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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83 조회 : 1,848




초가을을 재촉하듯 양광이 온 주위를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학교에 가려고 사립짝을 나섰다. 산기슭과 맞닿은 텃밭 가장자리 엇비스듬한 바윗돌에 생기가 가득 찬 파르스름한 이끼가 촘촘하게 보였다. 바위 틈 사이 억척스레 들러붙어 착생(着生)하고 있는 바위손도 빗물에 함초롬히 젖어 또렷한 모습으로 생동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참한 모습들에 걷는 발걸음이 한층 활달해졌다. 그렇듯이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숱한 사물들이 늦더위에 나른하게 보였던 어제와는 달리 생기 찬 모습으로 내 앞에 성큼 다가섰다.

그 어느 것 하나에도 걸림이 없어 초연하게 보이는 저 산도 어제 내렸던 비로 눅신하게 젖어 나직나직하게 깔린 박무에 희뿌옇게 보여 나름 운치를 자아냈다. 산기슭으로 내려온 운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올곧게 솟아 있는 예닐곱 그루 낙엽송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야트막한 둔덕 아래 개울까지 내려와 자우룩하게 떠 있었다. 허나 비가 내린 후 날씨는 더욱 후덥지근했다. 그로 인해 가을 문턱에서 주춤거리는 마지막 늦더위의 위세가 종일토록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오묘한 끌림으로 숙연하게 다가서는 산자락에 소리 없이 머물다 끝내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부연 운무가 주는 느낌에 마음이 꽤나 숙연해졌다. 그와 더불어 그동안 내 마음속에 갑갑하게 들어차 있던 숱한 애증으로 얼룩진 번민의 부스러기들이 하나둘씩 내 기억의 범주 안에서 멀리 떨쳐났으면 좋을 것 같았다.

어찌 보면 한 달여 동안의 여름방학이 다소 지루하기도 했다. 방학이 끝나 학교에 가려고 사립짝을 나서려니 솔숲을 헤집고 불어오는 아랫바람에 은은하게 묻어나는 송진 냄새가 그윽하게 풍겨났다.

울 밖 한쪽에 서있는 산초나무에는 새까맣게 익어가는 알알들이 특유의 향을 지긋이 풍기고 있었다. 마치 지난날 내 외조부님의 병구완으로 진저리가 나도록 맡으며 살았던 한약냄새와 엇비슷한 냄새가 온 주위로 눅눅하게 번져났다.

‘또르르르, 또르르르’ 올망졸망 돌들이 포개져 있는 어웅한 틈 사이에서 풀벌레소리가 가냘프게 들려왔다. 그리고 싸리 울타리 쪽에 바짝 등 붙이고 있는 헛간지붕 위에는 아침햇살에 설핏설핏 비치는 이슬방울이 맺혀있는 둥글둥글한 허연 박이 듬성듬성 자릴 잡고 있었다.

열푸른 안개가 도사리고 있는 벼랑바위로 이어진 빼뚜름하게 계단을 이룬 밭둑길을 얼마쯤 걸으면 면소재지로 들어서는 나들목에 닿을 수 있었다. 은행나무의 얇은 잎사귀가 서늘바람에 가볍게 팔랑거려 언제나 상냥한 모습으로 반겨주었다.

나들목 한쪽 길가엔 세월의 때가 찌든 숭덕비 하나가 오가는 길손을 반기고 있었다.
그 옛날 어느 선인(善人)이 고을에 극심한 기근이 들어온 고을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구휼미(救恤米)를 베풀어 고을 사람들을 기아선상(飢餓線上)의 절망에서 구출해 주었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이 고마운 마음에 그 미덕을 후세에 널리 알리려고 돌 위에 평음각(平陰刻)의 글씨로 새겨놓은 숭덕비를 세웠다. 그 비석의 반질반질한 표면이 아침이슬에 촉촉이 젖어 어린 내 나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자가 띄엄띄엄 흐릿하게 보여 한결 고풍스럽게 보였다.

나들목을 지나 주황색 능소화의 가녀린 모습이 넝쿨져 피어난 벼랑바위 앞에 닿았다. 무딘 바윗등을 타고 내려뻗은 능소화의 비에 젖은 모습이 얼핏 차갑게 보이는 듯싶으면서도 눈에 익은 친숙함이 있어 오히려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온 누리가 차분하게 퍼져나는 햇살을 따라 일상의 고요함을 흔들어 깨우는 아침의 문이 열리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섣불리 예측도 못하는 결과에 막연한 기대감으로 한껏 고무되어 설렘으로 차오르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 마음 편히 숨을 몰아 내쉴 수 있는 전원 속 한 모서리에 아담스레 자리 잡은 내 고향 마을이 있었다.

두 눈으로 새삼스럽게 한 번 더 바라보니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느낌으로 다소곳하게 다가와 마음이 온통 이끌려 진한 애착을 갖게 했다. 그 포근한 둥지 속에서 우리 네 식구 간고할지라도 큰 욕심 없이 무탈하게 살고만 싶었다.

물안개 시원스레 탈을 벗는 산릉선 위로 산과 미리 약속이나 한 듯 해말금한 얼굴을 시원스레 드러내는 하늘이 탐스런 만큼 소중하게 느껴졌다. 산기슭 벼랑바위 아래 면소재지로 이어진 달구지 길이 기다랗게 보였다. 그리고 원만하게 굽은 동네 어귀 길모퉁이에 가을 맞을 준비를 서두는 코스모스 사이로 반쯤 가려져진 작달막한 옥순이의 모습이 엇비쳐 그저 반가웠다.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격 없이 만나 수더분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내 주위에 하나쯤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더욱 흐뭇해졌다.

‘쐐엥’하는 시끄러운 여음을 남기며 하늘 높이 떠올라 그리 작게만 보이는 전투기 한 대가 삼식간에 스치듯 지나 재빨리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전투기는 벌써 서편 하늘 구름 속으로 사라져 보이질 않고 청정하게 맑아진 하늘에 한 자락 비행운이 뿌옇게 흔적을 남겨 조금은 외롭게 보였다.

그리고 산기슭과 맞닿은 둔덕 너머 콩밭에는 밤사이 비를 피해 나뭇가지에서 밤을 새운 뭇 새들이 산자락 여기저기서 날아와 밭 자락에 사뿟사뿟 내려앉아 이저리 걸음을 옮겼다.

밭 자락 옆에 떡 버텨 서 있는 종구네 기와집 담 너머로 ‘꺼억꺼억꺼억꺼억’ 시끄럽게 울어대는 거위소리가 들려 설핏 담 너머 안마당을 바라보았다.

“야! 그 집구석에 뭐 볼 꺼시 있다구 넋을 놓구 바라보냐?”

등 뒤에서 힐책하는 듯 옥순이의 말소리가 들려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불룩한 청색 책가방이 무거운지 한쪽 어깨가 조금 기운 자세로 작은 키가 더욱 앙증맞게 보이는 단발머리 옥순이가 곰상스럽게 다가서 검정 리본이 달린 하얀 모자를 가볍게 눌러 쓴 하얀 하복 윗저고리가 아침햇살에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다.

얼마 전까지는 어쩌다 서로 눈이 마주쳐도 나를 바라보는 눈이 마치 ‘외양간 소가 마당에 노는 닭을 보는 듯’ 무관심을 넘어 냉랭하기만 하던 옥순이가 이젠 예전처럼 상냥하게 먼저 말을 걸어와 기분이 무척 좋았다. 종구네 집을 바라보고 있던 나를 핀잔주는 듯이 말을 건네는 옥순이에게 나 또한 툭 쏘아붙이듯 말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전과는 달리 그마저도 그냥 넘기고 말았다.

그렇게 벼랑바위 앞에서 옥순이를 만나 면소재지로 들어서는 철길 건널목을 향해 가려고 하는데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혀 있던 종구네 나무대문이 열렸다. 책가방을 옆구리에 낀 종구가 하얀 천으로 덧씌운 학생모를 눌러쓰고 문밖으로 나서자 옥순이가 재빨리 등을 돌리면서 나를 보며 얼른 가자고 손짓을 했다. 면소재지에 있는 들 주막 버스정류장을 향해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가는데 언제나 우리들보다 약 이삼십 분 먼저 출발하는 논산 읍내로 가는 차 시간에 맞추려고 종구가 힘껏 내달려 우리들 뒤를 바짝 따라왔다.

그러자 옥순이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서로 눈도 마주치기 싫은지 가녀린 작은 손에 움켜쥔 책가방을 위로 한번 바짝 치켜 올린 다부진 모습으로 발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우리들 뒤를 따라오던 종구가 우리들 옆을 스쳐 지나며 아무런 말도 없이 내 얼굴과 옥순이 얼굴을 얼핏 바라보며 냉정한 모습으로 앞을 향해 달려갔다.

문득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올가을 가을걷이가 끝나 두 집이 서로 합친다 하여도 넘어야 할 산이 높고 험난하게만 보였다. 벌써부터 서로들 마음속 깊이 응어리진 거부감이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니 어떤 획기적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화해를 하고 살기엔 너무 힘이 들 것처럼 보였다.

어른이 다 된 정희누나는 속마음이야 어쨌든 간에 이미 기성이형네 집으로 출가를 하여 남의 집 식구가 되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옥순이가 종구 아버지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듯 종구 또한 옥순이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가 그에 못지않게 냉정할 것만 같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 앞으로 살아나가는 동안 얽히고설킨 인연의 틈바구니에서 각자의 마음고생들이 무척이나 심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위를 누그러뜨리는 서늘바람이 한차례 시원스레 불어왔다. 그리고 가을빛이 앞산 군데군데에 드러나고 있었다. 과묵한 저산은 자칫 쉽사리 들뜨려하는 가볍기만 한 우리네 심사를 근심스런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듯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차별 없이 포근하게 대해 주는 과묵한 저 산은 조금도 경망되게 서두르질 않아 뜻 깊은 의미를 잠재한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렇듯이 과묵한 고요는 한번쯤 살아온 여정을 되돌아보게 하여 깊은 성찰을 갖게 하고 그 성찰에서 얻어지는 값진 깨달음은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큰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 그런 천혜로 빚어진 정신적 요람인 산에 깃들어 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준 저 하늘에 새삼 감사할 뿐이었다.

지금은 나와 옥순이가 어린 탓도 있지만 삶의 여건이 마냥 부족하기만한 우리들의 삶이 비록 초라해 보일지라도 세월이 흘러 먼 훗날에는 알이 꽉 들어차 생생한 무늬로 저 산자락에 얼룩져가길 바랐다.

산릉선을 내려서 날름거리는 해는 면소재지 마을 한복판으로 걸음을 옮겨 무엇이 그리도 궁금하여 두루 알고만 싶은지 어느 한곳도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야, 상민아! 차 시간 늦을라 그만 해찰허구 언능 가자.”

옥순이가 나를 재촉하여 우리는 서로 어깨가 거의 닿을 듯이 다정하게 푸석한 달구지 길을 걸어갔다. 오르막 철로 건널목을 건너 면소재지 길로 접어들어 지서 앞을 지나려니 아침부터 바지런한 참새들이 지서 건물 검은 기와지붕 추녀 밑에서 사방을 빙 둘러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있는 민출하게 뻗어난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넘노닐며 귀에 거슬리게 지저귀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 첫 등굣길인데 역시나 변함이 없는 것은 눈에 보이는 상급생인 선배들에게 경례를 부치는 일이었다. 옆에 함께 걸어가고 있는 옥순이를 보기에 좀 쑥스러우면서도 아직은 학년이 낮은지라 하는 수 없어 퍽이나 번거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몇 차례 정도 모자챙의 오른쪽 가장자리 부분에 쫙 핀 손끝을 붙여 거수경례를 깍듯이 하였다.

그런 내 모습이 제 딴에는 그리 우습게 보였던지 옆에 걸어가는 옥순이가 네모나게 곱게 접은 흰 손수건을 입가에 가져다대고 소리 없이 웃었다. 두 볼에 살짝 파이는 보조개가 그리도 앙증스럽게 보여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보였다.

들 주막 버스정류장으로 이어지는 길이 개학을 하여 저마다 등교를 하는 학생들 모습으로 모처럼만에 생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정다운 얼굴들이 드문드문 보여 국민학교 졸업반 때 우리 반 반장을 하였던 명식이, 석란이와 늘 들붙어 살다시피 하는 정임이 얼굴도 보였다.

그리고 우리 집 방벽에 붙어 있는 고운 수채화 그림 한 점을 그려준 부반장이었던 새터마을에 사는 영선이의 모습도 반갑게 눈에 띄었다.

면소재지 마을 한복판에 우뚝 떠있는 해가 강렬하게 내리쪼여 서서히 담금질을 시작하려는지 몸이 서서히 후덥지근해졌다.

방학기간 동안 냄새를 맡지 않아 그리 편했던 자동차가 내뿜는 매캐한 매연과 희뿌연 흙먼지가 거북스럽게 밀려왔다. 학생들 모두가 신작로 길가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져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를 나누며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따금씩 목을 바짝 내밀어 버스의 앞머리가 보이는 산모퉁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양옆으로 덧대어 놓은 강판 군데군데가 녹이 슬어 허술하게 보이는 버스에 올랐다. 비좁은 버스 안 틈새를 비집고 겨우 자리를 잡으려 하는데 등 뒤에 바짝 붙어 밀고 오는 3학년 선배가 보여 마음은 서운하지만 힘없이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마냥 흔들리는 차 속에서 무거운 책가방까지 한 손에 들고 버티려니 퍽이나 힘이 들었다. 애써 자리를 양보해준 내 마음은 전혀 모르는 척 창밖만 유유히 바라보고 있는 얼굴에 여드름자국이 드문드문 보이는 선배의 모습이 그리도 밉살맞게 보였다.

아침나절이었지만 차안은 꽉 들어찬 사람들의 열기로 유난스레 더 후덥지근하기만 했다. 책가방 안에 들어 있는 도시락반찬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차안의 열기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신작로 도로의 표면이 울퉁불퉁한 탓도 있지만 노후한 버스의 진면모를 보여주듯이 터덜터덜 그리도 심하게 흔들려 가끔씩 아랫배가 쿨렁거려 아파오기도 하였다.

해맑은 이슬이 대기를 떠도는 찬 공기를 만나 찬 서리로 변한다는 한로를 한 달 남짓 앞에 둔 너른 들녘엔 탐스럽게 알이 영글어가는 고게 숙인 벼이삭들이 들녘 바람에 일렁거려 푸른 물결을 길게 이루었다. 샛강 둑에는 마을을 나선 누런 소가 촌로의 손에 이끌려 유유낙낙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싱그럽게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아래 푸르르한 운치를 양껏 뽐내는 금강 둑 위로 다리 건너 성동면에 사는 학생들의 자전거 행렬이 정겨운 모습으로 줄을 잇고 있었다.

어지간히 몸을 기우뚱거리며 오르막길을 올라 금강 둑 위에 올라선 버스는 회색 콘크리트의 육중한 수문이 턱 버텨 있는 수문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넜다.

언제나 그 멀리서도 예스럽게 바라보이는 읍내 상업고등학교의 붉은 벽돌의 건물이 학교 교지의 표지에 실릴 정도로 상징적인 웅장한 팽나무와 더불어 듬직하게 보였다.
두 해만 지나고 나면 진학을 할 고등학교라고 생각을 하니 은연중에 일어나는 깊은 관심으로 예사롭게만 바라볼 수 없었다.

검푸른 잎이 줄기 끝에 잔뜩 들붙어 낭창낭창 내려 있는 수양버드나무 끝이 빨간 우체통 위에 이내 닿을 듯이 보이는 남교동 임시정류장에 버스가 멈춰 섰다.

그래도 그 틈바구니에서 운 좋게 자리를 잡고 왔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옥순이가 잠시 뒤를 돌아 내 얼굴을 바라보며 살며시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작달막한 모습이 조금 홀가분해진 버스 차창 뒤로 귀염성스레 보였다.

참! 사람의 눈 또한 간사한 것인지 방학기간이래야 불과 한 달여 남짓한데 그동안 잠시 못 보다 보는 읍네 건물과 거리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서먹해졌다.
번화가 두어 군데에는 허름한 건물을 헐어내고 다시 짓느라 텅 비워 있는 모습이 마치 잇몸에 이가 군데군데 빠져나간 것처럼 썰렁하기만 하게 보였다.

강경 읍내 서쪽 변두리 황산동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깨곰보’ 성구네 집으로 가려고 역전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가는데 역시나 중국집 주방에서 새어나오는 자장 볶는 냄새가 군침을 돋우고 길 건너편 2층 건물 아래층엔 보지 못했던 탁구장이 새로 들어서 있었다.

언제나 내가 타고 오는 버스와 거의 비슷한 시간에 읍내로 들어오는 연무대를 출발한 통학열차가 역구내로 들어서 플랫폼에 멈춰 섰다.
세 칸짜리 기차에서 내린 남녀학생들이 활기찬 모습으로 대합실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성구네 집으로 가는 골목길 입구에서 딴전을 피우는 흉내를 억지로 내며 서성거렸다. 먼발치서라도 열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석란이 모습을 훔쳐보려는 생각에 가슴이 마냥 두근거렸다.

성구네 집으로 가는 길목 아래 수심이 그리 깊지 않은 연못이 보였다. 연꽃이 떨어져나간 꽃대 끝자리에 내 주먹 두 개를 포개놓은 것처럼 도톰하게 둥그런 연밥이 가득 들어차 영글고 있었다.
언젠가 성구가 건네주는 밤 맛 같은 연밥을 두어 번 먹었던 기억이 살포시 떠올랐다.

성구네 집이 눈앞에 다가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불과 한 달 남짓한 헤어짐이었는데도 내가 오기를 얼마쯤은 미리 나와 기다린 듯 토끼집 앞에 서 있던 성구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높이 흔들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관사 추녀 밑에 이어낸 등받이를 여름내 부지런히 타고 오른 줄기에 매달린 포도송이들이 검은빛으로 탱글탱글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나무판자 벽면에 동쪽으로 트여진 작은 봉창을 가릴 듯이 더부룩하게 번져 있었다.

그런 티 없는 성구의 모습이 무척이나 반가우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구 저 또한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나는지라 외로울 것 같았다.
그리고 판에 박힌 일상에서 오는 무료함을 조금이라도 달래보려고 잠시인들 자연의 품에 깃들고 싶어 내가 사는 들메마을에 한번쯤 오고 싶어 했었다.

그런데 구차하게 사는 초라한 내 모습을 더 이상 들춰내기 싫어 그런 작은 바람 하나도 마음 편히 들어주지 못했다.

그런 내가 과연 진솔한 친구라고 운운할 수 있는가를 나 자신에게 몇 차례 스스로 반문을 해보니 참으로 미안스럽기만 하였다.

뻘쭘하게 서 있는 신호등이 옆에 가지런히 놓인 나무의자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빨간색과 녹색의 천으로 된 신호 깃발을 둘둘 말아 손에 거머쥐고 계신 성기 아버지의 우수로 그늘진 모습이 보였다.
어쩜 지금도 늦더위 속에 어느 집 문전을 서성이고 계실 내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복잡한 감정이 얼기설기 뒤엉켜 마음 더욱 애잔키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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