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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299 조회 : 2,252




등메산 산기슭에 자릴 잡은 내가 사는 집은 속된 말로 겨우 움막 수준은 벗어날 수 있는 작은 초가집이었다.
그러나 얼치기 목수가 서툰 솜씨로 어설프게 지어 놓은 집이라 정말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집이라고 모양새가 그러니 마을에 있는 다른 초가집들에 비교하여 추녀가 턱없이 낮았다.
그런 탓에 햇볕이 잘 들지 않아 방안이 어두웠던 탓인 것 같았다.
버름한 벽을 눈대중으로 대충 뚫어 달아낸 봉창문 하나가 그나마 정남쪽 방향으로 트여저 있었다.
그렇다 보니 모양새가 그저 비두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창문 밖으로 또 하루가 어김없이 끄무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부스스하게 눈을 뜬 귓가에 뒤뜰 개오동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꽤나 시끄럽게 들려왔다. 숱한 만물들 중에 새들처럼 바지런한 것들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보았다.

이제 이 하루만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또 해가 바뀌어 새로운 한 해의 첫날이 밝아올 것이다.
무릇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니 그토록 바람은 컸으나 못내 이루지 못한 숱한 아쉬움에 마음이 더없이 무겁기만 했다.

뭇사람들이 입을 모아 흔히 말하길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가 안 된 미흡한 상태에서 다시금 한 해의 벽두에 서려니 적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아무리 온 주위를 휘둘러보아도 헤어날 길이 없는 가난의 역경은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절박함뿐이었다.
더욱이 혹한기에는 빠듯한 양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참으로 고역(苦役)이었다.
그런 각박한 환경 속에서 조갈난 심성은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꼭 벗어날 것이라고 넋두리처럼 수없이 중얼거려 보았다.

탕내 가득 서린 방안, 바람 따라 떨리는 문풍지 소리에 마음 더욱 스산해져 버릇처럼 나도 모르게 한숨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 애틋한 소리는 정녕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은 절실한 갈구였다.
허나 갖추어진 여건이 현실을 따르지 못하는 냉엄함에 입술은 바싹바싹 타 들어만 갔다.

버릇처럼 두엄 가에 소변을 보려고 토방 위에 널브러져 있는 고무신짝을 어름어름 찾아 신고 마당에 나섰다.
하얗게 잔설이 남아있는 앞산 능선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찬바람이 두 볼을 스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은혜로운 이 땅 위에 내가 존재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두 엄지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입술을 지그시 물어 나름대로 자긍심도 가져보았다.

싸리나무로 얼기설기 얽어놓은 울타리엔 바로 엊그제 내린 눈이 수북이 쌓여 녹지 않은 채 덩그러니 얼어붙었다.
간고하게 살아가는 고뇌에 찬 삶의 숨소리가 배어나는 마을 모습이 울타리너머로 여느 날과는 달리 애련하게 눈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하얀 눈이 쌓인 넓은 들녘을 지나 조금 멀리 읍내 모습이 섭섭하지 않을 만큼 아득하게 바라보였다.

눈을 돌려 면소재지 쪽을 바라보았다.
거무튀튀한 판자벽으로 둘러진 지서 건물 현관 앞에 불그레한 가로등이 뻘쭘하게 자릴 지키고 있었다.
추위에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불빛이 애처롭기만 했다.
그리고 마을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교회의 십자가가 다붓다붓하게 머릴 맞댄 초가지붕들보다 월등히 높다랗게 보였다.

새벽 예배시간을 알리려나? 높다란 종탑에서 성스럽게 울려 펴지는 교회의 종소리가 고적한 내 영혼을 포근히 감싸 주었다.
그 십자가 위에 닿을 듯 말 듯 창백한 모습으로 기울어가는 하얀 반달이 마음속 애잔하게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아직은 시간이 이른지라 읍내로 내닿는 신작로엔 오가는 차량들의 행렬이 뚝 끊겨 그지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그리고 마을로부터 외떨어져 나지막하게 자릴 잡고 있는 들 주막의 초가지붕이 더할 나위 없이 고즈넉해 보였다.

뒤뜰 돌무더기엔 녹아내린 눈 사이로 담쟁이의 거무튀튀한 넝쿨과 메말라 오그라든 암갈색 이파리가 어둑하게 눈에 띄었다.
마치 메마른 겨울과 대칭(對稱)을 이루듯 퍽이나 초췌하게 보여 그 또한 더 없이 안쓰럽기만 했다.
그래도 그 바로 옆에 군락을 이룬 조릿대가 청초한 모습으로 침잠의 겨울을 홀로 지키고 있어 삭막함을 덜어주는 것 같았다.

검게 그을린 굴뚝 옆에 놓인 닭 둥지에선 홰에 올라앉아 두 날개를 쫙 펴 긴 목을 쑥 빼 내밀고 목청을 돋우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온 주위에 날이 밝아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검둥이는 쪽마루 밑을 잽싸게 기어 나와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어 댔다.
언제나 그랬듯이 살갑게 나를 맞아주어 나에겐 소중한 반려견임에 틀림이 없었다.

축축한 밤이슬이 밤새워 온 누리에 내려앉아 온갖 미물들이 갈증으로 타는 목을 흠씬 축이고 있었다.
그렇듯이 자연은 보이지 않는 시간에 더욱 은밀하게 변화의 탈을 벗는 듯했다.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을 위하여 칠흑 같은 밤이 존재하고 그런 밤이 있기에 빛나는 아침이 다시금 도래되는 것 같았다.
그 찬란한 햇빛이 두루 비춰 살피려 하는 천체 만물들이 그토록 소중하게만 느껴졌다.
그와 더불어 우리가 삶을 영위함에 있어 그 어느 작은 것 하나도 필요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태양의 빛이 강렬해 보이면서도 온후함을 품고 그저 스치는 듯 무심한 바람 소리에도 깊은 진리가 가득 담겨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내 삶의 터를 각인시키듯 코끝에 잔잔하게 묻어나는 흙 내음을 언제나 마음 편히 맡을 수 있었다.

그래서 등뫼산 산자락이 아늑히 감싸고 있는 고향은 포근한 어머니의 품안처럼 더욱 다정하게만 느껴졌다.

또한 겸허한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고 차분하게 땅을 살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도 세심하게 눈길을 주고 싶었다.
더불어 귀에 미쳐 들리지 않는 것에도 깊은 관심 속에 귀를 기울이는 일상의 습관을 가져 보고 싶었다.
그런 참한 심성으로 세상에 조금 더 다가가는 이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맘속으로 조용히 빌어 보았다.

그런 소망 속에 묵은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이른 아침에 경건한 마음으로 눈에 쌓여 있는 앞산을 바라보았다.
다복다복 쌓인 눈 속에 내가 늘 마음속에 담고 사는 정겨운 얼굴들이 선한 모습으로 다시금 떠올랐다.
맨먼저 떠오르는 것은 모진 세월 속에 저주스럽게 찾아 든 전란으로 먼저 숨을 거두신 내 아버지였다.
그 다음이 병고로 사라져간 이름 석 자도 기억 못할 단 하나뿐이었던 내 누이였다.
그리고 요즘 또 하나 가슴 뭉클 옹골차게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으니 바로 내 친구 옥순이었다.
불그레하게 달아오르는 풋복숭아 같은 두 볼을 갖은 옥순이의 참한 모습을 늘 마음 한쪽에 소중하게 담아 두고만 싶었다.
또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감정의 흐름이 활달해지고 서로의 믿음이 돈독해질 것만 같았다.
고로 우리라는 굴레 안에서 옥순이와 더불어 머물고만 싶었다.
또한 그 아무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청정한 공기와 선한 바람처럼 새뜻한 그런 관계가 우리 둘 사이에 영구히 존재하길 간절하게 바랐다.

얼마 전부터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차오르는 감정을 견디기 어려워 옥순이에게 단 한번쯤은 내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전해보고 싶었다.
그저 일상생활에서 서로 주고받는 허물없는 말이 아닌 설레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적어 보내고 싶은데 그것이 생각같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얀 눈을 고깔모자처럼 쓰고 있는 빨간 우체통에 한 장의 편지를 정성스레 넣을 용기가 없었다.
더불어 직접 전해줄 수 있는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그것은 만약에 편지를 전해주었을 때 옥순이가 버럭 화라도 내면 어떻게 할까 하는 조바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토라지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앞섰다. 그런 이유로 종이 위에 애꿎게 끄적거리다 바보처럼 애석한 마음으로 매번 그쯤에서 멈추고 말았다.
더욱이 한동네에서 함께 자라난 탓에 너무도 친근한 사이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평소엔 잘 쓰지도 않았던 색다른 어휘를 인용하려니 그 또한 어색하고 서먹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글을 써보려고 바동대는 그 순간만은 텅 빈 백지 위에 나 혼자만의 아기자기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어 흐뭇하기도 했다.

하얀 노트 위에는 옥순이를 향한 마음의 느낌을 넓은 여백에 있는 역량을 다해 펜글씨로 차곡차곡 곱게 써 보려 안간 힘을 썼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말 중에서 제일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는 말들만 가득가득 써 보여주고 싶었다.
마음엔 그런 알 듯 모를 듯 감정들이 그리도 많이 함유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글로 옮기려 하면 자꾸만 손이 굳어졌다. 또한 방금 전 내가 무엇이라고 썼는지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은 마냥 두근거려 얼굴이 확 달아올라 숨결이 거칠어졌다.

마치! 수학 시간에 좀처럼 풀리질 않아 아등바등하며 애를 태웠던 연립방정식 문제보다 몇 배나 더 난해한 느낌을 주었다.
이저리도 못하는 답답한 마음은 끝내 몇 자 써놓은 종이를 그저 두 손 안에 넣고 우직스레 구겨버리고 말았다.
그런 내 속마음을 식구들에게 들킬까 두려워 아랫주머니에 얼른 집어넣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부엌 아궁이 앞으로 가 밥을 지으시는 순덕이 어머니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주머니에서 꺼내 얼른 아궁이 불길 속에 냅다 던져버렸다.
그럴 적마다 순덕이 어머니는 급작스런 내 행동이 조금은 의아스러우신지? 고개를 가볍게 갸웃거리시며 내 얼굴을 짯짯이 바라보셨다.
그리면 나는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아궁이 앞에서 얼른 일어서 버름한 부엌 거적때기를 제키고 마당 밖으로 나와 숨을 크게 몰아 내쉬었다.

그리고 요즘들어 어쩌다 스치는 옥순이의 체취는 예전과는 달랐다.
술렁이는 마음에 숱한 밤을 잠 못 들게 하여 수없이 이리저리 뒤척이게 했다.
그리 잠 못 이뤄 뒤척이는 밤이면 뒷산 언덕바지에서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가 더욱 거세고 간헐적으로 밤 부엉이는 청승맞게 울어댔다.
그쯤이면 호남선 선로 위에 시발역 목포를 출발하여 서울로 북상하는 새벽 첫 열차의 요란한 진동소리가 들렸다.
열차는 들녘과 마을을 가로 질러 숱한 간이역들을 이으며 달려와 기적소리를 허공에 세차게 울려 어수선산란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했다.

그도 여의치 않아 홀연히 뜨락에 나서면 부연 달빛 아래 기역자 편대를 이뤄 어디론가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울음소리에 오히려 마음은 더욱 허전해졌다.
그런 용기 없는 내 모습을 비아냥거리기라도 하듯 밤하늘에 잔별들은 더욱 똘방똘방한 모습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날이 훤하게 밝아오자 눈앞에 빤히 바라보이는 면소재지 화산리 마을에 하루를 시작하려는 듯 초가집들이 한 집 두 집 전등을 끄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서 앞 전신주에 기대어 함석을 둥그렇게 구부려 만든 갓을 쓰고 있는 외사등도 빛을 멈추고 말았다.

먼젓번 옥순이네 집 마루 위에서 나눴던 말 중 마지막 부분의 말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날 옥순이가 나에게 보여준 냉담한 태도에 왠지 모르게 거리감을 느꼈다.
그런 이유로 옥순이 앞에 바짝 다가서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망설여졌다.
그리고 전처럼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면서 대문 안으로 들어서기엔 조금 민망스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한번 마을 우물에 물을 길러 가면 혹여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심리에 저녁나절만 되면 추위에 힘든 줄도 모르고 동네 우물터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우물에서 물을 깃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눈을 적당히 피해 옥순이네 집 담장너머를 마치 무엇을 훔치려는 도둑고양이처럼 슬금슬금 넘겨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고 바라보았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색다른 느낌으로 어른거리고 얼굴의 미세한 부분 하나까지도 모두 아름답게만 보였다.
그중에서도 보일랑 말랑한 오른쪽 덧니가 유난스레 기억되었다.
그렇듯 그 모두가 참한 모습으로만 눈앞에 다가서니 분명 전과는 다른 감정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싹터 이미 마음속 깊이 자릴 잡고 있었다.

아직도 싸늘하기만 한 날씨에 울타리 앞에서 한참을 그리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언뜻 인기척이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식구를 중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시는 순덕이 어머니께서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시고 아침밥을 지으시려 부엌으로 향하고 계셨다.
그런데 오랫동안 추운 줄도 모르고 울타리 앞에 그저 멍하니 서 있는 내 모습이 의아스럽고 궁상맞게 보였는지 괜스레 헛기침을 하셨다.
그리고 방안에서는 자리에서 일어난 순덕이에게 겉옷을 입히시는지 어머니의 말소리가 방문 밖으로 도란도란 들려왔다.
부엌에서 풍겨나는 삭정이 타는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방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향해 어머니께서 의아스럽다는 눈빛으로 말씀을 하셨다.

“너는 먼 놈에 오줌을 강경 읍내까장 가서 보구 왔냐? 날 한질라 엄청나게 춥구먼. 뭣났다구 그 추운디서 청승맞게 오들오들 떨다 들어 오냐? 그라다 곱뿔이라두 걸리면 으짤라구 그런다냐? 너 혹시! 무슨 걱정꺼리라두 있냐?”

순간적으로 혹시나 동네 꼬마녀석들이 연자방앗간 대문짝에 써놓은 낙서를 보시고 그러나 싶어 어머니의 말씀에 가슴이 뜨끔했다.

“아녀유. 기냥 바깥바람이 시원해서 쪼매 서 있다 들어 왔구먼유. 엄니는 뭘 그런 걸 가지구 쓸데없이 신경을 쓰는지 모르것네. 에이 우물터에 물이나 길러 가야것네.”

왠지 비좁은 방에서 더 이상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마을 우물에 물 길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얼른 방문을 열고 나오려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고개를 갸웃거리시며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아니! 쟈가 으쩐 일이라냐? 이른 아침나절부터 밥두 안 먹구 물 길러 간다고 나서게 오래 살다보니 참 별일두 다 있네 그려.”

거듭 이어지는 어머니 말씀에 잔뜩 긴장을 했는데 막상 우려했던 옥순이와 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질 않아 적이 안심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얼떨결에 부지런을 떠는 것처럼 물지게를 지고 언덕 위에 올랐다.
들녘에서 냉기를 가득 품은 맞바람이 싸늘하게 불어와 몸이 추워져 기분은 그다지 흔쾌하질 않았다.

동네 방앗간 대문짝에 써 놓은 낙서를 정말 어머니께서 모르시는 것인가? 아니면 알고 계시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하시는 것인지 하고 언덕배기를 내려서 철롯길 건널목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생각을 거듭했다.

철길을 가로질러 건너서니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손주와 먹을 아침밥을 준비하시려는 듯 쌀이 담긴 바가지를 드시고 부엌 안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옆집 흥남이 아저씨네 집에서는 복실이가 새끼를 낳아 어린 강아지들이 어미젖을 찾느라 보채는지? 울어대는 강아지 울음소리가 탱자나무 울타리 밖으로 가냘프게 들려왔다.

그리고 동네 어귀 상수네 보리밭 가장자리엔 정겹게 눈에 익은 거북바위가 내가 감추려하는 속내를 있는 그대로 모다 알고 있는 듯 과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일 년 중 가장 춥다는 소한과 대한의 절기가 이내 닥쳐올 것만 같아 저 멀리 은진면 상평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냇물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나마 가느스름하게 햇살이 비치는 방죽 양지쪽엔 나처럼 이른 아침부터 바지런을 떠는 오리들이 무리지어 앉아 쉴 새 없이 부리로 몸을 가다듬고 있었다.

아직은 이른 아침 시간이라 마을 앞 개울가엔 썰매를 타는 동네 아이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면소재로 이어진 소달구지 길에도 오가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눈에 띄질 않아 더없이 적적해 보였다

동네 앞 개울가 나무다리 위에 오르니 마을에서 집집마다 밥을 짓느라 부엌에서 볏짚을 태우는 매캐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조금 멀리까지 풍겨났다.

마을 앞 둥구나무 밑에는 밤사이 누군가 치성을 드렸는지? 잘 추슬러 놓은 볏짚 위에 두서너 가지의 나물과 하얀 밥이 그때까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동네 고샅길로 막 들어서는데 담뱃대 만드는 공방 집 금실이 누나가 면소재지에 문을 연 미장원에 출근을 하려고 서둘러 나오고 있었다.
진식이네 담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서 서로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웃어주어 서로 가볍게 눈인사를 나눴다.

동네 첫들머리 우현이네 집 마당에는 우현이 아버지께서 가마니틀로 가마니를 짜시려는지 볏짚을 풀어헤쳐 추스르고 계셨다.

골목길로 접어들어 연자방앗간 앞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눈길이 모아졌다.
삼일 전 늦은 저녁에 남들이 볼까? 무서워 성급하게 지워 놓은 낙서의 흔적이 대문짝에 지저분하게 남아 있었다.

우물가에는 물 길러 오는 동네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오랜 세월동안 눈에 익은지라 먼발치서 옷매무시만 보면 우물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누가 누구인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뚝심 좋게 입바른 소리를 잘하시는 삼식이 어머니와 그와는 정반대로 그저 수더분하신 준섭이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새중간에 마을에서 입이 좀 가볍기로 소문이 난 떠버리 아주머니와 성격이 남달리 우직하신 인식이 어머니의 모습도 보였다.
우물가에 다가서 동네 어른들에게 머릴 숙여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짐작했던 대로 떠버리라는 별명에 걸맞게 순금이 어머니께서 그새를 못 참고 나를 향해 말문을 여셨다.

“아니! 이게 누구여? 등뫼골 사는 상민이 아니여? 그새 못 본 사이 장정처럼 엄청나게 커번졌네. 저 어깨 딱 벌어진 것 좀 봐, 아이구 장혀라.”

여느 때 같으면 그냥 수더분하게 넘길 수 있는 말인데 그 낙서 일이 일어나고부터는 동네 어른들 대하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그런 탓인지? 괜스레 두 볼이 발갛게 물들고 가슴이 두근거려 그 다음에 이어질 말에 온갖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자 두레박으로 물을 깃고 계시던 삼식이 어머니께서 내 편을 드시는 듯 말씀을 하셨다.

“암! 그 모지락스런 세월 버티면서 야물딱지게 컸지 뭐. 거기다 인물은 죽은 지그 애비를 빼닮아 훤칠하고 공부도 남다르게 잘하닌께 조선천지 어디다 내놔두 책잡힐 것 하나 없지 뭐. 다들 안 그런감?”

그러자 함지박에 쌀을 씻고 계시던 인식 어머니께서 삼식이 어머니의 말씀을 거드시는 듯 말씀하셨다.

“그러길래 옛날부터 왕대밭에 왕대 나온다는 말이 안 있던감? 암튼 두고 보라구 상민이가 잘될 꺼구먼, 암! 꼭 그렇게 되어야지. 이리 가난하게 사는 것이 억울해서라도 그 잘나터진 놈들 보란 듯이 큰소리 치고 살아야지.”

삼식이 어머니와 인식이 어머니의 말씀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허나 한편으로는 다른 어른들 입에서 나와 옥순이에 관한 무슨 말이 나올까 싶어 마음은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제발 이쯤에서 나에 대한 말들이 멈춰주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우물에 타래박을 넣으면서 동네 어른들의 눈길을 피해 은근슬쩍 옥순이네 집 흙담장 너머로 마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옥순이네 집 마당에 옥순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못내 서운키만 했다.

가슴 가득 차오르는 설렘은 강렬한 그리움을 낳고 그런 그리움이 쌓여 심중에 풀기 힘든 가슴앓이를 옹골지게 남기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우물가에 모이신 동네 어른들께서 나누시는 말씀이 그쯤에서 멈추고만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큰 기대를 하면서 우물터에 갔으나 끝내 옥순이를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은 그도 컸다.
여느 때 같으면 그저 스스럼없이 옥순이네 집에 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물터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많아 은근히 눈치가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망서려졌다.
그래선지 그날따라 이상하게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물지게를 지고 집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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