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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82 조회 : 2,012




동구 밖 거북바위 위로 몽실몽실하게 부풀어 오른 흰 구름이 마을 앞 들녘을 향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산기슭을 깎아 나직나직 층(層)을 이루어 놓은 천둥지기에도 검푸른 벼 이삭들이 알차게 들어 차 그리도 곰살갑게 보였다.
그런 오목조목한 모습들이 마음 한 자락에 진한 여운(餘韻)을 남기고 있었다.
더불어 욕심날 정도로 참한 옥빛하늘도 그 모두를 넉넉하리만큼 품에 감싸 안으려 했다.

푸른 산자락을 샅샅이 훑어 내린 물은 실개천을 이뤄 등 굽은 천수답 논두렁을 바지런히 비집고 흘렀다.
지대가 낮은 작은 수로엔 자줏빛 물옥잠 꽃이 섭섭지 않을 만큼 눈에 띄었다.
작아 앙증맞게 보이는 물옥잠 꽃이 넓적한 잎사귀 틈사이로 소곳하게 모습을 드러내 한줌 햇볕을 꼬옥 움켜쥐려 했다.

그런 작은 수로들이 모여 이뤄 놓은 계곡물은 더없이 맑아 물속이 유리알처럼 환히 들여다보였다.
물이끼 가득 낀 돌 틈에 야물딱지게 달라붙어 있는 고만고만한 다슬기들의 모습이 흐르는 물결 따라 잔잔하게 일렁이었다.
그런데 생뚱맞게 개구리 한 마리가 텀벙대며 물로 뛰어들었다.
뒷다리를 힘껏 흔들어 잘 침전(沈澱) 된 맑은 물을 온통 뿌옇게 흩트려 놓고 쉴 곳을 찾으려 눈을 휘둥글리고 있었다.
그러자 물 텀벙 소리에 배가 불룩하게 차오른 메뚜기들이 검푸른 콩잎사귀에 앉아 여유를 부리다 이리저리로 부산스럽게 뛰어내렸다.
그리고 낭창낭창한 줄기의 가늠한 벼 잎에 찰싹 매달려 곡예를 하듯 벼이삭을 가볍게 흔들었다.

방죽 가장자리에 민출하게 뻗어난 미루나무 우듬지 위에 솜털구름이 포실포실하게 피어올랐다. 제법 자란 작은 오리새끼들이 널따란 방죽 물위에 유연하게 몸을 살랑살랑 흔들어 헤엄을 치고 있었다. 때때로 둥그스름한 궁둥이를 잔뜩 치켜들고 자맥질하는 모습이 자못 우습기도 했다.

앞 들녘 물이 바짝 마른 논배미에는 먹이가 별로 신통치 않은지 왜가리 두서너 마리가 방죽 가장자리를 얼쩡거렸다. 그리고 검푸른 물풀들이 너부죽하게 떠 있는 곳에 목을 잔뜩 구부린 채 물위로 뛰어오르려는 피라미를 노리고 있었다.

된더위를 부추기는 한낮 해의 광열(光熱)은 온 들녘을 녹실녹실하게 녹아내리고 철로길 옆 나무전신주 꼭대기에서 까마귀가 자발스럽게 우짖었다. 아마도 정오 무렵 마을 앞을 지나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질 때까지는 그 자리에 멋대가리 없이 머물러 있을 것만 같았다.

철로가 기현이네 집 사립짝 양옆으로 수문장처럼 서 있는 해바라기가 둥그런 목을 무겁게 숙이고 있었다. 가을 김장 채소밭 가장자리에 수더분하게 피어난 백일홍이 두 식구 단출하게 살아 가뜩이나 외롭게만 보이는 작은 초가집의 적적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듯했다.

그렇듯 자연은 늘 담소한 모습으로 수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허나 동네 한두 사람들은 넉넉함이 넘쳐나는 부유함에 만족치 못하고 더 가지려 혈안이 되어 간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일부 동네 사람들이 지난 난리 때 있었던 복잡하게 얽힌 때 묻은 이해관계 때문에 피상대적인 사람에게 틈만 나면 과격하게 행동하려고 했다.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평온함이 점차 퇴색되어가고 있는 마을 모습이 더없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옥순이와 나는 살아가고 있었다. 처절한 전란으로 이미 빼앗길 것을 다 빼앗겼는데도 아직도 남아 꿈틀대는 크고 작은 시련들 속에 휩쓸려가야만 했다. 그런 삶의 분위기는 무엇이라 말로 형연키 어려운 갑갑함이 목을 조이다 못해 허전해지기만 했다.

멀찍하게 바라보이는 들 주막 정류장에 한차례 부연 흙먼지가 이는 듯했다. 그리고 강경 읍내에서 내달려온 버스 한 대가 멈춰서 몇 사람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아침나절 어머니와 함께 읍내로 가셨던 옥순이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푸른 들녘의 모습과 조화를 이룬 새하얀 모시옷이 햇살에 더욱 새하얗게 돋보였다.

산기슭 둔덕 밭에 우뚝 선 종구네 기와집 대문은 조금 전 있었던 상두네 아버지 일로 잔뜩 겁을 먹은 듯 육중한 대문이 굳게 잠겨 있어 적막하게 보였다. 이제 금년 가을걷이만 끝나고 나면 옥순이네 어머니가 저 집 뜰 안에서 종구네 집과 한식구가 되어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어색해졌다.
그로 인해 지난날의 다정했던 온유한 느낌은 간곳없고 옥순이 어머니로부터 사이가 자꾸만 멀어지는 것 같았다. 간접적으로 느끼는 내 마음이 이럴 진데 직접 당사자인 옥순이는 심정이 오죽할까 싶어 다시금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뒷산 비선봉에 검은 비구름들이 가빠른 움직임으로 음산하게 몰려들기 시작하여 아마도 한줄기 시원스레 소나기가 내릴 것만 같았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느라 차오른 가쁜 숨을 내몰아 쉬며 갈참나무 숲 우거진 언덕마루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비릿한 풀내음이 물씬 묻어나는 콩밭에서 언제 나를 보았는지? 기겁을 하여 황급하게 달아나는 어미 뒤를 따라 아직은 몸 가눔이 활달치 못한 꺼벙이 몇 마리가 콩밭 속으로 죽을 동 살 동 있는 힘을 다해 재빨리 숨었다.

아직은 파란 하늘이 그리 심하게 흐리지도 않은데 아니나 다를까! 소나기가 한차례 시원스레 내렸다. 한동안 작은 내 몸뚱이에 꺼림칙하게 들붙어 있던 크고 작은 고뇌들을 말끔하게 씻겨 내리는 듯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작은 초가집이 내려다보였다. 더러는 눅눅하다 못해 습한 곰팡내가 배어나고 구들을 놓은 갈라진 방바닥 틈새로 매캐한 연기가 스며드는 보잘 것 하나 없는 단출한 일간초옥(一間草屋)이었다. 하지만 늘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는 끈적끈적한 정이 곳곳에 속속들이 배어 있기에 내 작은 초가집이 눈 안에 살갑게 들어왔다.

그런데 요즘 또다시 바람이 났는지? 영역을 넓혀 이웃 새터 마을까지 거침새 없이 들락거리는 검둥이가 이웃 마을 어디쯤에서 늦장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반갑게 꼬리가 떨어져 나가라고 흔들며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이질 않아 조금 허전하게 보이는 사립짝 앞에 닿았다.

소갈머리 없이 소나기가 내리자 낮 동안 너럭바위 위에 겨울철에 먹으려고 햇볕에 널어놓았던 나물채반을 손에 드시고 밭고랑으로 나오시다 순덕이 어머니가 텃밭에서 묵은 된장 속에 깊이 박아놓았다 다음해 여름철에 꺼내 밑반찬을 하시려는지 철이 지나 퉁퉁하게 살이 차올라 익을 대로 익은 오이를 따고 계셨다. 그런데 소갈머리 없이 소나기가 한차례 내리자 낮 동안 너럭바위 위에 널어놓았던 나물채반이 비에 젖을까 걱정이 되셨는지 급히 밭고랑으로 나오셨다. 그리고 내 인기척에 얼른 얼굴을 돌리셔 내 눈과 마주치자 활짝 웃으시면서 손으로 배를 가리키신 후 입에 밥을 떠 넣는 흉내를 내시며 배가 고프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그런 작은 것 하나하나도 빠트림 없이 챙겨주시려 하시는 순덕이 어머니가 늘 친 이모처럼 따뜻하게 느껴져 더더욱 순덕이가 보고 싶어 마당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앙증맞게 생긴 순덕이가 비가 오려고 하니 집단속을 하려는지 마당으로 솔솔 기어 나와 어디론가 가려고 하는 땅강아지 한 마리를 손으로 덥석 잡으려 했다.

“야! 순덕아 너는 무슨 지집애가 그리 억세터졌냐? 징그럽게 땅강아지를 다 잡을라구 허게.”

엎드려 있는 순덕이에게 말을 하자 내 말 뜻도 자세히 모르면서 그저 오빠라고 나를 쳐다보며 순진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손에 움켜쥔 땅강아지를 들어 보이고 있어 그동안 퍽이나 많이 자란 것 같은 뿌듯함에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느릴 대로 느려터진 늦여름 해가 앞 들녘을 헤집고 서편 금강 둑에 몸을 기대고 증기기관차가 숨차게 기적을 울리며 마을 앞을 지났다. 잘 익은 복숭아 겉껍질처럼 발그스레하게 물드는 저녁노을 속에 어스름 땅거미가 찾아드는 해질녘이 되자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장사를 나가셨던 어머니가 조금 일찍 돌아오셨다. 오후 들면서부터 날씨가 끄느름해지자 더 큰비를 만나 옷이 다 젖을까 싶어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신 듯했다.

젓갈국물이 묻어난 겉옷을 갈아입으시며 하루 장사를 망쳐버렸다고 몇 차례나 볼멘소리를 하시며 찰싹 달라붙는 순덕이를 안고 쪽마루에 앉으셨다. 모처럼만에 온 식구가 저녁 밥상에 둘러앉아 얼굴을 마주했다.
순덕이 어머니가 양식을 느루 먹으려고 보리쌀에 감자를 넣고 쌀을 한 움큼 얹어 지으신 밥에 텃밭에서 솎아온 배추를 넣고 삶아 끓인 된장국에 새우젓을 넣고 볶은 호박나물과 껍질을 벗겨 삶아낸 고구마 순을 양념으로 무친 나물에 저녁밥을 먹었다. 훈훈해지는 마음에 더 이상 바랄 나위 없고 한자리에 내 가족과 더불어 있음에 마냥 감사할 뿐이었다.

‘투두둑투두둑’ 방문 밖으로 들리는 빗소리는 점점 굵어지고 여름방학이 끝나 새 학기가 시작되는 첫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와 과제물과 책을 가방 안에 챙겨놓았다. 그리고 가물가물하는 등잔불에 손끝에 닿을 듯싶게 더욱 낮게만 보이는 방 천장에 걸쳐 있는 서까래들을 올려보았다.
지난여름 장마 때 틈새로 새어든 빗물에 서까래 군데군데가 검누렇게 번져나 착시인 듯 그 모습들이 마치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의 형상처럼 보였다. 기억 속에 선연하게 떠오르는 미운 듯 고운 듯 내 아버지의 얼굴 모습이 떠오르나 싶더니 허구헛날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장사를 하시느라 온갖 고생하시는 내 어머니 얼굴도 보였다.
방긋 웃는 작달막한 얼굴의 순덕이 얼굴과 다정하신 순덕이 어머니의 얼굴을 비슷하게 닮은 모습도 보여 그저 피식 웃었다. 또 다른 얼룩진 부위로 내린 눈길을 돌려 보니 극빈한 마을 사람들에게 장리 빚을 놓아 그동안 걸태질을 하느라 혈안이 되어 그리도 포악스럽게 굴던 종구네 아버지의 뜨악하게 생긴 모습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눈물 속에 고향을 떠나간 숱한 얼굴들도 아른아른 떠올라 지난날의 애환 서린 기억들이 뜻 깊은 의미로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반점처럼 묻어났다. 그 틈 사이에 더욱 애잔스럽게 느껴지는 내 친구 옥순이 얼굴도 더욱 시름 차게 보여 그런저런 공상에 젖어들은 내 모습이 퍽이나 가년스럽게 느껴졌다.

언제나 그렇듯이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자 버릇처럼 어머니는 내 아버지와 얼굴도 모르는 내 누이를 부르려 하셨다. 남폿불 심지에 불을 붙어 만질만질하게 손때가 묻어난 마루기둥에 걸어놓으셨다.

들녘 어디쯤에서 달려오는 밤 열차의 진동이 평소 때보다는 귓가에 더욱 가깝게 들려왔다. 눅진해진 날씨에 밤의 열기를 식히려는 듯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마당에 고이기 시작한 물이 한쪽 낮은 곳 두엄자리 쪽으로 쓸려내려 좁은 시궁창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가느직하게 들렸다. 꼭 이런 날엔 어머니가 무슨 말씀이라도 하실 것 같아 쪽마루에 나와 어머니 곁에 앉았다.

불빛을 보고 무모하게 달려드는 불나방의 그림자에 불빛이 가려져 얼른 일어나 파리채로 잡아 없애려 했다. 그리고 싸리 울타리 너머로 밤비에 젖어 있는 앞산을 말없이 내다보시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야 그냥 내번저 둬라. 저러다가 지풀에 질리면 지두 지 갈 길루 날아 가긋지. 그것두 세상 살아 보겠다구 대가리 디밀구 나왔는디, 그리구 혹시 아냐? 가뜩이나 밤눈 어둔 니 애비 편허게 오라구 길이라두 가르쳐줄라구 그러는지 모르잖냐?”

전혀 이치에 맞질 않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하랴 싶어 손에 들었던 파리채를 마루에 그냥 내려놓고 말았다. 순덕이 어머니가 저녁밥 지으실 때 밥 위에 얹어 찌셨는지 올망졸망 볼품없는 늦옥수수가 담긴 양은그릇을 가운데 두고 식구들이 오붓하게 쪽마루에 앉아 옥수수를 먹고 있었다.

어머니가 장사를 하시느라 낮에 동네에서 일어난 상두 아버지 일을 모르실 것 같아 알려드리려고 엉덩이를 살짝 들고 어머니 옆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참! 엄니 오늘 동네에 엄청 큰일이 일어났었어, 왜? 아랫말 앵두나무집 있지? 그 집 상두네 엄니가 오늘 새벽에 도망을 갔다구 상두 아버지가 화가 잔뜩 나서 술 취해가지구, 종구네 집 식구들 다 죽이구 자기두 죽는다구 시퍼런 낫을 들구서 뛰어갈려구 하는 걸 둥구나무 아래 있던 동네 어른들이 가루막아 겨우 말려서 끝났는디 난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상두 아버지 두 눈이 시뻘건해 가지구 사람을 금방이라두 죽일 것 같더라구.”

한참동안 정신없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랬었냐? 에휴, 종구네 집두 어디 한두 번두 아니구 쪼매 잊을 만허면 하나둘씩 자꾸만 일이 터져 나오니 동섭이 그 양반두 동상 하나 잘못 둔 죄루다가 어지건히 보대끼며 사네 그려. 지긋지긋헌 놈의 세상, 저마다 한 가지씩 철천지웬수마냥 가슴에 맺히는 한을 갖구 있으니 누굴 탓해 본들 뭣허것냐? 그저 맹허게 하늘만 보구 원망허면서 살아야지 으쩌것냐? 그리구 뭐시냐 상두 애비 그 양반두 오죽이나 속이 뒤집어졌으면 그저 다 죽이구 죽는다는 험한 말이 입 밖으로 나왔을까? 참 딱두 허지 딱혀, 그나저나 집 뛰쳐나간 여편네두 그새중간에 서방헌티 오죽 보대꼈으면 도앙갔건냐마는, 그렇다구 저 어린것 그냥 두구 가면 으짤라구 그랬는가 모르것다. 그러니 다덜 죽어 눈 감기 전에는 그 아픔덜 죽어두 못 잊구 살 건디 앞으루가 문제다 문제여. 아이구 그놈에 난리만 없었드라면 니나 내나 할 것 읍시 다덜 이 걱정 저 걱정 안 허구 살 건디.”

어머니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눈길을 아랫동네 쪽으로 돌리시며 다시금 말씀을 이으셨다.

“그나저나 너는 옥순이랑 아직까장두 말을 안하구서 지내냐? 옥순이란 년두 지 딴엔 속이 답답하닌께 그러는거 같다. 그래두 니가 흉허물 읍는 친구랍시구 그러는 것 같은께 니가 참구 이해하며 살거라. 니덜 시방은 별거 아니지만 난중에 어른 되서 한동네 같이 살게 될랑가 어쩔랑가는 모르것다마는, 그래두 평생토록 안 잊혀지는 거시 고향친구뿐이여. 그러닌께 서루 잘들 지내야 헌다. 그건 그렇구 참 날짜 같이 잘 가는 게 읍는가 보다. 두 집이 합친다는 그 말 나온 지가 엊그제 같은디 이제 지아무리 늦어두 다다음달이면 자식들이사 싫던 좋던 간에 두 집이 한군디루 합칠 건데, 자식들끼리 다투지 않구 잘 지내야 새중간에 낀 옥순이 에미가 같이 살기에 마음이 좀 편헐 거 아니냐? 근디 옥순이란 년두 체구는 작아두 암팡진디가 있어 만만치 않을 꺼시구, 종구란 놈두 지 애비를 빼닮아서 그런가? 붙임성이라구는 털끝 맨큼두 읍으니 어지간허게 까닥스러울 껀데, 옥순이 에미가 어찌 잘 버텨낼랑가 모르것다 에휴!”

어머니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내가 옥순이에게 들은 말이 있어 얼른 말을 이었다.

“아이구 엄니! 그런 걱정일랑 허지 말라구. 아까 낮에 내가 옥순이네 집에 찾아갔는디 가시내가 첨에는 엄청시리 쌀쌀맞게 굴더니, 어찌됐던 간에 엄니가 양쪽으루 연락혀준 거 허구 종구네 집에서 쌀 한 가마니 받아먹은 거 미안허게 됐다구 사과를 허닌께, 난중에는 나를 믿는가? 지 맴속 오장육부에 들어 있는 말을 꺼내놓는디, 지 엄니가 종구네 집에 들어가 살든 말든 저는 모래바탕에 혀를 박구 죽는 한이 있어두 종구네 집 문턱은 절대루 안 밟는다고 허드라구. 그러면서 지네 아부지 사진 보면서 우는디 나두 아부지 읍시 살아봐서 그런가 무지허게 마음이 아프더라구. 솔직허게 내 마음 같아서는 옥순이가 고등학교 나와서 대학교를 가는디 을매나 돈이 많이 들어가는지는 몰러두, 시방이라두 두 집이 함께 사는 거 읍었던 일루 허구 옥순이 어머니가 그냥 그 집에서 옥순이 허구 둘이서 살았으면 좋겠어. 증말이지, 우리덜이 무신 잘못 있다구 어른덜이 자꾸만 일을 힘들게 맹그러서 맘을 아프게 허는지 모르것어.”

그러자 내 말을 듣고 계시는 어머니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속 시원한 뚜렷한 답이 없으시니 그저 눈빛으로만 말씀을 하시려는 듯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계셨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보다 더 암울하고 답답한 침묵이 어머니와 나 사이에 도사려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분위기가 입을 굳게 닫아 놓았다.

그것은 암울하기 그지없던 그 시대가 우리들 모두에게 무언의 형벌처럼 남긴 짙은 아픔의 얼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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