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글, 사진 등의 저작물에 대한 무단복제를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들메로 가는 길 - 285 조회 : 2,172




하늘은 가슴 설렐 만큼 군청색으로 깔끔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 하늘에 해는 듬직하게 자릴 잡고 오색 채운(彩雲)의 영롱한 빛을 온 대지 위에 마음껏 내려 비췄다.
더불어 하늘은 마을 앞산을 온유롭게 감싸 안고 가을을 마음껏 예찬(禮讚)하는 듯했다.

그런 순리는 동녘하늘에 먼동이 터올 무렵부터 새벽녘 은빛 달무리가 스러질 때까지 감동어린 여운은 끝없이 지속됐다. 산자락엔 자연의 오묘함이 한 점 한 점 예스럽게 묻어나 실로 경이롭다는 말밖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늘 자연은 그렇듯 섬세한 솜씨로 변화의 수를 놓았다.
그런 심덕으로 마냥 들뜨려는 심경을 더없이 숙연케 했다.

억겁의 세월 속에 과묵하게 자릴 지킨 저 산의 깊은 심지(心志)를 얄팍한 인간의 논리와 어설픈 이치로는 섣불리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산릉선 한가운데 아득하게 우뚝 솟아 있는 봉두(峯頭)는 참된 자연의 소리를 하늘에 낱낱이 전달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자연의 순리가 이루워 놓은 마법인양 아기자기한 풍경을 이룬 산이 하루하루가 다르게 누르스름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제 곧 머지않아 산자락에 붉은 단풍이 곱살하게 물들여질 것 같았다. 고로 계절은 이미 가을을 배태(胚胎)하고 있었던 것 같아 이 또한 하늘의 큰 은혜인 듯싶었다. 그리고 언제나 산은 넉넉한 어미의 품처럼 나를 보듬으려 했다. 허나 미력한 나는 그런 산에게 그 무엇 하나라도 되돌려줄 것이 없었다. 그런 탓인지 때론 미안스러움에 산을 바라보기에 머쓱해지기도 했다.

도드라지게 보이는 옥빛 가을하늘에 목화솜처럼 부풀어 오른 구름은 한껏 맵시를 부리며 펼쳐 있었다. 그 가운데 일편(一片)의 고운(孤雲)을 벗 삼아 창백한 반쪽 달이 벌건 대낮부터 뽀로통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그 하늘 아래 국토의 서남단 목포를 향해 놋황색 들녘을 달려가는 화물 열차가 남기는 기적의 여음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산기슭 옹기가마터에선 가을 김장철에 쓸 항아리를 굽는지 거무스름한 연기가 모락모락 하늘로 피어올랐다.

가마득하게 바라보이는 산릉선엔 쪽구름이 자유자재로 넘나들어 나 또한 그 구름 따라 어디론가 지향 없이 떠나고만 싶었다. 그럴 적마다 훌쩍 떠나지도 못하는 답답함은 좁은 뇌리를 더욱 번잡스럽게 했다. 그런 허전함이 살아오는 동안 그리도 쉴 새 없이 반복되었으니 삶은 그만큼 고난스러웠다.

참으로 다난한 세월 속에 남겨진 아픔의 흔적들이 그도 많았다. 언제나 끈질기게 달라붙는 고뇌의 흔적들이 미덥지 못하게 스멀거려 이내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울먹여졌다. 그토록 마음가득 서러워짐은 아직도 접점을 찾지도 못한 막연한 그리움에 대한 끝없는 열구(熱求)인 듯싶었다.

이제 꼭짓점에 닿은 늦여름을 마무리 하려는 듯 연분홍빛 싸리 꽃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수두룩하게 피어났다. 싸리꽃은 이른 봄에 좁쌀을 튀겨 놓은 것같이 하얗게 피어나는 조팝나무의 꽃과는 크기부터 완연하게 달라 보였다.
속내 깊은 부드러운 꽃빛에서 쉽게 들춰 내지 않으려는 차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솟구치는 강인한 생명력도 느낄 수 있어 무언 속에 시사하는 바가 컸었다. 그리고 뉘라서 보아 주는 이 없을지라도 지난해에 이어 무릇 그 자리를 벗어나질 않고 말없이 피어났다. 그렇게 자연의 섭리 따라 스스로 꽃잎을 피고 지워 다음 해를 기약하는 것 같았다.

불과 엊그제까지도 검푸르게 보였던 녹두 꼬투리가 어느새 까만빛으로 변해 당글당글 하게 영글고 있었다. 뒤따라 목화송이도 벌어진 겉껍질 사이로 새하얀 솜을 봉긋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나무들 중에서 맨 먼저 낙엽이 진다고 하는 벚나무에 여름내 그리 우렁차게 울어대던 말매미 소리가 어느새 뚝 멈췄다. 아직은 완연한 가을이라고 에돌러 말하기엔 조금은 계절이 이른 듯싶은데 벚나무에는 누르스름하게 잎사귀가 물들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밑자락에는 벌써 부터 떨어진 나뭇잎들이 담홍색 등을 들썩이어 바람결에 나붓거렸다.

삶의 끈적끈적한 흔적들이 도톰하게 묻어난 들녘은 점점 풍요의 색채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그런 여유로운 넉넉함이 한껏 묻어나니 이제 가을이 눈앞에 바짝 다가왔음을 예시(豫示)하는 듯싶었다.

한낮으로는 쇠잔해져 가는 늦여름 햇살이 머리 위에 싫지 않을 만큼 따끔거렸다. 허나 조석(朝夕)으로는 선선함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어 얼추 여름이 맥을 멈추려는 것 같았다. 더욱이 밤으로는 다소 몸이 오스스해져 두꺼운 옷이 생각났다. 그토록 감당키 어려웠던 더위도 산자락을 더듬어 내려오는 소슬바람에 등 떠밀려 멀찌감치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막상 가을의 첫들머리에서 되돌아보니 그리 지긋지긋했던 더위도 새삼스레 기억 속에 남으려 했다. 그런 내 심성이 너무도 여린 듯싶어 몇 번쯤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럽도록 새파란 하늘은 그저 뜻모를 그리움만 불뚝불뚝 솟아나게 했다. 그렇게 계절은 어김없는 변화를 반복하는가? 아침저녁으로 푸르누레지는 풀숲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더없이 애잔키만 했다. 그렇듯이 새로이 다가서는 계절이 무기력하게 침체된 의식을 산뜻하게 일깨워 주는 것 같아 그저 넉살스럽게 언제나 자연에 감사할 뿐이었다.

겉껍질이 멍게처럼 오톨도톨하게 생긴 여주가 여름내 등나무 줄기를 온통 칭칭 감고 오르내렸다. 그러더니 어느새 잘 익어 노란 황금빛을 띄우며 불그레한 속살을 곱살하게 드러내 보였다.
바로 옆에는 쭉쭉 길쯤길쯤하게 매달린 수세미가 눈에 띄었다. 조랑박이 대롱대롱 매달린 헛간의 모습이 초가을의 정취를 물씬 자아냈다. 그 옆자리에 서 있는 대추나무 가지에는 빨간 고추잠자리가 당글당글한 눈망울로 불긋불긋 익어가는 대추알을 바라보며 쉬어가고 있었다.

마당에서 놀고 있는 순덕이가 무료한 것같이 보여 자그마한 양재기에 비눗물을 풀어 보릿짚 마디를 꺾어 쿡 찍어 입으로 불어 주었다. 성근 햇살에 사방으로 번져난 비눗방울이 무지개 색으로 영롱한 빛을 발했다, 그런 모습에 순덕이는 손뼉을 치며 그리도 좋아라했다. 둥실둥실 떠올랐던 비눗방울이 이내 땅으로 떨어져 톡톡 꺼졌다. 순덕이는 사라져 가는 비눗방울이 못내 아쉬운지 방울이 떨어지는 곳으로 냉큼 달려가 조막만한 손을 펼쳐 잡으려 애를 쓰는 모습이 그리도 앙증맞게 보였다.

아랫마을 담뱃대 만드는 공방에서 쇠를 두드리는 작은 망치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들려왔다.
텃밭엔 불그레하게 익은 수숫대 우듬지에 찰싹 달라붙어 주인보다 먼저 먹으려는지 얄미운 짓거리를 하는 뭇 새들의 재잘거림이 시끄럽게 들렸다. 그리고 가벼운 솔바람 소리와 산자락을 훑어내려 물줄기를 이룬 계곡물 소리가 귓가에 낭랑하게 들려왔다. 더불어 신작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도 함께 들려와 무릇 자연의 하모니를 이뤘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물지게를 지고 언덕마루에 올랐다. 전망이 시원스레 탁 트인 언덕 마루 한쪽에 쉬어 가느라 앉아 있으려니 은빛 구름들이 하늘에 인심을 쓰는 듯이 시원스레 저만큼 비켜서고 있었다.

언덕바지에는 상수 아버지가 갈참나무 그늘 아래서 싸리나무가 한 짐 가득 올린 바지게를 작대기로 괴어 놓으시고 다리쉬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 무밭에서 벌레를 잡아 주시는 용덕이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셨다.

상수네 아버지 보다는 나이가 두서너 살쯤 작아 보이시는 용덕이 아버지가 이내 언덕 위로 오르셨다. 무 밭에서 나무젓가락으로 잡으신 배추벌레가 구물거리는 녹슨 통조림 깡통 속을 얼핏 들여다보시며 말씀하셨다.

“밭 들녘에 벌써 하얗게 메밀꽃 피는 거 보닌게 얼죽 가을이 오기는 오는가 보네유. 참 세월 같이 빨리 가는 거시 있을까유? 가실이 되어두 이놈에 살림살이는 늘 푼수라고는 눈곱맨큼두 없구, 늘 이 모양 이 꼬라지루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니 남는 게 한숨뿐이구먼유.”
“그러게나 말일세, 그래두 으짜것는가 어쩌니저쩌니 혀두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고 안던감? 그러니 남은 목숨 붙어 있을 때까장은 버티고 견뎌야지 안 그런감?”
“허기사 넘들은 그리 쉽게 말들 합디다마는, 평생 혓바닥 빠지게 쌩고생 하고 쪼달려 사닌께 참말루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것네유. 에휴 우라질 놈에 세상 잘사는 놈들 눈치 안보구 허리 한번 쫙 펴고 살다가 죽었으면 여한이 없것네유.”
“아니! 근데 저기 밭모퉁이 돌아서 가는 게 동십이랑 상수 애비 기천이 아닌감? 으딜 갈라구 저리들 서두는가 모르것네 그려. 참 아래께 누가 말하는 거 들어 보닌께, 상수 애비가 동십이랑 화해를 하구 면소재지에서 탁배기까지 한잔했다구 하던디, 줏대머리 없이 흔들리는 건 꼭 메밀 모가지를 닳았구먼 그려. 으찌 사람이 그럴까? 내사 참말루 알다가두 모를 일이네 그려.”
“그러게나 말입니다. 뭐시냐? 기천이가 동십이 성님을 낫으루 금새 쳐 죽일듯이 날뛰던 거시 불과 한 열흘 남짓 지난 것 같은디, 언제 저렇게 솥단지에 누룽지 들러붙듯이 찰싹 달라붙었나 모르것네유. 그러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구 참 알다가두 모를 일이네유.”
“아따, 이 사람아! 자네두 답답허기는 그만이구먼 그려. 아 글씨, 꼭 손으루 찍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를 아는감? 내사 말 한 자리 못 들어봤지만 딱 보닌께 한방에 보이네 그려. 뭐시냐, 상수 애비가 시퍼런 낫을 들구 죽인다구 달려드니 아무래도 있는 놈이 제 몸 간수는 더 하드라구. 아, 동십이 지 딴엔 무척이나 불안했겠지. 그러니 으쨌던 간에 광수 애비 맴을 돌려야 허닌께 그새 중간에 순태를 집어넣어서 꼬았겠지 뭐. 아닌 말루 앞뜰 물길 좋은 상답으루 몇 마지기 텃도지 안 받을라닌게 공짜루 지어 먹으라구 했나 보구먼. 그러지 않구서 저렇게 맴이 확 변해버리것는감?”
“그래두 그렇지유. 지 아무리 먹구 살기 힘들어두 그렇지 지 여편네가 동십이 동상 놈헌티 그 욕을 당해 버렸는디 그러구 싶을까? 허기사 돈 앞에 버텨낼 천하장사 없다구는 허지만 그래두 그렇지, 나로서는 도통 이해가 안 가네유. 어디 인간에 탈을 쓰구 그럴 수 있는감유? 안그래유 성님?”
“그려, 그건 자네 말이 맞네. 이미 다 지나 버린 일이지만, 그 당시 광수 애비가 광수 엄니 헌티 장가들 때두 좀 말이 많았남? 시방 형무소에 들어가 콩밥 먹구 있는 정섭이가 광수네 엄니를 짝사랑했는디, 그 일루 둘이서 연애를 했다구 이 동네 저 동네로 헛소문이 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광수 애비가 막상 장가들려고 하는디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아 엉거주춤할 때, 집 안 노인네들이 하두 서둘러서 엉겁결에 예를 올리구 말았지 뭐. 그러니 그 때 부터 광수 애비는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지간이라구 해도 늘 꺼림찍한 맘을 먹구 살았던거지.”
“그래두 그렇지, 그 징그러운 난리 때 앙심을 잔뜩 품고 있던 정섭이가 인민위원회 간부가 되어 광수 애비 붙들어 가서 다들 죽는다 안했남? 그런데 경우야 어찌됐던 간에 광수 엄니가 지 목숨 살려 놓은 건디, 그리 밤낮으루 들볶아 대니 못견디구 도망쳐 버린 거 아닌감유? 그리고 정섭이란 놈두 그리 미친개처럼 이 구석 저 구석 미쳐 날뛰구 다니며 몹쓸 짓 죄다 해놓구 지랄발광을 허드니, 끝내는 그렇게 붙들려가서 징역까장 양껏 받아서 그 안에 꽉 갇혔으니, 어찌 보면 그 인간두 증말루 불쌍허지유. 에휴, 그건 그렇구 벌써 가을은 닥쳐오는디 가을 바심 끝나면 동십이 성님은 옥순이 엄니헌티 새장가 드는 모양인디, 으찌 국시라두 낼란가 모르것네유?”
“아 그기사 자네가 알긋는가? 내가 알긋는가? 동십이가 맴만 먹으면 뭘 못 허것는가? 뉘 말마따나 발길에 차이는 게 쌀가마닌데, 허지만 내 좁은 생각으로는 그리 쉽게 터놓구 동네잔치를 벌리지는 못헐 것 같네 그려.”
“그나저나 옥순이 지 할매 성깔두 만만치 않을 건디, 으째 두 사람이 합치는 걸 승낙혔는지 모르것네유? 그러니 뭔가 필시 곡절이 있을 꺼구먼유.”
“야, 이 사람아! 곡절은 무신 개뿔에 곡절이여. 두런두런 들리는 말루는 뭐시냐? 그간 옥순이네가 지어 먹던 논 엿마지기를 옥순이 고모 시집보내는디 보태 쓰라구 죄다 넘겨줬다구 허던구먼 그려. 그러니 그리저리 되번진 거지 뭐. 그라구 말이사 바른말이지, 으짜것는가? 옥순이 엄니두 아직 나이가 있어 자기 앞길이 있는디 언제까장 청상과부루 살거냐구. 막말루 시방이 어디 열녀문 세워놓구 사는 조선시대두 아니구, 안 그런가?”
“허긴 성님 말이 맞는 것 같구먼유.”
“그나저나 자네는 볏모가지 얼쯤 다 익어 가는디 풋바심이라두 안 할련가? 날랑은 양식이라구 보리쌀두 다 떨어져 가구 감자 쪼매 종자로 남겨 놓은 거 빼구는 얼추 다 먹었으니 별 도리 있건는감? 하두 답답혀서 아래께는 고구마밭을 슬쩍 후벼봤더니 아직은 밑이 제대루 안들어 캐 먹기엔 이르더라구. 그러니 서둘러서 벼를 풋바심이라두 혀야 쓸란가 모르것네 그려.”

그때는 너나할 것 없이 쪼들리는 삶에 이미 가난에 잘 숙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분께서 나누시는 말씀을 듣고 있으려니 그마저 마음까지 빈한해질까 싶은 노파심에 서둘러 자리를 뜨고 말았다.

철길을 건너 기현네 집 앞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기현이가 면소재지 약방에서 얻어왔는지 빈 링거 병 속에 잡아넣은 각시붕어 두 마리가 둥그런 유리면에 굴곡져 실제의 모습보다 엄청 크게 보였다.

그리고 마을 입구 둥구나무 밑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이제 갓 젖을 뗀 듯싶은 어린 송아지 한 마리가 보였다. 고삐를 잡고 계시는 기현이 할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의 모습이 한데 어울려 보였다. 아른 아침 어미 품을 엉겁결에 떠나 먼 길을 오느라 힘이 들고 어미 생각이 나는지 ‘음매!’하고 우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요 며칠 전에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장화리에 사는 먼 친척뻘 되는 집에서 배메기로 송아지를 몰고 오실 거라고 하셨다. 그런데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그 집에서 송아지를 몰고 오신 듯했다.

검푸르게 줄을 이어 서 있는 대나무 숲 너머로 높다랗게 옥순이네 감나무 우듬지 부분이 보였다. 어찌 생각해 보면 잘 지속해왔던 평범한 일상을 깨트리는 일은 그만큼 고통을 동반하는 것 같았다. 옥순이가 자기 어머니 일로 아픔이 큰 것 같았지만 내 앞에서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허나! 텅 비워진 옥순이의 깊은 마음속까지 파고들어 어울러 주기엔 내 힘이 너무 미약했다.
그렇듯이 뚜렷하게 돕지도 못하는 내 처지에 마음만 더없이 짠해졌다. 그저 참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어 비틀거릴 때 서로 지게 작대기처럼 받쳐 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길 바랐다.

그런 내 생각들이 어설픈 객기와 얄팍한 동정심은 아닌지 되돌려 생각도 해보았다. 몇 번을 되뇌어 보아도 분명 그 것은 아닌 듯싶었다. 그리 속단키보다는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회적 분위가가 나로 하여금 그런 심성을 갖게 하였고 그런 행로로 내 몰은 것 같았다.

계절은 차분한 마음으로 느지막이 기다릴수록 알찬 풍요를 우리들 모두에게 고루 베풀어 주는 듯했다. 따가운 오후 햇살에 붉은 수수목이 성글게 영글어 가고 누런 콩깍지와 길쯤한 고추가 붉다 못해 곧 터져날 것처럼 반들거렸다. 그리고 누르스름하게 익어가는 벼이삭들과 단감의 불그레한 모습에서 계절이 주는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따금씩 벌어진 틈사이로 밤색 알을 알차게 드러내는 알밤들이 풍요로 가득 찬 은혜로운 가을의 진면모를 보여줬다.

야트막한 둔덕엔 띄엄띄엄 가녀린 모습으로 피어난 쑥부쟁이가 눈에 팍 들어왔다. 둔덕 아래 개울에는 물달개비 꽃이 나에게 보랏빛 눈빛을 새참하게 보냈다. 그리고 목이 허옇게 변해가는 억새는 꾸밈새 없는 잔잔한 수려함을 잃지 않으려 했다. 가녀린 목을 들고 때론 세게 불어오는 산바람에 안간힘으로 버팀을 하고 있었다.

그 산마루턱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던 애끓는 사연들이 다시금 찾아들어 아쉽게 되뇌어졌다. 아마도 그것은 남겨졌던 기억들이 그만큼 아름다웠다는 징표일 것만 같았다. 허나 다시금 환원시키지 못하는 아쉬움은 마음속에 어눌하게 자릴 잡아 아쉬움을 되새김하고 있었다.
목록으로

 

Copyrigt By 들메로 가는 길 All right reserved.
Webpage Administrator doori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