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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301 조회 : 2,433




해마다 겨울 끝무렵엔 날씨가 으레 그랬었다.
마치 열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네의 삶에 형태처럼 잔뜩 찌부뚱해 하늘 빛은 더욱 어스름 했다.
그래선지 하늘에 다소 많은 양에 비구름이 가득 드리워져 하루 내 기분이 탐탁하치 못했다.
온종일 답답하게 침울했던 하늘이 저녁 무렵이 되어 서서히 제 모습을 찾는 듯했다.
검게 짙은 구름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듯 서서히 흩어져 점차 개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흐린 날씨 탓인지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좀 떨어진 원목다리가 읍내를 잇는 철교와 더불어 가들막하게 보였다.
그 끝머리쯤에 흐릿한 저녁노을이 지평선 아래로 느긋하게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어둠살이 어스름한 모습을 드러내어 온 사방이 자뭇 쓸쓸하게만 보였다.
어둠살이 온 주위를 욕심껏 감싸 안으면 마치 휭한 들녘이 제집인양 그닥 달갑지 않은 찬바람이 드문드문 불어왔다.
조금은 거센 듯한 들녘 바람이 불어 올 때마다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한껏 을씨년스럽게 뒤척였다.
더불어 어린 마음속에 또다시 짙은 외로움 한자락을 자잔하게 남겼다.
어찌보면 하루 중 그 맘때쯤이 가장 적요한 시간인 것 같았다.
마치 그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한 허한 마음 그자체이었다.
그리 한참을 술렁이다보면 벌써 주위는 어둠 속에 차분하게 묻혀가고 있었다.
그런 고적한 분위기를 깔끔하게 뒤바꾸려는 듯 구름사이를 어렵사리 헤집고 보름달이 뒷동산 언덕바지 위에 덩그라니 떠올랐다.
그러다 얼마 후 어기차게 보이는 왕소나무의 우듬지 위에 둥그런 모습으로 듬직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 온유한 빛이 온 대지에 충만하게 번져 다소 흐릿할지라도 모든 사물들이 그토록 참하게 보였다.

지난 일년내 민초들이 흘린 땀이 배인 넓다란 들녘이 푸근하게 쉼을 하고 있었다.
더불어 다음 해를 기약하며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달빛 아래 아련히 펼쳐졌다.

나무랄데 한점 없는 새하얀 보름달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어 다정한 눈빛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달빛에 비친 마을 모습이 더없이 살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따뜻한 정감이 끈끈하게 묻어나는 마을 모습에 바라보는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해졌다.
그런 모든 모습들이 낯과는 또다른 느낌으로 눈 앞에 자뭇 생경스럽게 다가섰다.
그래서 그 모든 느낌들을 마음 한구석에 오랫토록 담아놓고 싶었다.

마을 초가지붕 너머로 너른 들녘이 저 멀리 아늑하게 바라보였다.
서편 들녘 원목다리 너머로 어둠을 머리에 이고 있는 채운역사의 모습이 거리가 먼 만큼이나 달빛 아래 어릿어릿하게 보였다.
그리고 역사 입구엔 누구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처럼 새치름하게 불을 밝힌 빨간 외눈박이 신호등 하나가 애처럽게 자릴하고 있었다.

몸을 가볍게 돌려 뒤를 돌아 면소재지 쪽을 바라보니 비교적 야트막한 산기슭에 빗대어 외롭게 서 있는 우체국 건물이 여늿때와는 다르게 너무도 작달막하게 보였다.
바로 그 앞에 둥그렇게 생긴 빨간 우체통도 매정한 겨울 추위를 홀로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작아 앙증맞은 그런 모습이 은은한 달빛과 더불어 적적하나마 나름대로 밤의 운치를 돋우었다.
이 모두가 자연이 빗어낸 참된 모습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려 했다.
그러고 보니 마냥 쇠잔해진 겨울의 허전한 모습도 달빛 아래에선 그저 모두가 평온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밤하늘은 달빛의 움직임에 따라 어제 그맘때처럼 대자연의 그 모든 것을 살뜰하게 감싸안아 완연한 모습을 숙연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도 빠트릴 수 없어 더할나위 없이 정겹기만 했다.
그리 떠오른 달이 이따금씩 구름 사이를 비켜서며 바라보기에 답답할 정도로 느릿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달이 오랜 세월동안 반복을 거듭한 일이라, 밤이 지나고 나면 이내 새벽이 찾아 오는 자연의 이치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거역할 수 없는 대자연의 변화가 그렇듯이 우리에 삶 또한 그 순리에 따라 영위하는 것 같았다.
허나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몇일 동안 잔뜩 똬리를 틀고 좀처럼 물러설 줄 모르는 강추위였다.
그런 추위를 더욱 부추기듯 세찬 바람이 아금박스럽게 추녀 밑까지 파고 들어 실로 삭막하기만 했다.
저마다 사는 형편이 극히 어렵다보니 추위에 몸과 마음이 온통 오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다시금 가라앉는 기분에 적막해지는 밤의 풍경이 더욱 썰렁해지려 했다.
그래도 밤을 밝혀주는 달이 있어 을씨년스런 겨울의 황량함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는 듯해 그라도 위안을 삼으려 했다.

그런데 어렷을 적 그때엔,가만히 달을 처다보고 있노라면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자연의 진리는 하나임에 틀림이 없는데, 구름을 비켜서 달이 흘러가는 것인지 아니면 달을 비켜 구름이 흘러가는 것인지 자못 궁금하였다.

면소재지로 이어진 달구지 길이 세월따라 눈에 익혀진만큼 어스름한 어둠에 잠겨있을지라도 그또한 숱한 정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행여 누가 길을 걸어오기라도 하면 멀리서나마 옷매무시만으로도 이내 누가 누구인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달은 더할 나위 없이 휘영청 밝기만 했다.
더불어 작달막한 별들이 달 주위를 다정다감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환한 달과 한데 어울려 어둠을 뚫고 더욱 똘방똘방한 모습으로 탐스런 은하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저 마다 영롱한 빛을 발산하는 천체의 모습과는 달리 하늘 아래 산골짜기에서는 세차게 불어오는 밤바람으로 온통 뒤숭숭했다.
그로 인해 뒷산 언덕배기에 우뚝 서 있는 왕소나무 솔잎이 거센 바람에 부대껴 내는 솔바람 소리가 꽤나 큼직하게 들려왔다.
더불어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나목들의 울음소리가, 날짐승들의 우짖는 소리처럼 들려 와 우울해지는 마음 속에 더 없이 섭디섭게 들렸다.
그렇게 밤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탓인지 이따금씩 심심찮게 울어주던 밤 부엉이 소리도 왠지 들리지 않아 더없이 처연키만 했다.

저 멀리 원목다리를 건너 서편 들녘과 끝닿은 곳 강경읍내가 흐릿하게 보였다.
읍내에서 밝히는 전등 불빛들이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인지 끄무레하게 보여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개울 건너 면소재지의 집집마다 밝혀놓은 전등불빛이 가득가득 들어찬 솔숲 사이로 불그레하게 새어 나와 뜻 모를 외로움을 더했다.
그다지 멀지않은 윗마을에선 뉘 집의 개 짖는 소리가 크렁크렁하게 울려 밤이 깊어 가기를 재촉이나 하는 듯했다.

아직은 잠자리에 들기 전이라 식구들이 위풍이 센 냉랭한 방안의 화롯가에 둘러 앉아 늘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지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여느 날과는 달리 옥순이 어머니께서 느지막이 밤마실을 오셨다.
어디서 미세하게나마 낯선 기척이라도 들리면 사정없이 짖어대는 검둥이었다.
그런데 그새 동안 옥순이 어머니를 드문드문이라도 보아 온 터라 제 딴엔 나름 친숙해졌는지 단 한 번도 짖지를 않았다.
옥순이 어머니께서 내동 밝은 낯을 피해 밤늦게 마실을 오신 것으로 보아 분명 무엇인가? 나름대로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아 자못 궁금해졌다.
손님이라고 찾아왔지만, 늘 가깝게 지내 온 터라 비좁은 방안에 가득 풍겨나는 석유등불 끄름과 청국장 냄새에도 꺼리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가뜩이나 비좁은 단칸방에 손님이 오고 나니 옹색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러면서도 옥순이 어머니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졌다.
바깥 날씨가 모질게 추운 탓도 있지만 옥순이 어머니깨서 몸을 잔뜩 웅크리시고 두툼한 군용 담요를 기다랗게 펼쳐 걸어놓은 방문짝을 비집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옥순이 어머니께서 그날따라 유난스레 부산을 떨며 날씨에 대한 투정을 양껏 부리시면서 말문을 여셨다.

“워메 사람 잡을려고 지랄을 헌다냐? 뭔 넘으 날이 이리도 오라지게 춥다냐? 섣달 추위에 김치 독이 깨진다더니 참말로 그 말이 딱 맞는가 보네.”

그리고는 몹시 추웠는지 이내 솜이불을 깔아놓은 따뜻한 아랫목 방바닥에 두 손을 넣으셔 추위에 잔뜩 움추러든 몸을 풀려고 하셨다.
그러자 좀 부산을 떠는 옥순이 어머니를 싫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어머니께서 말을 이으셨다.

“아니, 뭔 일이 있는가는 당췌 모르긋지만 뭣땀시 벌건 대낮에 오지 다 느지막하게 그것도 밤길한질라 사나운데 기를 쓰고 오느라고 애를 먹냐? 암튼 잘 왔다. 안 그래도 저녁상 물리고 나서 뭘 할까? 하고 적적했는데... 근데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거냐? 니가 이 밤중에 날 찾아 온 걸보면 필시 뭔 일이 있기는 있는가 본데, 어여 말을 혀봐.”

어머니께서 궁금하신 듯 채근대자 솜이불 속에서 손을 빼시며 자세를 바로 하셨다.
그런데 말문을 열려다 말고 자꾸만 순덕이 어머니의 얼굴을 슬금슬금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시는 것 같았다.
곧장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자꾸만 우물거리셨다.
그런 옥순이 어머니의 부자연스런 행동으로 보아 아마도 방앗간 경태 아저씨와 순덕이 어머니의 재혼 문제로 온 것같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와는 달리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자꾸만 순덕이 어머니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셨다.
그러자 조급해진 어머니께서 다시금 말을 꺼내셨다.

“도대체 뭔 야그인지는 모르긋지만 당췌 사람 궁금허게 하지 말구 어여 이야그 부터 혀봐.”

그렇게 어머니께서 재촉을 하시자 우물쩍거리던 옥순이 어머니께서 그제서야 입을 여셨다.

“음 그랑께 그게 뭐시냐면, 내가 전번에도 너한테 몇 번씩이나 말했지만, 방앗간 순태 양반하구 니네 집 순덕이 에미를 한 집 살림으로 합쳤으면 허는디 니 생각은 으쩔란가 모르긋다. 나도 내일이나 돼서 벌건 대닞에 니네 집에 올려구 혔는디, 우리 집 그 양반이 숨넘어가게 하두 재촉을 혀싸서 내가 이 밤중에 부랴부랴 와 번졌다. 글구 시방 우리 집에 경태 그 양반이 아까 초저녁나절부터 와서 우리 집 그 양반이랑 애기를 나누고 있는디, 경태 양반 허는 말이 자기는 순덕이 에미만 좋다구 허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구 한데 합쳐 살고 싶다구 하드라. 그래서 기왕지사 애기가 나온 김에 당사자인 순덕이 애미에 의사가 어떤지 물어볼려구 이 밤중에 찾아왔어. 급한 김에 내 생각 같아서는 본인헌티 직접 물어보구 싶지만, 당췌 뭐 말이 통해야지. 그렇다고 너처럼 손짓발짓을 혀서 알아볼 수두 읍으니 기냥 답답허기만 하다.”

그렇게 옥순이 어머니께서 밤중에 우리 집에 찾아온 이유를 밝히셨다.
그러자 차분하게 이야기를 다 듣고 나신 어머니께서 순덕이 어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시려는 것 같이 느껴졌다.
머리에 꼿아두었던 가느다란 실핀을 뽑아 등잔불 심지를 등잔꼭지 위로 밀어 올려 불을 더욱 밝게 밝히면서 말씀하셨다.

“글쎄다. 니가 허는 말은 충분히 알아듣겠는디 뭐시뭐시혀두 당사자 맴이 제일 중요한 건디, 그새 중간에 니가 한말을 그냥 나 혼자서만 곰곰이 생각해봤지 순덕이 에미한테 직접 물어본 적이 없어 나도 잘 모르긋다. 그렇다고 당장에 내가 그런 말을 불쑥 꺼낼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내가 묻는다고 혀두 당장에 무슨 대답을 하긋냐? 그러닌께 내가 순덕이 에미헌티 싸묵싸묵 물어봐서 순덕이 에미의 속맴을 너한테 알려줄 틴게 그리 알으라. 기나저나 경태 그 양반도 그렇지, 아무리 재혼이라고는 허지만서루 그래도 혼인은 인륜지대사인데 그리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안 그르냐?”

“그러게나 말이다. 그건 니 말이 천번 만번 맞는 말인디, 경태 그 양반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달라고 졸르는 것매냥 뭘 그리 극성맞게 서두는지 모르긋다. 허긴 혼자서 살다보닌께 외롭기두 하구 홀애비 혼자 사는 집 꼴이사 말이 아니긋지 뭐. 왜? 말이 안 있드냐? 홀애비 삼년이면 이가 스 말이고 과부 삼년이면 쌀이 스 말이라고... 암튼 뭐니뭐니 혀두 집에는 여자가 살림을 혀야 되는 법이여. 니 생각은 으쩔랑가 몰러두, 나는 그저 두 사람 처지가 엇비슷허닌께 이것저것 다 따지지 말구 둘이서 어여 합쳐 저 어린 것이나 잘 키우면서 도란도란 잘 살았으면 좋긋다. 글구 너두 내년 봄엔 까치말로 이사를 해야하닌께 없는 처지에 한 입이라두 덜어야 안 되긋냐? 상민 에미야, 시방 내가 헌 말 고깝게 생각하지 말구 잘 생각혀봐. 내 말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맞을 틴께.”

옥순이 어머니가 한밤중에 우리 집으로 찾아왔을 때부터 이미 어렴풋이나마 생각을 했었다.
결론은 역시나 방앗간 경태 아저씨와 순덕이 어머니의 재혼 문제였다.
허나 어른들이 하시는 일에 건방지게 참여할 일은 아니지만 재혼의 당사자가 방앗간 경태 아저씨라는 사실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평소에 늘 보아왔던 그분의 유약한 성품이나 가볍게 촐싹거리는 행동거지가 그리 썩 마음에 와 닿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종구 아버지 밑에서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비위를 맞춰가며 조금은 비굴할 정도로 머릴 굽혀 사는 모습이 어린 내눈에도 영 못마땅하기만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이 그럴 뿐이지, 어른들이 하는 일이 가타부타 나설 일이 아니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그래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찝찝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더구나 한 가지 영 마음에 거슬렸던 것은, 얼마 전 옥순이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그 말씀 중에 '내년 봄에 우리집이 까치말(연무대)로 이사를 하게 되면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한 입이라도 줄여야 된다.’는 말이었다.

비록 어렵게 살아왔을지라도 순덕이 엄마는 물론 어린 순덕이까지 나름대로는 미운 정 고운 정이 서로 간에 듬뿍 들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사를 한다고 해서 서로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전혀 실감이 나질 않고 이해가 되질 않았다.
더욱이 서로 헤어져 산다는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전혀 없었기에 더욱 가슴에 와 닿질 않았다.
그보다는 제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서로 부둥켜안고 의지하며 영원토록 살고 싶은 것이 그때의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비록 남남으로 인연이 닿아 만났지만 그새 중간에 몇 해를 그리 등 붙여 부등껴안고 살다보니 서로들 모르는 사이에 끈끈한 정이 잔뜩 배어 있었다.
친동생처럼 함께 자란 순덕이와는 서로 간의 사이에서 느껴지는 오누이의 정이 더욱 뜨거워 참으로 헤어지기가 세상 그 무엇보다 싫었다.

밤이 깊어지면 참으로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마을로부터 꽤나 떨어진 산자락인지라 아예 인적이 끊겨 더욱 그랬다.
그래도 한낯으로는 근처 잡목 숲에서 재잘거리는 산새소리라도 들려 외로움을 덜해 주었다. 그렇지만 마을 보다 해가 일찍 지는 산자락 언덕배기 였다.
저녁 노을이 흔적을 지우고 어둠살이 찾아들면 온 주위가 약속이라도 한 듯 금새 고요 속에 잠겨 들었다.

예법 세차게 불어오는 바깥바람이 문풍지를 울려 그 여음이 방안으로 흘러 귓가에 들려왔다.
그리고 철길 위를 오르내리며 달리는 밤열차들의 기적소리가 적막한 산자락에 세차게 울려퍼져, 침울하게 내려앉은 적막을 깨트리고 말았다.

아무런 말없이 계신 순덕이 어머니께서도 옥순이어머니와 어머니께서 나누시는 말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실하게는 몰라도 어렴푸시 짐작을 하시는 눈치였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언젠가 어머니께서 순덕이 어머니에게 경태 아저씨와의 재혼 문제를 그냥 흘러가는 말로라도 대충 한번쯤은 서로 간에 의사를 주고받으신 것같았다.

진작부터 순덕이 어머니를 마음속에 그리워하며 남모르게 연심을 품었던 경태 아저씨였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순덕이 어머니와의 재혼 문제를 매듭짓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 늦은 밤에 일부러 옥순이 어머니를 보내 순덕이 어머니의 의중을 떠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옥순이 어머니도 나름대로는 속마음으로 두 분의 재혼을 성사시켜주려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옥순이 어머니가 자기 일처럼 나서는 이유는 종구 아버지의 의중이 많이 반영된 듯싶었다.
동네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다소 오만스런 종구 아버지를 꺼려해도 경태 아저씨만은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편이라 더욱 서두는 것 같았다.
그와 더불어 사실 따지고 보면 재혼 문제가 대두되는 두 사람이 처해져 있는 모든 환경과 입장이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에 장애를 얻은 경태 아저씨나 선천적인 농아로 태어난 순덕이 어머니의 어렵게 살아가는 처지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도 꼭 재혼을 해야 한다면 순덕이 어머니가 그나마 모든 여건이 조금은 나은 사람과 맺어졌으면 하는 나만의 바램이었다.

뭔가 순덕이 어머니의 의중을 떠보려고 왔던 옥순이 어머니께서 전후 사정이 아직은 여의치 못한 것을 깨달으신 것 같았다.
그래서 개울 건너 자기네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있었다.
그런 옥순이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 말을 건넸다.

“왜? 벌써 갈라구 그르냐? 쪼매 더 놀다가지 않구, 허기사 시방 당장에 이렇다 저렇다 말을 못허닌께 너두 답답허기는 매냥 한가지겠지 뭐. 암튼 그리 알구 조심혀서 건너 가. 내가 곧 수일 내로 기별을 할 틴께 알았지?”

“응 그려, 내가 얼른 가서 두 양반헌티 그대로 전할께. 그런닌께 이따가라도 니가 순덕이 에미한테 쫀쫀하게 물어 봐. 되면 되는 거구, 안 되면 마는 것인께 그리 알어. 나사 싸게 가볼란께.”

옥순이 어머니께서 생각보다 기대치에 못미처 아쉬웠던지 못내 어정쩡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밖으로 나서려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밤길에 혼자서 집으로 되돌아가는 옥순이 어머니가 다소 걱정이 되는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밖으로 나서려고 방문을 열자 바깥바람이 불어와 등잔불이 이내 꺼질 듯 마구 너풀거렸다.
그리고 비좁은 방에 잔뜩 서렸던 석유 끄름 냄새가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결에 더욱 짙게 코 밑으로 스며들었다.
마당으로 내려서려고 마루에 서 있으려니 차가운 냉기가 옷 속 깊이 스며들었다.
그런 탓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고 숨을 내쉴 때마다 입 밖으로 뜨거운 김이 거침없이 새어 나왔다.

“근데 옥순 에미야. 혼자서 가기에 괜찮긋냐? 다행히 달이라도 밝아 극정이 좀 덜된다만은 그래두 니 혼자 보낼랑께 맴이 좀 그렇다. 암튼 조심해서 가.”

어머니께서 밤길에 홀로 가시는 옥순이 어머니가 걱정이 되시는지 토방에 널브러진 고무신을 더듬더듬 찾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서며 말씀하셨다.
그러자 바깥 밤바람이 차가운지 가볍게 기침을 두어 차례 하신 옥순이 어머니께서 마당으로 내려서며 어머니의 말씀에 답하셨다.

“야, 걱정도 태산이다. 내가 어디 한두 살 묵은 얼라냐? 아무 일 읍을 거닌께 극정일랑 붙들어 매 놓구 내가 아까 참에 한 말 잊어버리지 말구 꼭 물어봐라. 제아무리 이러니저러니 천 마디 만 마디 이야기 혀봐야 당사자 순덕이 에미 맴이 젤루 중요허닌께 그리 알구 말을 잘 혀봐. 그리구 날한질라 오살맞게 추운디 재수없게 고뿔이라두 걸릴라 밖에들 있지 말구 어여들 싸게 방으로 들어 가.”

그렇게 말을 남기고는 사립문을 나서 집 모퉁이를 돌아 개울 건너에 있는 집을 향해 밭둑길로 들어섰다.

휘영청 밝은 달이 잠시 구름에 가려 잠시 동안이라도 조금은 어둑해지는 듯싶더니 이내 달이 구름 밖으로 나와 온 사방이 시원하게 보이도록 밝기만 했다.

역시나 변함이 없는 것은 좀처럼 물러설 줄 모르는 겨울 강추위와, 산마루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 뿐이었다.
싸리로 엮은 빛바랜 울타리 너머로 오순도순 모여 있는 마을 초가집들의 모습이, 달빛 아래 선연한 모습을 드러내 참으로 아담스럽게 보였다.
더불어 마을 전체에 이토록 평온함이 깃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어 마음이 부듯해 졌다.

그리고 그다지 많지 않은 삼십여 가구 초가집들 중에 유독 눈 안에 들어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감나무가 우뚝 서있는 옥순이네 집을 바라보며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시간쯤이면 아직은 잠자리에 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자기 고모와 따뜻한 아랫목에 깔아 놓은 이불 밑에 두 발을 넣고 도란도란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면 등잔불 밑에서 곱다란 오색 실로 수를 놓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넌지시 해 보았다.
어찌 보면 청순하기 더할 나위 없어 조금은 가련하게도 보이는 옥순이의 얼굴은 선한 달빛과도 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초롱초롱한 두 눈망울이, 밤하늘에 반짝반짝 거리는 별을 그리도 꼭 빼닮은 것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또한 드높게 말간 밤하늘을 우러러 보며 더 이상은 아픈 시련들이, 옥순이를 괴롭히지 말고 비켜가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빌고 또 빌어 보았다.
그 것은 옥순이에 대한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최소한의 배려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울타리 너머로 밭길을 따라 걸어가는 옥순이 어머니가, 걱정스러워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어머니께서,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야, 너는 날씨 헌질라 극성맞게 추운디 얼른 방으로 안 들어가구 청승맞게 밖에서 뭣허구 있냐? 어여 싸게 들어가라. 그러다 고뿔이라도 걸리면 으쩔려구 그런다냐?”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 ‘청승맞게 밖에서 뭐 하냐?’는 말에, 옥순이를 생각했던 내 속심을 들킨 듯해, 얼른 어물쩡하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엄니는 뭐땀시 그리 닥달을 하는가 모르긋네 그려. 밖에 나온 짐에 두엄자리에 소피두 좀 보구 들어갈라구 그러는디 왜 재촉을 그리 닭 쫒드시 혔쌌는디야.”

그리 어물쩍하게 말을 하자, 어머니께서도 그런 내 모습이 싫지 않으신지 피식 웃으시는, 자혜로운 얼굴 모습이 환한 달빛에 오롯하게 비췄다.
그리고 달빛에 비친 내 어머니의 그림자와 내 그림자가 마당 위에 기다랗게 한데 겹쳐졌다.

토방 위에는 아닌 밤중에 부산을 떠는 가족들 때문에 잠을 설친 검둥이가 두 앞다리를 앞으로 길게 뻗고 입이 찢어지라 하품을 하면서 목을 돌려 몸을 털고 있었다.

그렇게 고요한 밤하늘에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별자리들이 바로 지붕 머리 위에 차갑게 머물고 있었다.
더불어 인간사 온갖 곤욕을 아울러 달래주려는 듯 보름달은 고고한 모습을 가득 자아내며 늘 그렇게 머물고 있었다.

그런 선한 달빛 아래 온 만물이 한 겨울밤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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