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대지에 가득 찬 생동감이 무릇 풍요롭게 느껴지는 봄을 욕심껏 보듬은 하늘이, 여닛날에 비해 탐스러운 옥빛으로 가득 드리워 바라보는 눈길을 절로 시리게 한다.
그런 하늘 한복판에 여유만만하게 떠있는 한낮 해가 성글게 내리쬐이는,영롱한 빛을 듬뿍 받은 이곳 지리산 자락의 수려한 풍광에 푹 빠진 조각구름들이, 잠시인들 쉬어가고파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가 주춤거린다.
허나 산바람이 구름들의 더딘 발걸음을 채근대듯 매정스레 등을 떠미는 노루목 언덕배기에, 자연의 순리에 따라 올해도 어김없이 연분홍빛 진달래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동면의 긴 나날들을 인고의 노력으로 버텨 저마다 앞을 다퉈 피어난 꽃들이기에 그토록 아름다울진데 그리 쉽사리 다가서지 못함은, 덧없이 흘러간 세월속에 영욕으로 얼룩져 다북다북 쌓이고 쌓여 응결(凝結)된 지난날에 아픔들이, 되살아나 가슴 속 절절하게 아려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 탓으로 주저하는 마음에 괜스럽게 발걸음을 늦춰보아도 슬픈 내마음을 아우려주는 듯이 여늿날들 보다 돋보이는 쪽빛 하늘가에, 지난 날들에 있었던 마음 아픈 기억들이 얄밉도록 더더욱 생생하게만 떠오른다.
어렸을 적 마을에서 읍내로 이어진 시오리 길이 그닥 멀지않아 가참하게 보이는데도, 더디오는 어머니를 애타게 기다리며 배고품을 억지로 애를 써 참아내는 어린 눈에는 그리도 멀게만 보여졌다. 가파른 언덕아래 구부려진 오솔길을 눈이 빠져라 바라보면 그런 나를 가엾이 여겨 보듬어 주려나, 그해 봄 그곳 노루목 언덕을 에워쌓고 있던 산자락에 진달래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내 어머니는 기우러지는 해가 남겨 놓은 선홍색 노을빛이 온 대지를 물들일 때까지, 어린 자식 하나에 의지하여 세상 온갖 시름 달래며, 젓갈 동이 머리에 이고 이동네 저동네 고삿길을 따라 이집저집으로 다니시며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치셨다.
"세비(새우젓)젓이나 조개젓 사려,어리굴젓이나 황새기(황석어)젓 사려"
그리 돌아다니시다 끼니때가 되면, 낯선 동네 우물가에서 찬물로 배를 채우셨고, 온종일 몸이 지칠대로 지쳐 돌아오시는 내 어머니를, 애를 태워 기다리다 저 멀리 작은 점 하나 내 어머니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일라치면, 가파른 언덕길을 나뒹굴듯이 달려 힘차게 내려섰다.
그럴라치면 비록 미물인 짐승으로 태여났을지라도, 늘상 변함없는 사랑으로 저를 돌보아주는 제 주인이 눈에 보여 저 또한 그리 반가운지, 우리집 귀염스런 검둥이가 있는 힘을 다해 늘상 나보다 훨씬 앞서 달렸다
그래서 검정고무신이 늘어나 찢어질 정도로 가쁜 숨 헐떡이며 줄달음질하여, 반가움에 겨워 이내 비릿한 젓갈냄새가 시크름한 땀내와 함께 찌들어 얼룩진 품 안에 스스럼없이 파고들어, 여린 얼굴 마구 비비며 응석 아닌 응석도 마음껏 그리고 또 욕심껏 부려보았다.
저주스럽도록 극도로 험난한 세상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시작된 6,25 전쟁의 화마 속에, 두 다리가 잘려 나간 내 아버지 그도 모자라 목숨마져 잔인하게 거두어 내 마음 한쪽을 악랄하게 빼앗아 갔고, 끝내는 표독한 세상이 그라도 의지했던 내 홀어머니마저도 숨을 거두시게 하였다.
전혀 낯선 동네 어귀 흙먼지 푸석이는 길바닥 위에 쓰러져 그리도 허무하게 숨을 거두셔, 오가는 사람들 모두 안쓰러운 듯 그저 혀끝만 차고 스쳐지났다.
내 어머니의 한서린 눈물처럼 젓갈국물이 흘러내렸고 젓갈이 고스란히 담겨진 채 깨져 조각 난 옹기 조각을, 한이 맺힌 만큼 손안에 꽉 움켜쥐시고 눈마저 못 감으셨다.
성글게 자라나지도 못한 어린 몸뚱이에 그나마 외눈박이처럼 겨우 하나 남은 내 어머니마저 야별차게 빼앗아가,험난한 세상 밖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단 하나였기에 내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 상여 끝머리에 뒤를 따라 주는 사람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동네 어른 상여꾼들의 구슬픈 소리 따라 동네 구석구석을 돌았을 때 오랜 세월동안 정이 깊이 들었던 동네 아주머니들도 담 너머로 바라보시며 함께 울어주셨다. 울다 지쳐 꽉 막힌 목구멍에 더는 나올 소리조차 없어, 쉴 새 없이 고여 오는 눈물에 얼룩거려 잘 보이지 않았던 그 산자락에도, 그때 흘린 내 피눈물처럼 분홓빛 짙게 물든 진달래 꽃이, 온 산에 가득차게 피어났을 것 같다.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하나하나가 그리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인데, 모든 사회적 조건이나 경제적인 여건이 극히 빈약했던지라 어떻게라도 살아남으려는 일념과, 내 자신의 입신만을 위해 때론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세심히 살피며, 얄팍한 가식과 진솔치 못한 조잡스런 양심으로, 굴곡지게 살아온 지난날들을 궁색한 변명으로 여러 사람들을 속이려 하였고, 몇 차례 정도는 그럴싸하게 논리적으로 지껄이며 애를 써 감추려 하였다.
정녕 그렇게 쉽사리 지울 수도 지워지지도 않는 기억들이 내 뇌리 속에 또렷이 되살아나, 애태워 보낸 지난 나날 속에 틈이 날때마다 서로 눈을 마추쳤던 꽃이 바로 진달래였기에, 때론 외면하듯 애써 바라다보지 않으려 두 눈을 감아 보아도 스치지 않고서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기억들 그마저 지워질까 두려워 본능처럼 두눈을 모아 바라보면, 마음은 늘 그 자리에 함께 머무를지라도, 텅빈 가슴엔 더없이 애절한 통한만이 다시금 도래되어 나도 몰래 울컥 목이 메어온다.
그런 나를 가엾이 여겨 다독여주시려는 내 어머니께서 심부름을 보내셔,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나를 보려고 애를 써 날아왔나? 얼룩무늬 호랑나비 한 쌍이 꽃을 다정스레 어루만지며, 애틋한 소식 한 자락을 영롱한 날개 빛으로 전해 주려는 것 같다.
거친 삶에 찌들어 사노라 그랬습니다. 참으로 넉살스런 변명을 해보지만 가슴 속에서 들끓는 뜨거운 모정이 다시금 치올라, 뉘우쳐 후회하는 마음에 궁색하게나마 나즈막한 소리로 말씀을 드렸다.
"엄마! 오는 단오날이 엄마의 102회 생신이네요? 살아계셨을 적에 그리도 좋아하셨던 천혜향 한알 손에 꽉 움켜쥐고, 그때 어린 외손주랑 함께 꼭 찾아 뵐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