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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31 조회 : 1,522




동네 어른들이 우리들에게 자주 쓰는 말씀 중에 제발 너는 나처럼 ‘까막눈’이 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까막눈에 속해 있던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핀잔 섞인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말도 많이 썼었다.

그 까막눈이 이 땅에 그토록 많이 증가하게 된 이유는 일제강점기 때문이었다.
애당초부터 일본은 우리 국민들을 우민화하려고 작심을 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식민지 통치를 함에 있어 다루기가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일본인들이 세운 공립보통학교는 그 시설의 규모가 작아 도저히 그 많은 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학부모들이 부담해야 할 교육비도 만만치 않아 서민들 중에 빈민층에 드는 사람들이나 도시의 노동자 또는 농민들이 그 학비를 부담하기에는 실로 힘든 일이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제 때에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어 점차적으로 문맹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그라도 일부 부모들은 ‘꿩 대신 닭’이라고 그에 대한 대처방법으로 비교적 쉽게 선택한 것이 마을 서당에서 구학문인 한문을 배우게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구학문 자체가 발전을 거듭하는 시대상에 너무 뒤떨어져 그 효율가치가 지극히 미미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을 서당에도 못 보낼 정도에 생활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태반이여서 우리 주위에서 그런 문맹자를 쉽게 대할 수 있었던 참으로 미개하다 못해 답답하기만 했던 그때 그 시절이었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한이 절절히 서렸던 우리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만큼은 배우지 못한 그런 아픔을 되물림하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자식들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바로 자식들에게는 그 까막눈을 면하게 해주려는 부모들의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자식들에 대한 사랑의 배려였다.

그에 멈추지 않고 상급학교인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시켜야 할 때에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남의 집에 혀 짧은 소리를 하여 겨우 사정사정을 해서 돈을 빌리거나 쌀 빚을 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빌린 돈이나 쌀을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1년 동안 농사를 지어 갚을 요량으로 새벽이슬이 마르기 전부터 저녁녘 어둠살이 짙어질 무렵까지 죽을힘을 다해 논과 밭에서 힘들게 농사일을 하셨다.

그렇게 너나 할 것 없이 교육열이 강하다 보니 국민학교에 입학하려는 학생 수가 퍽이나 많아 아침 조회 시간에 전교생이 모두 모이게 되면 그리 넓게만 보였던 운동장이 학생들로 꽉 들어찰 정도였다.
내가 다니던 채화 국민학교만 해도 전교 학생 수가 육백 여명을 넘어설 정도로 많았었다. 그런데 그 많은 학생 수에 비해 교실은 턱 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의 재정이 여의 못했고 학교를 신축 또는 증축하는 일 보다는 우선 급한 것이 그리도 많았다. 전쟁의 화마로 파괴되어 버린 국가 중요 기관의 시설 복구와 전투기들의 폭격으로 처참하게 파괴된 철로의 교량과 전국 각 지방마다 파괴되어 흉물스럽게 방치된 정부기관의 건물을 복구하는 일이 우선 시급한 일이었기에 곧 바로 교실을 신축할 재원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국가적 현실을 넘기려는 정부의 시책에 조금이라도 도우려고 우리들에게도 이른바 ‘사친회비’를 걷어 턱없이 부족한 학교재정에 조금이라도 보태 보려고 했었다.
전쟁이 겨우 끝나 경작지를 되돌려 받아 나름대로 농사를 지어 입에 풀칠은 하고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극히 혼란스러웠고, 경제는 거의 밑바닥 수준을 면하지 못해 물가는 그리도 비싸기만 했었다. 그런 여파로 우리들 모두가 사는 형편이 어렵다 보니 그 사친회비마저도 제때에 납부를 못하고 밀리는 친구들이 같은 반에도 허다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선생님들은 미납된 학생들에게 납부를 독려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반 친구들 앞에서 지적을 받게 되어 무척이나 부끄럽고 심적인 부담을 엄청스레 크게 느낀 우리들은 부모님들의 절박한 사정도 모르고 부모님을 마구 졸라댈 수밖에 없었다. 아침 등교 시에 발을 동동 구르며 사친회비를 달라고 졸라대는 우리들에게 그것마저도 못해 주시는 부모님들은 마음이 아파 전혀 뜻에도 없는 심한 말을 하며 어찌되었던 간에 학교로 내몰기에 바뻤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한두 번 정도 더 버티면서 싸리문 앞에서 떼를 쓰다가 어렴푸시등교 시간이 가까워오는 것을 알게 되면 그제서야 포기를 하고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하는 수 없이 개울 둑 위를 힘이 쑥 빠진 몸으로 걸어 학교로 향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 모두는 담임선생님을 부모처럼 믿고 공경하며 따랐었다. 더불어 부모님들도 선생님들을 진심으로 신뢰하였다. 따라서 어쩌다 가정방문이라도 있다는 예비 통보라도 받게 되면 아무리 없이 사는 살림이라도 농사 지은 것 중에 무엇 하나라도 극진하게 대접해 드리려고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셨다.
참으로 그 시절에는 비록 사는 형편들이 너나할 것 없이 열약했지만 순수함을 바탕으로 한 마음과 정신은 서로가 서로를 진실로 대하고 의지하려 했다. 그로 인해 하나의 굳건한 교육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열과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미덕이 살아 있었다.

나른함이 슬슬 찾아드는 오후 들어 처음으로 시작하는 음악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교실 안에 도시락 반찬냄새가 싫지 않게 배어났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우리들이 부르는 힘찬 노랫소리는 맑고 파란 하늘이 네모난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운동장으로 힘차게 울려 퍼졌다. 반에서 비교적 키가 작은 나는 교실 맨 앞줄 한가운데에 자리를 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이 치시는 풍금소리에 맞추어 같은 반 친구들과 어울려 힘차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윤석란이하고 강상민이는 앞으로 나와서 내 풍금소리에 맞춰서 노래를 불러봐라.”

굵은 검정 뿔테의 도수가 높은 안경을 코끝에 비스듬히 내려 걸치신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교실 안은 한바탕 웃음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야, 조용히들 못해! 떠드는 놈은 운동장 열 바퀴 돌려버릴 꺼야.”

다소 격앙된 소리로 선생님이 꾸지람을 하시자 언제 그리 시끄러웠냐는 듯이 교실 안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그리고 앞으로 나오라는 선생님 말씀에 갑자기 수줍어 얼굴이 달아올라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시는 선생님 말씀에 겨우 끌리다시피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나보다 더 부끄러워하는 석란이와 함께 교단 위에 올라섰다.

학교 선생님들 중에서 담임선생님이 풍금을 제일 잘 치셔 음악 시간에는 무척이나 신경을 쓰셨다. 선생님은 어느 노래든 우리들에게 주입시키는 방법의 일환으로 남과 여의 합창을 곧잘 시키셨다.
그런데 그 합창의 주인공은 늘 우리 반 1분단장인 나와 부반장인 석란이가 도맡았다.

하루 종일 은단을 입에 물고 사시는 선생님은 음악시간에도 어김없이 향이 진한 은단 알을 입에 무신 채 풍금을 치셨다. 그리 익숙하게 건반을 치시는 선생님의 손놀림이 더없이 경이롭게 보였다.
석란이와 나는 선생님이 치시는 풍금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난 후에는 친구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고 선생님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우리 학교에 6학년은 두 개의 반으로 나눠 있었고 각 반의 학생 수는 대략 오십 명 선을 넘어서 거의 육십 명 선에 닿으려 했고 학업성적은 늘 일반이 앞을 달렸다. 같은 마을에 살면서도 나와 옥순이는 같은 1반이었고, 그리 온 동네를 자기 집 마당 마냥 거들먹거리고 다녀도 어딘지 모르게 무색해 보이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피를 물려받아 타고난 머리가 좀 둔했는지 성적이 좀 부진한 종구와 하교를 졸업하기만 하면 읍내로 기술을 배우러 간다고 평소 학업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성적이 뒤떨어지는 주현이는 옆 반인 2반에 속해 있었다.

동네는 물론 면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부자인 종구 아버지는 그런 점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그 무엇 하나도 부족할 것이 없는데도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는 자기 자식 때문에 늘 동네 사람들 앞에서 거침없이 드러냈던 우월감이 수그러지게 직간접으로 영향이 미치는 듯하자 슬슬 끓어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늘 마음속으로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그런 탓인지 우리들이 동네에서 작은 말썽이라도 일으키게 되어 자기 눈에 띄게 되면 유독 간섭을 심하게 하셨다. 좁아터진 고샅길이 떠내려가라고 큰소리를 치시며 온 동네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 도에 지나칠 정도로 우리들에게 면박을 주는 종구 아버지를 종구보다 더 미워했다.
그리 유달리 극성을 떠시는 종구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기대치가 자기 욕심에 훨씬 미치지 못함에서 오는 열등의식(劣等意識)때문인 것 같았다.

학교에서 학예회(學藝會)나 가을 운동회를 할 때는 재정이 참으로 궁핍한 시골 학교인지라 비교적 생활이 윤택한 학부형들로부터 찬조금(贊助金)을 받았다. 그럴 때 종구 아버지는 아예 머리를 돌리셔 마치 ‘소가 닭을 쳐다보듯’ 하셨다. 그리 재산이 넘쳐나도록 많았지만 그런 공익을 위한 일에는 인색하게 굴었다.
그런 탓에 어쩌다 교무실 청소를 하면서 선생님들께서 나누시는 말씀을 귀를 기우려 들어보면 종구 아버지에 대한 제반적인 평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동네에서 오래 사신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종구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읍내 경찰서에 높은 계급의 일본인 순사의 논밭 일을 하며 머슴처럼 살았다고 했다. 그러던 중 일본이 패망하여 방대한 논과 밭들을 일본인이 그대로 두고 허겁지겁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종구 아버지가 그 땅을 무슨 재주로 불하 받아 어느 날 갑자기 격에 맞지도 않는 큰 부자가 되어 부유하게 산다고 하셨다.

넓고 기름진 들녘에 수리안전답인 백이십 마지기(땅 평수로, 이만 사천 평)의 논을 소유하고 있어 작은 면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호(富戶)였다.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산 밑 초라한 움막집과는 극적인 비교가 되었다.

잔뜩 삐뚤어진 심성을 가득 지닌 종구 아버지에게 어쩌다 장리 빚을 지고 사는 우리 집은 겉으로는 가진 자에 대한 무언의 순종 아닌 순종을 하면서 살았다. 종구 아버지는 해가 서산에 질 무렵이면 내 어머니께서 읍내에서 장사를 마치시고 돌아오시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적마다 심심치 않게 찾아오는 종구 아버지는 입가에 물부리를 지그시 물고 거드름을 피우며 철길을 건너 아카시아 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는 언덕배기에 올라섰다. 그리고 이내 언덕을 내려서 좁다란 밭둑길을 키 작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느릿느릿 걸음 하여 우리 집 마당 안으로 들어서며 마치 자기가 왔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일부러 큰 기침을 하였다. 그런 종구 아버지 앞에서 빚진 죄인인지라 아예 숨소리도 크게 내쉬지 못하고 눈치만을 슬슬 살피면서 늘 기가 죽어지냈다.

그러나 단 하나 종구 아버지의 그런 저런 눈치를 보지도 않고 사정없이 달려드는 것은 오로지 우리 집 검둥이뿐이었다. 그럴라치면 종구네 아버지는 온 미간을 잔뜩 찌푸리시며 우리 어머니와 나를 향해 내뱉는 소리가 있었다.

“아, 머시냐. 저 처죽일 넘에 개새끼는 은자든지 나만 보면 미친병에 글린 긋매냥 소락대기는 질러대구 지랄발광을 허는지 모르긋네 그려. 아, 글구 입에 풀칠허기두 바쁠틴디 무신 넘에 팔자가 좋타구 아무 쓰잘떼기두 읍는 개새끼를 키우는지 도통 모르긋네.”

그로부터 세월이 지나 내 나이 13살이 되던 해 고향을 떠나 논산 훈련소가 있는 구자곡면으로 이사를 할 때까지 가난과 더불어 그분의 눈치를 살피며 검둥이에 대한 그런 모지락스런 말을 누누이 들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강제점령기 때 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을 한다는 명목으로 세운 목조건물인 채화국민학교는 읍내에 있는 다른 학교에 비하여 규모가 그리 작지는 않았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건물 일부분이 불에 타 소실되어 교실이 턱없이 부족했다. 내가 처음 입학했을 때에는 소나무가 운집해 있는 학교 정원의 커다란 소나무에 칠판을 걸어놓고 땅바닥에 앉아 공부를 했다.
그러던 중 삼학년이 되던 그해 봄에 교실을 증축을 하여 그제야 교실 열네 개를 갖춰 학교다운 면모를 되찾게 되었다.

대다수 동네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를 싫어했다. 그러나 나는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 이유는 어머니가 읍내에 장사를 나가셔 텅 빈 집에 외롭게 홀로 남아 있는 외로움보다는 학교에 가는 것이 무척이나 좋았다.
하루의 생활 중에서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보내는 시간이 그리 좋았다. 또한 저녁 늦게 돌아오시는 어머니와 함께 앉아 저녁을 먹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제일 즐겁고 보람차게 느껴지는 시간들이었다.

어쩌다 장사가 여유롭게 된 날에는 어머니가 간 고등어를 사 오셨다. 석쇠에 간 고등어를 구워 보리밥을 찬물에 말아 먹는 그 맛은 가히 일미(逸味)였다. 그래도 종구네는 쌀밥을 먹고 살았으며 반찬은 늘 고등어에 꽁치를 먹었다. 또한 겨울철에는 생명태(生明太)를 사서 먹었다.
그리 부유한 탓에 종구의 도시락에 반찬은 늘 돼지고기 장조림과 멸치볶음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종구에게 기가 죽어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그것은 우리 집보다 잘사는 부자라는 점과 어머니가 지은 쌀 빚의 원금을 갚지 못하고 그 이자까지 밀려 그 집 눈치를 살피며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종구 아버지가 며칠에 한 번씩 찾아와 사립짝 밖에서부터 큰기침을 하면서 빚 독촉을 했기 때문이었다.

빚 독촉을 하러 온 종구 아버지가 기대했던 이자 돈도 못 받아 험한 말 들을 남기고 가면 늘 어머니는 부엌 아궁이 앞에 앉으셔 나를 부둥켜안고 소리를 내시며 우셨다. 그때마다 어린 나는 어머니 볼에 연약한 내 볼을 문대면서 꼭 이렇게 말했다.

“엄니 지발 쪼매만 참구 기둘려 봐! 내가 꼭 휼륭하게 돼서 종구네 집을 엄청시리 망허게 해번질 틴께 응.”

그 당시 극도로 미약하고 빈약했던 내가 그렇게라도 내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달래보려고 하였다. 그래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볼멘소리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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