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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72 조회 : 1,680




겹겹으로 가득 낀 먹장구름 탓인지 어둠침침하게 보이는 동쪽 하늘에 번개가 번쩍거렸다. 그리고 삼식간에 전광(電光)이 주위를 밝게 비추는 듯싶더니 이내 ‘우르릉 따다당’ 하늘을 찢을 듯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옥순이가 소스라치게 놀라 자기 어머니 품으로 후다닥 파고들었다. 함께 걷던 나도 깜짝 놀라 삼식간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리고 한줄기 세찬 바람이 골목길로 몰려와 온통 휩쓸고 대문 앞 감나무 가지를 부러트릴 듯이 마구 흔들어대더니 이내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이구, 먼 놈에 천둥소리가 이리두 요란하다냐. 그런디다 바람까장 이리 심난허게 불구. 어여 얼른 들어가자, 소낙비가 한바탕 되게 퍼붓을 모양 같다.”

옥순이 어머니가 서둘러 대문 안 쪽으로 들어서며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마루에 앉아서 홍두깨로 밀가루반죽을 둥그렇게 밀고 계시던 어머니가 말씀을 이으셨다.

“왜 아니랴? 날헌질라 그리 염병맞게 가물더니. 한방 제대루 퍼붓을 모양이구먼 그려, 얼른들 올라와, 그래두 비 안 맞고 오기 천만다행이네 그려.”
“상민 에미야, 반죽은 다 됐냐? 애들 배고플라 얼른 서둘자!”

옥순이 어머니께서 말을 끝내시자마자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어머니는 밀가루를 바닥에 틈틈이 뿌리시며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을 밀고 계셨다.
마루에 책보자기를 내려놓고 앉아 있으려니 안방으로부터 향긋한 동백기름냄새가 콧속으로 싸하게 스며들었다. 봉창 위에는 군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으신 옥순이 아버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 분 다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돌아가셨나 하는 생각을 하니 다시금 가슴이 아려왔다. 그리고 나도 몰래 눈가에 눈물이 가랑가랑하게 고여 얼른 소매 끝으로 훔치고 말았다.
옥순이 어머니께서는 깔끔한 성격처럼 언제나 쪽머리 곱게 빗어 올리셔 퍽이나 정갈하게 보였다. 방안 벽엔 새하얀 옥광목 횃댓보 위에 곱게 수놓은 두 마리 학의 모습이 집안 분위기를 차분하게 했다.

“오늘 공부는 잘들 했냐? 배들 고푸지? 조그만 참아라, 얼른 해줄 틴께.”

어머니가 밀가루 반죽을 끝내신 듯 널따랗게 펴진 반죽 위에 밀가루를 뿌려 곱게 접어 부엌으로 들고 가셨다.
원래 옥순이 어머니의 고향은 우리 면에서 가장 변두리 지역에 위치한 토끼재 마을이었다. 옥순이 어머니께서 두 살 위턱인 옥순이 아버지에게 우리 동네로 시집을 오신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해방이 되기 한 해 전이었다.
그러니까 좀 더 상세히 말을 하자면 그분 나이 스무 살 되던 그해 늦가을이었다. 그렇게 두 분이 결혼하신 그 이듬해 여름더위 속에 옥순이가 태어나고 세 식구는 부러울 것 없이 다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25일 새벽에 동족상잔의 참화를 불러일으킨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옥순이 아버지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를 하신 후 낙동강전투에서 격렬하게 전투를 하시던 중 그만 애석하게 전사를 하셨다. 그때가 옥순이 나이 겨우 여섯 살 되던 여름날이었다.

“야, 옥순아! 어여 밥상을 펴라. 모두 시장들 할 텐데.”

부엌에서 찬그릇이 담긴 쟁반을 들고 나오시던 옥순이 어머니가 말씀하시자 옥순이는 밥상을 가져오려고 아랫방으로 들어갔다.

“맛이 어떨랑가 모르겄네. 간은 잘 맞춘 거 같은디.”

어머니가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작은 양은솥 양쪽 가장자리를 행주로 감싸 들고 마루로 오시면서 말씀하셨다.

“아이구, 상민에미 니가 했는디 오죽 맛있을라구, 그 솜씨 어디 가긋냐?”
“뭘, 그러냐! 니가 다했지, 내가 한 게 뭐 있다구.”
“암튼 상민아, 많이 먹어라! 니 엄니가 한 거니까 맛있을 게다.”
“야, 옥순 에미야! 이 참에 우리 둘이 읍내 나가서 칼국시 장사나 혀 볼래? 쌍과부집이라구 허면서.”
“뭐? 너 미쳤냐? 너나 많이 혀라. 나는 숫기가 없어서 때려죽여두 그런 건 못혀.”

‘쌍과부 칼국시집’ 이라는 말에 두 분은 물론 나와 옥순이도 웃음이 터져 나와 한바탕 크게 웃고 말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근심이 없는 듯 그리 호탕하게 웃어도 저마다의 속내에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응어리진 한이 그리도 많았다. 두 분 모두 전쟁으로 일찍이 지아비를 잃었다.
그리고 어린 자식을 데리고 숱한 세월 속에 거친 세파에 부딪혀 살아오느라 가슴에 피멍이 들어 온통 까맣게 숯덩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이라도 그리 격 없이 웃을 수 있었던 것은 두 분 모두의 진솔한 우정 때문인 것 같았다.

한동안 꾸준히 으르렁거리던 천둥소리는 조금은 잦아든 듯싶었다. 주위가 어두워져 하늘은 온통 검은 구름으로 가득 들어찼고 또다시 세찬바람이 불어왔다.
감나무와 울타리 가장자리 옥수수, 단수숫대를 마구 흔들어대고 대문짝에 달린 녹슨 깡통이 마구 흔들려 요란하게 소릴 내었다.

“그나저나 니들은 어떻게 집에 간다냐? 가다가 비라두 만나면 우쩔려구.”
“뭐, 아직은 비가 안 오니께 서둘러 가면 되지 뭐.”
“아니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던가, 방장 안에 넷이서는 충분하게 잘 수 있은께.”
“안 돼, 검둥이란 놈 밥도 줘야 하구, 어여 싸게 가 봐야 혀.”
“정 그러면 편한 대루 혀.”
“참, 그리고 아까 학교에서 보닌께, 선생님이 시험 본 거 발표하는 모양이던디, 옥순이 너 이번에 몇 등 했냐?”
“음, 그냥 할 만큼 …….”
“성적이 별룬가 보네, 말을 더듬게. 암튼 니 신상 생각해서 혀. 뭐시냐 중학교 떨어지면 군산 고무신 공장에 취직이나 해야지 뭐.”
“엄니 내가 왜? 고무신 공장에 가야 하는디 아주 악담을 혀 악담을.”

자기 어머니의 말에 화가 난 듯 옥순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얼른 들어가 버렸다. 그리 뾰로통한 모습으로 화를 잔뜩 내는 옥순이가 조금은 우습게 보였다. 옥순이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대문 앞을 나서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골목길을 빠져나와 동구 밖을 바라보니 어둠속에 묵직하게 서있는 둥구나무가 여느 날보다 더욱 커다랗게 보였다.
산 밑 아래 면소재지에는 불그레한 전등불빛이 어두운 밤하늘 아래 띄엄띄엄 산짐승 눈알처럼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불빛 한 점 없어 어둡고 좁다란 논길을 걷는데 몸에 균형이 잘 잡히질 않았다. 더듬더듬 조심스럽게 발걸음 하여 철로 길에 닿으니 철로 침목에서 배어나오는 콜타르의 특유한 냄새가 바람결에 몸에 가득 배었다. 조금 멀리서 어머니와 내 모습을 보았는지 검둥이가 원두막을 지나 쏜살같이 뛰어오고 있었다.

“아 참 상민아 너 밭에 있던 참외 몇 개가 안 보이던디 어떡했냐? 그거 니가 다 먹지는 안 했을 거구.”
“응, 그거 지난번에 내 친구 놀러 와서 내가 먹으라구 줬어.”
“니 친구 누군디?”
“응 그냥 같은 반 친구 있어, 담에 자세하게 말해 줄게.”
“참 그나저나 옥순이는 공부 좀 허냐? 어쩌냐? 지 에미가 걱정을 많이 허든디.”
“음, 이번에 16등 했는디. 그래두 지난번보다는 잘했어.”
“그래 그 점수 가지구 중학교에 들어가기나 할랑가 모르것다.”
“지난번 선생님이 그러는디, 20등까장은 그냥 겨우 턱걸이로 들어간다고 했어.”
“아무튼 간에 잘 돼야 헐 틴디, 나나 지 에미나 자식새끼 하나 보고 사는디, 에휴.”

온종일 혼자서 외로웠던지 검둥이가 위로 뛰어오르며 제 얼굴을 비벼 그리 반가워했다. 음산한 날씨에 한바탕 소낙비라도 시원스레 퍼부을 것 같았다. 언덕배기에 홀로 서있는 왕 소나무에선 솔바람 소리가 꽤나 커다랗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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