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저녁부터 서편 하늘에서 앞산 비선봉 쪽으로 칙칙한 구름이 발빠르게 밀려오기 시작했다. 혹시 날씨가 변덕을 부려 그토록 기다렸던 운동회 날에 비가 올까 싶어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 밤사이 오줌을 누러 밖에 나오면서도 조마조마한 마음에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몇 차례씩이나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보았다.
날이 밝아오자 희부연 아침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해 날씨가 쾌청할 것만 같아 마음이 푹 놓였다. 물고기 비늘 같은 구름이 산마루 뒤로 밀려나 하늘은 내 기분에 쏙 들게 마냥 푸르렀다.
방죽가 미루나무 위에는 솔개 한마리가 뉘 집 가을 병아리라도 채어 가려나 날개를 활짝 펴 커다랗게 원을 그려 빙빙 돌면서 틈새를 노리고 있었다. 마을 앞 개울 둑길은 아침부터 운동회 구경을 가려는 동네 어른들과 운동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아이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어머니와 옥순이 어머니는 음식을 챙겨서 뒤에 오신다고 하셨다. 하얀 운동모자를 쓰고 발걸음 가뿐하게 집을 나섰다. 오늘이 즐거운 운동회 날인 줄 저도 아는 양 생뚱맞게 검둥이가 나보다 먼저 앞장을 서려 했다.
도랑을 건너 언덕 위에 오르자 넓디넓은 들녘엔 벼를 벤 자리가 마치 듬성듬성 소가 풀을 뜯은 것처럼 비워져 있었다. 두 팔 벌린 허수아비도 우리들처럼 마음이 함께 들떠 있는 듯 팔 끝에 매달린 녹슨 깡통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경쾌한 행진곡에 발을 맞추듯이 교문 앞에 이르렀다. 교문 앞에는 안내라는 리본을 가슴에 단 여선생님 두 분이 책상과 걸상을 두개 놓고 앉아 있었다. 운동회에 오시는 어른들에게 운동회 프로그램 종이를 나눠주고 계셨다.
교문 양쪽에는 나무기둥을 높다랗게 세워 가을 운동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멋스럽게 걸려 있었다. 교문을 막 들어서자 국기 게양대에는 태극기가 보기 좋을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왼편 공터에는 국밥집에서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에 가마솥 안에서 익어가는 구수한 고기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났다.
놋황색 물결을 이룬 들녘에서 달려온 바람도 운동회 구경을 하려는지 널따란 플라타너스 잎사귀 위에 느긋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중앙 본부석 앞에는 나지막하게 천막 세 개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 교기와 부락대항 달리기에서 우승한 팀에게 줄 우승기가 보였다. 그리고 청군과 백군의 응원석이 있는 출발점에는 측백나무 잎으로 한결 멋을 부린 승전 문이 보였다.
마냥 마음이 들뜬 아이들은 장사꾼이 가져온 생소한 물건들에 관심을 보이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장사꾼 앞에 바짝 다가앉아 턱을 두 손으로 고이고 앞에 진열해 놓은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그런 함석 통 안에서 나무젓가락에 솜덩이처럼 뭉쳐 나오는 구름과자를 파는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알맞게 자른 갈대 끝머리에 빨강, 파랑, 노랑의 삼색으로 물들인 닭털과 빨간 풍선을 매어단 피리를 불며 파는 아주머니도 보였다. 커다란 코주부 코에 알이 없는 둥그런 검정 테 안경 쓰고 양쪽 허리에 쌍권총을 차고 장사를 하시는 우스꽝스런 아저씨가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교실 앞 가운데 위치에 있는 본부석에는 검정 붓글씨로 등수를 커다랗게 표시해 놓은 상품들이 가득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둥그런 돌리기 판을 돌려 찍기를 하여 당첨이 되면 상품을 주는 뺑뺑이 아저씨도 보였다. 그중 일등에게는 ‘박기당’의 ‘만리종’ 만화책 한권을 상품으로 준다고 했다. 그러나 일등에 당첨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 옆자리에는 달고나 장사꾼 아주머니가 조그만 화덕에 숯불을 피워 동그란 국자 안에 황설탕을 녹이고 있었다. 잘 녹은 설탕물을 철판에 부어 호랑이, 코끼리, 비행기, 토끼, 나비 등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우리들은 뽑기를 했다.
교실 앞 화단 옆에는 짐자전거 뒤에 하늘색 칠을 한 네모난 통을 얹고 아이스깨끼를 파는 장사꾼도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가위질에 흥겹게 춤을 추며 구성진 입담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가락 엿장수도 눈에 띄었다. 단 한 번을 가본 적이 없어 알리 만무한 그 먼곳 동해바다 울릉도에서 가져왔다는 잘 말린 오징어를 파시는 할아버지도 계셨다. 또한 덜 익어 소금물에 우려낸 감과 하얀 실로 주렁주렁 꿰어 매달은 찐 밤을 파는 아주머니도 보였다. 그렇게 아이들이 제가끔 흩어져 구경을 하는 동안 운동장은 각 마을에서 구경을 하러 오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득시글거렸다.
새끼줄이 쳐진 경계선 밖에 가족들이 서로 자리를 서둘러 잡으시고 어머니들은 햇볕을 가리려 양산을 펼쳐 들고 계셨다. 어른들은 국밥집에서 모처럼 만에 얼굴을 마주하여 기뻐서 그러시는지 고깃국에 막걸리 잔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시며 정담을 나누고 계셔 무척이나 시끌벅적했다. 얼마 후 확성기에서 음악소리가 잠시 멈추고 전교생 집합하라는 선생님의 안내 방송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구경꺼리에 온정신이 팔려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운동장 안으로 몰려가 각자 제 위치에 모이기 시작했다. 국기를 향하여 경례를 하는데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던 것이 있었다. 곱게 다린 하얀 두루마기에 중절모자를 쓰신 하얗고 긴 수염의 할아버지 한 분이 중절모를 벗어 왼쪽 가슴에 정중하게 대시고 경례를 하시는 모습이었다.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있고 내빈을 대표하여 면장님의 축사가 끝나자 전교생이 체육담당 선생님의 구령과 음악에 맞춰 보건체조를 했다. 체조가 끝난 후 각반 선생님의 인솔에 따라 청군 백군으로 갈려 울타리 가에 코스모스가 만발한 대기 장소로 행진곡에 발을 맞춰 걸어갔다.
1학년부터 시작되는 원외 경기 달리기와 원내 경기 준비를 담당한 선생님들에게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1학년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6학년까지 대기 장소 승전 문에 도착했다. 청군과 백군으로 갈라 앉아 응원단장의 지시에 따라 소리를 치고 손뼉을 치며 응원을 시작했다. 청군과 백군의 기수는 앞에서 깃발을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이겨라. 이겨라, 우리 청군 이겨라. 빅토리. 빅토리. 브이, 아이, 씨, 티, 오, 알, 와이’ 라고 응원단장이 선창을 하고 우리들 모두는 힘을 모아 뒤따라 불렀다. 그런데 영어 발음이 어눌한 저학년 어린 학생들은 발음이 틀리자 미안스럽고 부끄러운 듯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순서에 따라 원외 트랙에서는 1학년부터 100미터 달리기가 담당선생님이 하늘을 향해 쏘시는 총소리로 시작되었다. 달리기가 시작되자 학부형들이 자리에서 일어서 자기 아들딸들의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손뼉을 치고 좋아도 하셨다. 아이들이 달리다 뒤로 떨어져 달리거나 그만 땅 위에 넘어지면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원내에서는 일학년들이 귀여운 동작으로 공굴리기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 한 분이 뚜껑을 열면 접혔던 주름이 앞으로 길게 나오는 묵직한 카메라로 귀여운 재롱둥이들의 모습을 열심히 찍고 계셨다.
이어지는 경기는 기둥에 매어달린 커다란 종이 공을 오자미로 던져서 터트리는 경기였다. 그리고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줄다리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오전 경기는 1학년에서 3학년까지 달리기와 원내에서 진행되는 경기로 끝마쳤다. 달리기에 우승한 아이들은 손목 안쪽에 빨간 고무도장이 찍혀 있어 서로 보여주며 자랑했다. 성급한 아이들은 선생님 눈을 피해서 자기 부모에게 달려가 손목에 찍힌 도장을 보여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 응원석에 앉아 응원을 하면서 오줌이 마렵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 변소에 가는 척하며 자기 부모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는 부모들이 어느 위치에 앉아 있는지 파악을 하고 빠른 동작으로 달려가서 먹을 것을 한주먹 들고 와 사이좋게 나눠먹기도 했다.
따사한 가을 해가 운동장 한복판에 머물 무렵 본부석에서 안내 방송으로 점심시간을 알렸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자기 부모를 찾아 나서고 동작이 둔한 아이들은 부모를 찾느라 운동장 구석구석을 한참동안 찾아 헤매기도 했다.
1학년 아이들은 교실을 학부형들에게 개방하여 교실 안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나머지 학년은 나무 밑 그늘이나 학교 복도에서 식구들끼리 모여 앉았다. 그리고 서로 가까운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다정하게 음식을 나누었다.
옛말에 ‘들녘에 내려온 꿩이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고 우리들은 이미 장사꾼들의 물건들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다. 여러 가지 구경을 하고 싶고 물건을 갖고 싶은 저마다의 작은 욕심에 점심을 서둘러 먹었다. 그리고 부모들을 졸라 얼마의 용돈을 받아 제가끔 신이 나는 듯 마음에 드는 장사꾼을 향해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