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간 당신이 가슴으로 낳은 딸 어린 것 소영이를 데리고,쫓기듯 사노라 잊은 듯해 미안합니다."
참으로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변명을 다시금 늘어 놓습니다. 여명이 움트려 하니 당신에 대한 생각들이 반추합니다. 이럴 때마다 약해지지 않으려 무던히 강인한 척도 해보았습니다. 허나 당신에 대한 애절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니, 숨길 수 없는 마음은 늘 그렇답니다. 지금도 가슴이 아려 참고 견디기에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그저 한동안은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해집니다. 이는 지난날 우리 둘 사이에 다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세세히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요? 때론 뇌리 속 깊이 박제된 숱한 기억들을 억지로 지우려 애를 태운 적도 있었답니다. 숱한 나날을 그런 방황 속에서 바둥대다 이제야 겨우 이곳 산자락에 발길을 멈췄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견고하게 각인되어 버린 기억들이기에 아직도 지워버릴 수는 없나 봅니다. 아니, 지우지도 못하는 우매에 아직도 번민을 거듭하니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지 쉽사리 말할 수 없습니다. 여유롭지 못한 형편에 나름대로 머물고 있는 곳은 계룡 산기슭 아래에 있는 허름한 일간초옥입니다. 이제는 온 방에서 눅눅하게 묻어나는 짙은 흙내도 거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곳 생활이 서서히 몸에 익숙해져 가는가 봅니다. 온밤이 지새도록 짙은 어둠의 장막에 잠식되어 있던 모든 사물들이, 하나둘씩 희뿌연 형체를 서서히 드러내는 새벽녘입니다. 엄동의 냉기가 가득 서린 겨울 찬바람이 어둠살을 서서히 거두고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간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마냥 부풀어 지난밤 아주 늦도록 잠을 설친 탓인가 봅니다. 부스스한 눈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버름한 흙벽을 바라보았습니다. 나처럼 초췌한 모습으로 벽에 걸려 있는 카랜더의 빛 바랜 종이가 그지없이 처연하게 보입니다. 달랑 한 장 남은 이 해 마지막 달 13일의 숫자 위에 그어진 동그라미에 유독 눈길이 모아집니다. 바로 오늘이, 그토록 애태워 기다렸던 당신과의 네 번째 만남을 갖게 되는 그날인가 봅니다. 설레는 마음은 철부지 아이처럼 마냥 들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몸이 이미 그곳 희방(喜方) 계곡 어디쯤에 닿아 있는 듯합니다. 어젯밤 그곳 풍기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로 물어 보았습니다. 그곳 소백산에 아직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하더군요. 지난 겨울엔 아랫도리 무릎까지 푹 빠지도록 눈이 내렸었지요? 그래서 내심 속으로는 올해에도 은빛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리길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티끝 하나 없는 새하얀 설원 속에서 당신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은 조금 서운합니다. 그래도 산릉선엔 며칠 전 내린 잔설(殘雪)이 남아 있다 하더군요. 그 말에 몸과 마음이 더더욱 바빠지기만 합니다. 이른 아침 06:07에 계룡역을 출발하여 조치원으로 가는 첫차를 타려고 합니다. 조금 멀리 계룡산 연천봉에 여명의 빛이 바지런히 어둠을 밀쳐내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줄 선물들을 배낭 속에 담아 어깨에 둘러메고 텃마당에 깔린 어둑발을 밟고 집을 나섭니다. 텃밭 가장자리에 묻어 놓은 항아리 속 볏짚 위에서,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고봉시 두 개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올가실 뒷산 누릅재에서 주워 온 밤 중에서도 큰 것으로만 한 움큼 골라내어 삶아낸 밤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장터 떡집에서 사온 오색 무늬 곱게 무늬진 무지개 떡도 잊지 않고 잘 챙겼습니다. 아참, 깜빡 했네요. 이웃에 사시는 주현이 할매가 꼭 전해 주라고 누누히 당부하셨답니다. 말랑말랑하게 건조되어 먹기 좋은 곶감 몇 개를 그분의 정성과 함께 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장날, 장터 골목길에서 우연히 눈에 띈 한과도 잊지 않고 담았습니다. 그저 그 낯선 곳에 홀로 있을 당신이 왠지 애처로워 배낭 속에 넣었답니다.
어찌! 당신께 주고 싶은 것이 이뿐이겠습니까? 당신이 단 한 번 와본 적 없어 낯설 것이란 생각을 틈틈이 해보았습니다. 꼭 함께 있어야할 곳에 머물지 못하는 당신이 못내 애처로워, 내 머무는 이곳 산골짜기의 빼어난 풍광 한 조각이라도 떼어 가져가고 싶습니다. 허나 마음 뿐이지, 그리도 못함에 마음 한 켠 서운키만 합니다. 무심코 발섶에 밟히는 흑갈색으로 퇴색되어버린 나뭇잎을 주워 웃옷 속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습니다. 비록 철이 지나 볼품성없게 변해버렸지만 이것 하나라도 당신께 꼭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랍니다. 평소에 잘 하지 않던 이런 내 모습이 참 이상스러워지기만 합니다. 그러니 끝내 못 버리는 당신에 대한 정이 이토록 남아있는 탓인가 봅니다. 그저 숱한 방황 속에 의미 없이 스쳐 지난 부질없는 나날들이었다고 생각을 반복해 봅니다. 홀로 살아남아 외롭다는 이기적인 생각에, 몇 번인가 당신과 한 마음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약해진 의지력에 몸 가눔을 못하고 방황을 한 적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당신 앞에 떳떳하게 설 정도의 양심을 지키지도 못한 죄책감도 지금껏 남아 있답니다. 그런 탓인지 당신 앞에 막상 다가서면 늘 미안한 마음이 앞선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나 답지 않게 마냥 서툴기만 합니다. 한 해 동안 마음에 담았던 이런저런 말들이 천체의 별처럼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많았답니다. 그런데 막상 당신을 대하고 나면 하고 싶었던 숱한 말들이 어데론가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저 백치를 빼닮은 듯 속 마음으로 어눌하게 중얼거리기만 합니다. 그런 내 속내를 다 헤아리는 듯이 당신은 웃으며 받아줄 것만 같습니다. 비록 당신이 소천을 하여 나와 함께는 못할지언정, 당신의 체취가 지금껏 내 몸속 깊이 남아 있어 마음은 늘 든든하답니다. 내 기억 속에서 결코 사라질 수도 없고 사라져서도 안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내 마음은 언제나 당신 하나만 생각하며 당신 곁에 머물러 있길 간절하게 바랄 뿐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