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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91 조회 : 1,734




해맑은 아침이슬이 대지 위에 흡족하게 내렸다. 그와 더불어 농익어가는 가을 햇살이 코스모스 머리 위에 함초롬히 내리쪼이고 있었다. 추색이 마냥 짙어가는 가을 들녘엔 추수를 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꽤나 분주해 보였다.
들녘 논바닥엔 군데군데 낟가리가 쌓이고 있었다.

어제 주현이와 금강 물줄기와 서로 맞닿는 샛강에서 참게를 잡기로 약속을 하여 마을 연자방앗간 앞으로 갔다. 연자방앗간 앞 놀이터에선 동네 개구쟁이들이 모여서 떠들어대는 소리가 호들갑스럽게 들려왔다.
얼마 전까지 방앗간 널따란 대문짝 위에 동네 기성이형과 정희누나가 연애를 한다고 크레용으로 커다랗게 써 놓은 낙서가 보였다. 그런데 언제 누가 지웠는지 칼끝으로 긁은 듯 자욱들만 거칠게 남아 있어 멀쩡했던 대문짝이 조금은 흉해 보였다.

‘타타타타, 타타타타’ 하늘 위에 군용 잠자리비행기 한 대가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며 나지막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놀이를 멈추고 하나 같이 비행기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댔다.

소리를 더욱 크게 내며 몸을 낮게 낮춘 잠자리비행기가 한 뭉치의 종이를 땅에 뿌리고 이내 하늘로 점점 높이 날아올랐다. 아이들은 큰 보물이나 줍듯이 서로 다투어 땅위에 떨어진 종이를 줍고 있었다.
종이에는 간첩이나 거동이 수상한 사람을 가까운 군부대나 경찰서에 신고하라는 내용이 인쇄되어 있었다. 종이를 주은 아이들 몇몇은 종이를 들고 집으로 달려가고 남은 아이들은 종이로 딱지를 접어 딱지치기를 했다.

주현이가 두 살 아래인 제 동생 수영이를 데리고 나왔다. 우리들은 함석 물통과 갈고랑이를 들고 마을을 벗어나 좁은 논두렁을 따라 샛강을 향해 걸어갔다.
벼이삭과 잎사귀에 달라 붙어있던 메뚜기들이 발자국 소리에 놀라 온 사방으로 정신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논에서 몸을 구부려 벼를 베시는 어른들의 모습이 누런 벼이삭에 가려져 머리에 쓰고 계신 모자와 어른들의 얼굴만 겨우 보였다.
논두렁에서는 우현이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 한 분과 큰 됫병을 들고 몸을 구부려 메뚜기를 잡으시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건너편 우묵배미 논에는 종금이 누나와 정우네 큰 누나가 벼 베기가 끝난 논바닥에서 부엌칼로 논우렁을 잡고 있었다.

넓은 들녘 황금빛 물결을 헤치듯 달려오는 기관차가 마을 앞을 지나려했다. 검은 연기가 높다랗게 피어올라 하늘 위에 흩뿌려져 가을의 정취를 더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화산리 지서의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온 들녘에 울려 퍼졌다. 그쯤에 수문에 문을 닫아 샛강으로 흐르는 물을 조절을 하는 수리조합 직원의 모습이 조금 멀리 눈에 띄었다. 우리들은 바로 그 시간에 맞추려고 발길을 서둘렀다.
집을 나설 때부터 슬슬 눈치를 살피며 멀찌감치 떨어져 뒤를 따라오던 검둥이가 어느새 우리들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샛강 가장자리 모래톱에는 물줄기를 차고 올라오는 물고기를 잡으려 백로 두 마리가 기다란 발을 곧추세우고 긴 목을 아래로 숙여 노려보고 있었다. 물이 빠져나간 강의 수심이 무릎 밑에 닿을 정도여서 고기잡이를 하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주현이와 나는 신고 갔던 고무신을 벗어 적당하게 표시를 하여 풀로 덮어 잘 감춰 놓았다.
그리고 수영이는 함석 물동이를 들고 뒤를 따랐다.

강가 가장자리에 엎드려 서서히 흐르는 물결 따라 손으로 더듬어 물고기를 잡으려했다. 우묵하게 파여진 곳에 손을 넣자 손바닥 크기만 한 붕어가 ‘푸다닥’ 소리를 내며 뿌연 흙탕물을 일으키며 손에 잡혀 나왔다.
아가미를 벌려 숨을 쉬려하니 알이 꽉 찬 배가 불룩이고 꼬리를 파닥거려 고기비늘이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처럼 번득였다.

주현이는 빠가사리의 날카로운 가시에 손이 찔린 듯 가볍게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에서 피를 조금 흘리고 있었다. 수심이 낮고 물 흐름이 느린 진흙바탕에 들어가서 발로 더듬자 발바닥 밑에 무엇인가 찔려오는 듯했다.
강물이 코밑까지 닿을 정도로 몸을 구부려 두 손으로 움켜쥐려는데 커다란 참게가 집게 발가락으로 우악스레 손가락을 물고 늘어졌다. 아픔을 꾹 참고 진흙 속에서 꺼내어 들어보니 알이 꽉 찬 암놈 참게였다.
주현이는 큼직한 돌들을 놓아 만든 징검다리 돌 틈새로 갈고랑이를 넣고 참게를 열심히 찾고 또 찾았다. 그러다 여의치 않는지 갈고랑이로 애꿎게 돌덩이만 두드리며 투덜댔다.

강 둑 위에 뒤따라오던 검둥이는 풀숲에서 푸덕이는 메뚜기를 잡으려는지 이리저리 뛰었다. 그리고 가끔씩 무당게를 두 발로 잡아 조금은 신기한 듯 머리를 갸웃거리며 슬슬 앞발로 건드리며 놀고 있었다.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돌아서면 배가 한없이 고프기만 했다. 한참을 물속에 있으려니 저도 배가 고팠는지 주현이가 나에게 말했다.

“야 상민아, 우리 배고푼디, 무수나 뽑아먹을래?”
“야, 아무 디서나 뽑아 먹다가 밭 임자헌티 들키면 어짤라구 그러냐?”
“음, 그런 걱정은 안혀두 되, 왜냐면 요기는 마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디라 절대루 안 보여서 뭐, 슬쩍 뽑아 먹어두 괜찮아.”

주현이와 나는 물속에서 나와 동네 쪽을 두리번두리번하며 무밭을 찾아보았다. 물에 젖은 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물이 종아리 아래로 흘러내렸다.
무밭에 다가서 수영이에게 동네 쪽에서 누가 오는지 잘 살피라 하고 한 뼘 정도 땅위로 솟아오른 기다란 무를 뽑았다. 그리고 냉큼 강둑 아래로 내려서 긴 이파리를 잘라 갈대숲에 버리고 이내 아랫니로 껍질을 벗겼다.
물기 찬 무가 하얀 속살을 드러내 얼른 입에 베어 물고 아작아작 씹으니 달작지근한 물이 입안에 꽉 차 올랐다.

‘생무를 먹고 트림만 안 하면 인삼보다 낫다.’ 는 동네 어른들 말처럼 어느 정도 갈증도 해결됐다. 그리고 그런대로 허기도 조금은 달래지는 것 같았다.
그때 아작아작 무를 깨물어 먹고 있던 주현이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야, 상민아! 인제 종구는 기성이 성님한티 매부라구 해야쓰겄다. 왜냐면 기성이 성이 종구 누나랑 그리 됐으닌께, 잘하면 올 가실에 떡이나 얻어먹을랑가 모르긋다.”
“몰러. 그리 되든지 말든지 다 즈그들이 알아서 허긋지, 뭐.”

주현이가 자기 말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별로 재미가 없는 듯 서둘러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상민아, 집에는 언제 갈라구 하냐? 나 물두 길어 날아야 허는디. 참, 그러구 보닌게 너두 우물가에 물 길러 와야것네?”
“응 그려 그래두 너는 샘이 니네 집허구 가까운께 좋지만 나는 한 번 물 길어 나를라면 똥줄 빠지게 힘들어 죽어나는디 뭐.”
“야 참! 종구네는 인제 동네 우물물 안 먹는다구 허드라.”
“왜? 그럼 뭔 물을 먹구 살려구 그러는디?”
“아까, 종구 만났는디 인제 지네는 폼뿌 물 먹느다구 하드라. 그래서 아까 아침나절에 읍내서 우물 파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구 허드라. 인자 종구네는 좋것네. 용만이두 인제 물 안 길러와두 되니게 편허긋다.”
“근데 땅을 깊게 파구 쇠빠이뿌를 박아서 물 퍼올릴라면 돈이 엄청 많이 든다구 허든디 부잣집이라 그런 것두 하는 개비네.”
“야, 상민아! 그리구 용만이 성이 을매나 웃기는줄 아냐” 부락대항 달리기는 꼴찌해 놓구 챙피하지두 않나, 운동회 다 끝난는디두 아직까장 런닝구 입구 다닌당게, 종금이 누나한테 잘 보일라구 그러는가 자기가 무신 큰 운동선수라구 으시대면서 휘파람을 불구 댕기더라. 빙신 같이 동네 사람들이 뒤에서 웃는지두 몰루구.“

중천을 지나 읍내로 느릿 걸음 하는 가을 해가 찬란한 빛을 온 들녘에 양껏 쏟아 부었다. 좁다란 논두렁 위에는 집으로 나르려는지 잘 묶여진 벼 다발이 논두렁에 일렬로 늘어져 있었다.
아래 논배미 논둑길엔 벼 다발을 지게에 지고 동네 어른들이 사이좋게 줄을 맞춰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신작로 건너 멀리 금강 둑 밑에는 장화리 마을 모습이 부연 흙먼지에 가려 언뜻언뜻 보였다. 자동차가 다리 위를 지나는지 콘크리트 이음새 부분의 철판이 차바퀴에 세게 부딪치는 소리가 ‘타다당, 타당. 타다당, 타당.’ 하며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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