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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95 조회 : 1,944




동녘하늘에 여명이 부유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 하늘에 긴 밤을 지새운 작은 샛별이 서서히 빛을 거두고 조금 비켜선 곳엔 상현달이 다소 핼쑥한 모습으로 외롭게 자릴 하고 있었다. 밤새 천체의 수많은 별들과 못다 나눈 밀어가 끝내 아쉬운가? 희미한 달무리를 여운(餘韻)처럼 남기며 자취를 감추려 했다.

시간의 흐름은 그런 섭리([攝理)의 과정을 묵묵히 수행하여 이 땅 위에 은혜를 가득 펼치려 했다. 그렇게 적막한 산속에도 또 다른 하루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고연하기만한 저 산은 초자연적인 면모를 송두리째 드러냈다. 더불어 모든 사물들을 고루 배려하는 후덕함을 지니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 보이는 절벽에 암회색 바위가 적당한 조화를 이뤄 자릴 잡고 있었다. 그 주변엔 푸른 소나무들이 상큼하게 군락을 이뤘다. 그리고 드문드문 늘어선 잡목 숲과 한데 어우러져 참한 모습을 오붓하게 드러냈다.

울창한 소나무는 날이 차가워지니 더욱 검푸르게 보였다. 한껏 들이마시는 숲속의 공기는 솔향기가 가득 담겨 세속에 지친 심신에 청량감을 산뜻하게 불어 넣어 주었다. 비스듬히 기운 산자락 골짝에서 내려오던 수정같이 맑은 계곡물이 매서운 추위에 하얗게 얼어붙었다

이른 아침 산길을 호젓하게 오르내리다 보면 밤사이 얼어붙은 찬 서리가 아침햇살에 녹아 내려 신발 밑창에 닿는 부분이 예법 미끄러워 조심성스럽기도 했다. 인적이 끊긴 적막한 산골엔 매몰차게 스쳐 지나는 바람 소리가 음산하게 들렸다. 그리고 ‘포롱포롱’ 날갯짓을 하며 잡목 숲 위를 나르는 작은 산새들의 소리가 들렸다. 더불어 짝을 부르는 수꿩의 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와 차분하게 가라앉은 산의 정적을 깨트렸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얼른 바라보았다. 날렵하기 그지없는 산토끼가 인기척에 놀란 듯 뛰어 달아나 울창한 숲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리고 텅 빈 다랭이밭 양지바른 쪽에는 털 색깔이 너무도 화사한 꼬리 긴 장끼와 갈색 까투리가 밭주인이 콩 타작을 하다가 흘리고 간 콩알을 주워 먹으려 종종걸음을 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겨울 먹잇감이 귀해 배가 고픈지? 인간과 그리 친화적(親和的)이지 못한 고라니가 아주 조심스럽게 인가 가까이 내려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렇듯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가 무심코 스쳐버리는 주위에서 찾아내야할 아름다움이 산재해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거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는 세태에 쪄들어 시달린 만큼이나 순수했던 감성이 서서히 무뎌지는 것 같았다.

분명 삼한사온의 기온 현상이 있는데 여느 해에 비해 날씨가 엄청스레 추웠다. 연일 영하로 치닫는 음산한 강추위가 을씨년스럽게 근 일주일 정도 지속되었다. 날이 매섭게 춥다보니 식구들 모두가 두툼한 내복을 끼어 입고 가급적 방안에만 들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집 자체가 너무도 허술하여 흙으로 바른 방벽 군데군데에 가는 틈새가 벌어져 보온이 되질 않아 어설프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다고 때마다 방에 군불을 실하게 지피려니 그마저 여의치 못했다. 땔감이라고는 아침저녁으로 겨우 밥을 지을 땔나무 정도가 부엌 한구석에 단작스럽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저마다 사는 형편들이 어렵다보니 대다수 집들은 양식을 아끼느라 하루 겨울 해가 짧다는 애매한 핑계를 대며 점심을 거의 건너뛰다시피 했다. 그나마 경작할 밭이라도 있는 집들은 고구마 농사라도 실하게 지은 덕에 찐 고구마로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철딱서니 없는 어린 자식들이 배가 고프다고 울면서 보채면 주려고 미리 아침식사 때 밥 한 사발을 가늠하여 남겨놓았다.
아랫목 이불 속에 수건으로 폭 싸놓았던 밥 한 사발을 꺼내어 가마솥에 물을 잔뜩 붓고 묽은 죽처럼 끓여 자식들 숫자대로 국그릇에 담아 주었다. 그래도 어린 아이들은 밥알이 둥둥 뜨는 그런 물죽 한 그릇이라도 감지덕지하며 아껴 먹으려고 애매하게 짜디짠 김치만 잔뜩 먹어 부족한 배를 채우려 했다.

그런 모습을 쳐다보기에 너무도 짠했던지 어른들은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변변치 않거니 어여들 먹어. 이따가 저녁 해만 뚝 떨어지면 퍼뜩 가마솥에 따슨 밥해서 밥사발 가득하게 고봉밥으로 퍼 줄 틴께 알았지?”

어른들은 그렇게 볼멘소리를 하시며 허기를 달래 참아내고 사셨다.

그나마 싸늘한 방 공기에 추위를 면해 보려고 불길이 제일 잘 드는 아랫목에는 이불을 진종일 깔아놓았다. 그리고 식구들 모두가 이불 속에 두 발을 밀어 넣고 싸늘한 방 공기를 피해보려 전전긍긍했다.

어머니께서는 외삼촌댁에서 얻어 오신 누런 군용담요로 방문을 가려 조금이라도 추위를 면해보려고 애를 쓰셨다.

참으로 습관이 무섭다는 말이 꼭 맞는 듯싶어 이는 나를 두고 이르는 말인 것 같았다. 잠자리에서 눈을 뜨자마자 얼른 학교에 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조급하게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 방학을 했지? 하고 순간적으로 생각을 바로잡았다.
어찌 보면 그만큼 오랫동안 강박감에 젖어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듯싶었다. 그것은 뼛속 깊이 새겨진 지난날에 있었던 그 모진 아픔들을 딛고 일어서 꼭 성공하여 기필코 사람답게 살라는 내 어머니의 말씀에 대한 책임감이며 또한 내가 이루어내야 하는 의무감이기도 했다.
허나 그런 잔인한 아픔을 어린 나에게 모질게 전이(轉移)시킨 야멸찬 그들에게 내가 당한 만큼 무자비하게 응징하듯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없었다. 먼 훗날 제반여건이 성숙되어 뜻한 대로 이루어질지라도 우선 먹고 살기 다급한 현실에서는 어쩜 너무도 큰 이상을 홀로 꿈꾸고 있는 듯해 때론 무모하게도 느껴졌다. 그만큼 추구하는 이상과 엄존(儼存)하는 현실에서 얻어지는 괴리감이 컸었다.

그 무엇보다도 처해진 현실이 각박할 만큼 처절하게 간고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궁색한 삶은 더욱 쪼들리며 살았고 또 언제까지라고 기약 못할 그때까지는 가난의 늪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는 듯해 보였다. 실로 가진 것이 너무나 없다보니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 늘 반복되는 궁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 넓은 들녘에 땅 한 평 없이 오직 어머니의 젓갈장사 행상에 의존해 네 식구가 연명을 하는지라 식구들 모두가 탁 터놓고 말은 못했지만 자고나면 점차로 줄어드는 쌀자루와 보리쌀 자루를 습관처럼 은근슬쩍 눈여겨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답답한 심정에 이내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아랫마을로 마실이라도 가게 되면 남들 집 아랫방에 듬직하게 자릴 잡고 있는 쌀가마니와 수숫대를 가는 새끼줄로 둥그렇게 엮어 동여맨 고구마 둥우리가 그리도 부러울 수 없었다..

남들이 하기 좋은 말로 나무들이 풍족하게 들어선 산골이라고 하지만 거의 대다수 산들이 제가끔 임자가 정해져 있는 개인 사유림이었다. 그러다 보니 함부로 나무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더욱이 ‘산림법위반’으로 마을 어른 한 두 분이 곤욕을 치룬 적이 있어 땔나무를 하러 산에 오르는 것이 다소 두렵기도 했다.
어쩌다 부질없는 욕심을 부려 비교적 부담이 덜 가는 국유림에서 썩어 나자빠져 있는 폐목 한 동가리라도 몰래 주워올라치면 그 추운 날씨에도 어디에 몸을 숨겼다가 나타나는지 산지기가 두 눈을 부릅뜨고 달려와 난리를 쳐 그도 매번 마음속에 품은 욕심으로 끝내야만 했다.

그래도 거처하는 마을은 다를지라도 같은 면에 사는지라 서로 간에 어설프게라도 작은 안면은 있었다. 산지기가 겉으로는 냉정한 척해도 저마다 처해진 사정이 딱하다보니 모르는 척 눈감아 주기에 비바람에 쓰러져 썩어 들어가는 마른 삭정이와 더북한 솔밭 밑에 흐트러져 있는 솔가리를 갈퀴로 긁어모아 망태기에 담을 수 있었다. 어쩌다 운이 좋아 고주박이라도 눈에 띄면 횡재를 만난 듯 그리도 기뻐했다.
흙에 묻혀 반쯤 썩은 나무둥치를 바지게에 걸머지고 산을 내려 집으로 돌아와 톱으로 자르고 송진이 잔뜩 응고되어 있는 괭이 부분은 무척 힘이 들더라도 자귀로 알맞게 잘라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불이 잘 붙어 불쏘시개로 요긴하게 썼다.

그리고 지난 초여름에 군에 입대를 한 병막 터에 사는 정섭이형이 자기네 산에서 삭정이라도 주워 가라고 선의를 베풀어주었으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더는 미안한 마음에 발길이 썩 옮겨지질 않았다. 그래서 아랫동네 농사를 다소 많이 짓는 집에서 가을 추수가 끝나 묶어놓은 볏짚다발을 돈을 주고 사들여 부족한 땔감을 보충했다.

그러니 뉘 말마따나 공짜로 먹는 동네 우물물 빼놓고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돈을 주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사립짝 앞에 남의 땅이지만 단작스럽게 작은 텃밭이라도 하나 있어 철따라 푸성귀라도 심어 먹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해 뜰 무렵 이른 아침이나 해가 다 지고 난 초저녁이면 을씨년스럽게 몰아치던 추위도 해가 중천에 머무는 점심나절이면 올곧게 내리쪼이는 햇볕 때문인지 추위가 한결 누그러졌다. 비록 초라한 초가집일지라도 남쪽을 맞바라보고 있어 쪽마루에 따스한 햇볕이 깃들어 잔뜩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듯했다.
그 무렵이면 아침내 양지쪽에 웅크려 있던 닭들도 그제서야 마당가를 어정어정 거닐었다. 꼴에 체신머리를 지키려는지 늙은 수탉은 시도 때도 모르고 생뚱맞게 두 날개를 활 펼쳐 긴 목을 쑥 빼 내밀고 멋없이 울어댔다. 그리 한바탕 울고 나니 저도 멋쩍은 듯 괜스레 애꿎은 어린 암탉을 날개깃으로 심술궂게 툭 쳐 밀어붙이며 꼴사납게 위세를 떨고 있었다.

제아무리 바깥 날씨가 춥다고 해도 좀 극성스런 동네 개구쟁이 꼬마들은 정말 추운 줄도 모른 체 동구 밖 언덕 위에 올라 인근 밭에 버려진 고춧대와 깻대를 주워 모아 작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몸을 녹이며 연을 신바람 나게 날리고 있었다.
더없이 드높아 보이는 하늘엔 방패연 두 서너 개가 듬직하게 떠올라 바람 따라 가볍게 머릴 갸웃거리고 그 틈사이로 어울리지 않게 조금 낮게 떠오른 가오리연이 길고 가는 꼬리를 자발스럽게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동네 아이들은 상평 저수지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농수로인 앞 냇가에 얼음이 꽁꽁 얼면 토끼털로 만든 귀마개를 하고 썰매를 타며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동네 어른들은 농한기에 소일거리로 메겡이로 두꺼운 얼음을 쳐내려 둥그렇게 구멍을 뚫어 방울낚시로 붕어를 잡아 올렸다. 그리고 마을 술 주막 삼식이네 집에서 얼큰한 매운탕을 끓여 안주로 삼고 서로 격 없이 어울려 막걸리추렴을 하며 잠시나마 찌든 살림살이에서 얻어진 시름들을 잊으려 했다.

이제 해가 저물고 새해를 맞이하여 만물이 소생하는 역동의 계절, 초봄이 되면 마을에 사는 한 살 아래 동생들 네댓 명 정도가 우리들의 뒤를 이어 읍내 중학교로 진학을 할 것 같았다. 그중에서 우물가에 사는 인식이는 한국전란에 자기 아버지가 마을에 구장 일을 보았다는 턱없는 이유로 천인공노할 공산주의자들의 앞잡이였던 붉은 완장을 팔에 두르고 날카롭게 뾰족한 죽창을 손에 들고 마치 제 세상인양 미친 듯 설쳐대는 종구 삼촌의 밀고로 어느 날 밤 인민군의 총부리에 억지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리고 수일이 지난 후 어느 날 갈가마귀 유난스레 우짖는 뒷산 비석골에서 무참히 목숨을 잃으셨다.

반인륜적이었기에 부도덕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 재앙 속에 참혹한 폐허를 남기고 이 땅을 스쳐갔다. 그런 광란의 소용돌이 속에 씻지 못할 아픔을 당한 집이 마을에서도 몇 집이나 되었다.
어쩌면 그토록 평온했던 마을에 불행과 자손대대를 걸쳐 내려오는 원한에 의한 극심한 갈등과 반목이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인식이가 너무도 어렸을 적에 당한 그 아픔으로 인해 천추의 한이 맺혔던지 어릴 적부터 여느 아이들과 달리 그리도 열심히 공부를 하여 매 학년마다 학급에서 상위권에 들었다.
동네 어른들은 그런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식이를 두고 죽은 자기 아버지의 머리를 쏙 빼닮았다고 칭찬을 거듭하며 ‘왕대밭에 왕대가 나온다.’고 했다.

그런 진솔한 칭찬에 소리를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종구 아버지였다.

지난 이른 봄에 종구네가 새집을 짓느라 목수들이 마을 앞 둥구나무 밑에서 일을 할 때 동네 어른들이 자연스레 모여 인식이를 칭찬하는 말이 그분의 귓가에 들리자 듣기에 못마땅한지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렇듯 두 집 사이에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알게 모르게 반목의 이질감이 지글지글 끓어올라 팽만해 있었다.

마을에서 고추 농사를 제일 많이 지어 인근에까지 소문이 널리 난 집 맏아들인 준섭이도 성적이 양호해 입시문턱이 그리 높지 않으면 그런대로 우리 학교에 입학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을에서 술 주막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고지식한 종구 아버지 못지않게 자식에 대한 욕심과 기대가 유별난 삼식이 아버지의 소망에 부합하지 못하는 삼식이는 학업성적이 좀 부진했다.
또한 면소재지에서 사진관을 경영하는 성균이형 동생 민균이도 역시 학업성적이 뒤쳐져 후기로 학생을 모집하는 논산 읍내에 있는 천주교재단에서 운영하는 중학교나 비교적 규모가 작은 사립학교로 진학을 하여야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친구인 주현이 동생 용현이는 나름대로 학업성적은 중상위권에 드는 듯싶었다. 하지만 가난에 한이 맺혔던지 억척스레 돈을 모아 땅을 한 평이라도 늘리려고 혈안이 된 억척빼기로 온 동네 소문난 주현이 어머니의 욕심에 과연 진학을 시키려는 지는 미지수였다.
주현이네 집도 지난날에는 우리 집처럼 간고하게 살았지만 그래도 노동력을 가진 주현이 아버지가 계셔 소작농을 붙이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허나 뼈 빠지게 소작농을 지어봤자 진취성이 없어 고심 끝에 가족들을 고향에 남겨두고 낯선 타향 땅 서울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선택하신 직업이 남의 집 굴뚝에 가득 낀 그을음을 청소해 주는 일을 하셨다.
그렇게 몇 해 동안 악착같이 모아 이제는 서마지기 논을 사들여 물길 좋은 곳에 장만 했다. 주현이 어머니는 뒤뜰에 큰 대나무밭을 가지고 있어 대나무로 소쿠리와 갈퀴를 만들어 읍내 중간 도매상들에게 팔아 형편이 좀 나아졌다.

지난해에 주현이는 부모의 반대로 우리들과 함께 진학을 못하고 타의에 의해 논산 읍내에 있는 장롱을 만드는 공장에 견습공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내 친구 주현이가 마음에 걸려 늘 안쓰럽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스럽기도 했다. 허나 타고난 천성이 쾌활한 주현이는 주위에 그런 기우에 동요치 않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런 고향 친구가 때론 절절하게 그리워 보고 싶었지만 주현이가 목공일을 배우느라 읍내 남의 집 일을 거들며 그 집에서 먹고 자는지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좀처럼 볼 수가 없어 마음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러니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라고는 일 년에 두 번 설명절과 추석 때뿐이었고, 이미 고인이 되신 자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제삿날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제가끔 아린 사연들을 언제나 과묵한 고향의 땅속에 깊숙이 묻어두고 좀 더 나을 것만 같은 기약 없는 미래를 향한 꿈들을 반추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살을 에는 추위가 지속되자 어머니께서는 행상을 멈추시고 여느 해 겨울처럼 남의 털옷가지를 맡아 오셔 손뜨개질을 하셔 어려운 살림에 그라도 보탬을 하시려고 애를 쓰셨다. 그리고 순덕이 어머니께서도 지난 두 서너 해 동안 어머니한테 손뜨개질을 열심히 배워 온 터라 이제는 솜씨가 제법 익숙해지셨다.
어머니께서 털옷의 몸통 부위를 실로 짜면 순덕이 어머니는 두 팔 부분을 뜨개질하시면서 서로 돕고 마주 보시면서 웃으시는 모습이 너무도 화기애애하게 보였다.

그런 두 분의 노고에 작게라도 보탬이 되려고 모처럼만에 부엌 물두멍에 물을 채우려고 물지게를 지고 사립짝을 나섰다.
반천에 우둑하게 떠 있는 한낮 햇살이 초가지붕 위에 잔잔하게 내리비추는 텅 빈 원두막 앞을 지나 언덕마루에 올랐다.
앞을 향해 평평하게 탁 트인 십 여리 길 넓은 들녘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춥기도 하련만 동네 꼬마 녀석들은 무엇이 그리도 신바람이 나는지 저마다 소리를 치며 열심히 연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런 티 없이 맑은 웃음소리와 눈앞에 방만하게 펼쳐지는 시원스런 풍광이 내 눈앞에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하여 끈끈한 정이 절로 묻어나니 내 스스로 안위하며 외롭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하늘을 높다랗게 우러러 보며 다소 침체되었던 나 자신을 다시금 추스르려 심호흡을 크게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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