분위기와는 다소 덜어지는 느낌을 주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옥녀봉과 마주 바라보고 있는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채운산이었다.
그때 채운산의 모습은 그제서야 가꿔나가려 하는 민동산 수준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물론 산에 향취를 자아내는 다북솔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기도 하였지만 대다수 주종을 이루는 것은 덜 자란 아카시아 나무와 어렸기에 키까지 낮은 갈참나무들이었다.

아직은 덜 자란 나무잎사이로 군데군데 헐벗은 모습의 황토가 들어나 보여 허전함을 자아내게 히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바로 산 아래에 강경역사가 자리를 하고 있어 오르내리는 기관차들이 중간에 급수를 받으려고 쑥돌로 조금 높게 쌓아 올린 급수탑 앞에 기다리는 모습이나 타고 갈 손님을 기다리느라 홈에 멈춰 서 있는 기차의 모습으로 넉넉하게 채워진 역사의 전경이 채운산과 함께 어울려져 나름 흡족치는 못했어도 다소는 허전해지는 마음을 완화시켜 주었다.

그리고 산 정상 부분에 팔각의 형태로 지은 정각이라도 하나 있었기에 궁색하게나마 낮은 민둥산으로써 구겨진 체면을 조금이라도 지킬 수는 있었다.

그에 비해 옥녀봉도 채운산과 높이는 얼추 같았다.그래도 정상부에는 이백 년의 수령을 넘긴 두 그루와 또 다른 한그루의 팽나무가 위엄있게 자리를 버텨 서 있어 고연함을 한껏 자아냈고 곰바위를 비롯한 몇개의 바윗돌들이 적당한 자리에 누워 있어 나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꼭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일몰 직전에 옥녀봉을 휘감고 그도 욕심에 차지 않는지 금강들녘 구석구석까지 세세히 훓어 붉게 불태우는 저녁노을의 장관이었다.

하루의 해는 온 종일 꽤 한번 부리지 않고 광활한 들녘을 짯짯히 헤집었다. 그런 해는 저녁 무렵이면 지친 몸으로 영원한 길동무인 어둠살을 데리고 어김없이 옥녀봉에 올랐다.

그렇게 하루의 소임을 다한 것을 만 천하에 자랑스럽게 알리려는 듯 스스로 붉게 불태우며 과묵하게 기울려하였다.

그쯤이면 시 오리 떨어져 있는 들메마을에서도 그런 장엄하면서도 황홀함에 극치를 이루워 놓는 노을의 영롱한 자태가 확연하게 바라보였다.

그럴라치면 노을은 가던 발길들을 멈춰 두 눈을 모아 바라만 보는 우리들의 마음을 꽤뚫어 노을의 테두리 안에 갇우려 하였다.
그런 후에 감흥으로 도취시켜 끝내는 심취되는 마음을 무아지경에 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런 결렬하게 불태우는 노을이 남기는 감동 속에 어린 나는 늘상 이렇게 되뇌여 감사하며 살고 싶었다.

평생토록 '안빈낙도'를 주장하시며 살아오시다 이제 수 년동안 끌어 온 지병으로 신음하시는 내 외조부와 험한 세상 남은 자식 하나 마음에 다리 삼아 억척스레 살아 남으시려는 내 어머니와 그리고 지는 노을이 묵시적으로 예시하는 깊은 뜻을 차분하게 헤아리며 더는 슬퍼하지 않으려 기다리며 살겠노라고 굳히 입을 열지 않고 가슴으로만 내 뜻을 건내고 싶었다.

강경읍내와 채운들녘을 이어주는 나들목이 사주거리로 불리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길을 따라 서쪽으로 바로 가면 강경읍내의 시가지가 나오고 다시 길을 따라가면 전라북도 경계지역인 나바우 성당을 지나 전라도 땅 첫들머리인 용안 지역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석물공예가 발달된 함열에 이르고 조금만 더 가면 황토 고구마로 잘 알려진 황등을 거쳐 이리라는 중소도시에 닿을 수 있었다.

그 곳 이리(익산)는 교통의 요충지로 호남선의 끝 역 목포와 전라선의 마지막 역인 여수로 이어진 전라선과 연계되여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산과 연결되는 군산선이 있어 인근 장항과 이어질 수 있었다.

충남 서천군에 편입되어 있는 장항에는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세워진 장항제련소가 있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비철금속제련의 중심축을 이루웠었다.

강경 읍내 황산나룻터를 지나 금갈을 건너 세도 나룻터에 닿으면 그 지역에서 나는 참외가 그리 유명했었고 인근 자연부락인 임천을 거치게 되면 '한산모시'로 전국에 잘 알려진 곳 한산에 이를 수 있었다.

사주거리 중심축에서 뒤를 돌아 강경천 둑을 내려서면 들녘에 있는 채운을 거쳐 논산읍내로 이어졌고 그 길을 따라가면 교육도시 공주와 충남의 도청소재지인 대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북쪽으로는 강경천 위에 놓여진 다리를 건너면 성동면에 이르게 된다.
그곳을 출발하여 다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석성을 거쳐 백제의 한이 서린 부여 읍내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시 부여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칠갑산이 있는 청양 땅에 닿게 되었다.

그리고 반대 쪽인 남족으로 내려가면 강경의 상징물인 미내다리가 보인다.
아주 먼 그 옛날 충청도와 전라도를 연결 해 주던 유일한 가교였다.
채운면 삼거리에 있는 미내다리를 지나면 저 멀리 어슴하게 전라북도 익산군 망성면의 작은 마을이 보였다.

그 후 채운면 외곽지역 신용마을을 지나 화정리에 있는 동성부락을 거쳐 강병육성의 요람지인 육군 훈련소가 있는 구자곡면에 닿을 수 있었다.

그렇게 사통팔달로 길이 편리하게 이어뎌 사주거리라는 이름이 붙혀졌다.

채운면에서 강경읍내로 들어서려면 꼭 사주거리에 있는 다리를 건너야 했고 사람들은 그 다리를 일컬어 갱갱이 사주거리다리라고 불렀다.
그 사주거리다리는 역시 읍내 앞으로 흐르는 강경천을 건너고 건너가는 철교와 더불어 오랜 세얼의 흐름을 과묵하게 지켜 보며 사이좋게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철교를 막 지나 강경역으로 들어서기전 철로변 얕트막한 언덕 위에는 실로 오랜 세월 풍파를 견뎌 낸 팽나무 한그루가 오가는 길손을 의젓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그 언덕 아래에 바로 강경 상업고등 학교가 있었고 그 윗머리 쪽에 강경여중과 강경여고가 자릴잡은 남교동 입목에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길을 거너면 바로 강경 중앙 초등학교가 일제강점기 때 붉은 벽돌로 쌓아 올려 세워 놓았다는 커다란 강당과 함께 보였다.

들메 마을 뒷뜰 신다리 밑으로 남쪽과 북쪽으로 이어진 논산천 지류인 샛강의 개어구에 세워진 수문이 있었다. 그 수문이 수위를 조절하여 샛강이 밀물에 밀리면 강바닥이 거즘 드러날 정도로 물이 빠진다.

그 무렵엔 동네 또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양철통을 들고 샛강으로 달려가 얼른 풀밭에 옷을 벗어 던지고 앞다퉈 강으로 뛰어 들었다.

그 시절 너나 할 것 없이 놀이거리가 별로 없던 차에 밀물 때 물고기 잡기는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참으로 즐거운 놀이였다.
그리고 수확량에 따라 부모님들로 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취락구조상 사는 곳이 농촌이다 보니 쉽게 접할 수 있는 야채 정도로 반찬이 이루워졌던 식탁이었다. 그런데 민물고기 매운탕으로 온 식구들에게 새로운 미각을 선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 저마다 한마리라도 더 잡으려고 기를 썼었다.

그리고 강바닥에 엎드려 배를 미끈덕한 갯벌의 진흙에 문대면서 오후 늦 무렵에 썰물이 들어 올 때까지 몇 시간 동안 민물고기를 잡으면서 놀았다.

주로 붕어와 말조개가 많이 잡혔지만 드문드문 쥬둥이 양쪽에 수염이 달려 우습게 생겨 아주 미끈거리는 메기와 뱀장어도 운이 따르면 잡을 수도 있었다.
어쩌다 반갑지 않은 빠가사리에게 쏘여 손가락이 찢어져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썰물에 슬리게 되면 진흙의 갯벌을 뒤집고 온갖 풀풀들이 떠내려 와 강둑까지 가득하게 물이 차 올랐다,

그리고 갯벌 위에 널다랗게 펼쳐진 풀밭에는 갈게 (갈탱이)들이 다글다글하게 많이 몰려 다녀 눈에 자주 띄게 될 정도였기에 심한 경우에는 강둑길을 걷는 발 밑에 더러더러 밟히기도 했었다.

그리 오후내 재미있게 물고기를 잡으며 놀다보면 정말 시간이 너무도 빨리 흘러 때론 아쉽기도 하였다.
늦저녁 무렵에 다스한 노을빛 등에 넉넉하게 받으며 좁다란 논둑길을 따라 가득 채운 양철통을 손에 들고 저마다 웃는 얼굴로 마을로 되돌아 왔었다.

금강둑이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에서 강건너 서천군 마서면 으로 이어진 1960대까지만 해도 5일장이 서는 4일과 9일이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상인들로 황산나룻터(놀뫼포구)는 활기가 넘쳐났었다.

이처럼 번성기를 누렸던 소읍이면서 소읍답지 않게 상업도시로 성장했던 강경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근본적인 요인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호남선 철도와 군산선 철도가 일제강점기 때 세워지면서 철도가 강을 통과하는 수상운반을 대신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1912년 군산선이 개통되고 다시 10년 후인 1922년에 장항선이 개통되자 일제가 곡창지대의 쌀과 모든 물류를 수탈할 목적으로 세운 철도들이 강경포구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그 쇠갈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강경포구는 발동기선으로 근근이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호남고속도로가 개통 되었고 1980년 초에 금강하구둑이 완공됨으로 인하여 강경포구가 완전히 기능을 상실함으로 그 명맥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그리 영화롭던 한 시대를 마감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쌀을 대량으로 생산할 목적으로 서해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크고 작은 하천들의 입구를 막아 아주 넓은 갯벌을 간척을 해오던 일제의 뒤를 이어 그 사업을 재개하고저 둑을 막은 것이 금강하구둑이 생기게 된 요인이었다.

그렇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났던 선창가는 추억 속에 한 시대를 마감하여 조용히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랬던 강경이 그 세월의 흔적들을 붙들고 다가오는 또 다른 세월을 차분하게 시간을 두고 곰삭혀 세월의 흐름 속에 강경다운 맛갈을 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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