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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새풀 조회 : 1,553




일년 중 첫번째 절기인 입춘(立春)이 지난지도 꽤나된 듯 싶다.
이제 모든 초목들이 연초록 연한 싹을 틔우는 우수를 지나 경칩(驚蟄)이 되었다.
겨우내 몸을 앙당그레 웅크리고 있던 개구리가 부스스한 눈을 뜨고 세상 밖으로 뛰어 나왔다.
이어서 청명(驚蟄)과 곡우(穀雨)가 지나자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들의 마음이 마냥 설레기 시작했다. 물에 씨앗을 담가 못자리를 만들려고 삼태기에 황토(黃土)를 끌어 모아 등지게 바작 안에 퍼올려 담았다.

이른 아침부터 찌뿌둥한 날씨가 계속 되어 기분이 좀 우울해졌다. 그러나 한낮이 되니 구름 틈 사이로 파란 하늘 한 조각이 설핏 보였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조금이라도 날이 개이려 하자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논둑길을 걸어 앞 들녘에 나섰다.

널따란 논배미가 녹색 융단을 깔아 놓은 듯 온통 푸르게만 보어 싱그러움을 한껏 자아냈다.
빼곡하게 들어찬 독사풀 이삭들은 제가끔 줄기 끝이 주황색 바탕에 알록달록하게 각색(各色)을 띄웠다.
마치 정이 흠뻑 든 귀한 손님이라도 맞이하려는지 사방에 환하게 불을 밝힌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마치 대자연 속의 꾸밈 없는 일부분 같은 독사풀들의 향연인 듯 했다. 그와 더불어 꽃의 개체수를 아둔한 내 두뇌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조차 없었다.
그 수(數)가 마치 밤하늘의 천체(天體)를 떠도는 별들보다 많은 듯싶었다.
또한 논배미에는 독사풀들과 한데 어울려 불그레한 빛으로 여울져 물결치는 자운영 꽃이 말로써는 형언키 어려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야트막한 논둔덕 위에는 샛노란 민들레가 귀엽다 못헤 참으로 앙증맞게 피어났다. 더불어 수줍음 잘 타는 보랏빛 제비꽃이 함초롬히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닥 멀지 않은 옆자리엔 냉이가 어느 틈에 그리도 뻘쭘하게 자라나 조금은 볼품성 없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루워 짐작컨데 아마도 이른 봄에 나물캐는 아낙네들의 눈길릏 놓쳐버린 냉이가 줄기 끄트머리에 아기별 모양으로 새하얗게 작은 꽃을 소담스레 피운 것 같았다.
작아 앙증맞은 냉이 꽃은 시나브로 부는 소슬바람에 가는만큼 긴 목이 간지러운 듯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문득 자꾸만 지워지려해 안타까운 아득한 기억의 저편 내 어렸던 코흘리개 시절이 생각났다.

비교적 수리 시설이 잘된 농경지였지만 하늘이 정해주는 가뭄만큼은 절대로 피해갈 수 없었다.
어쩌다 운이 나빠 가뭄에 기근(飢饉)이라도 겹쳐서 들면 그해엔 집집마다 먹을 것이 그리도 궁했다.
농사를 지으려고 남겨 놓았던 씬나락까지도 먹을까? 말까? 망서려 마음에 수없는 갈등을 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못해 저마다 굶주림에 지친 얼굴로 들녘으로 나섰다. 그리고 지벅지벅 걸어 나와 먹거리를 찾아 헤맸다.

들녘에 돋보이는 푸른빛을 찾아 나물을 뜯었다. 밥알이 동동 떠올라 스쳐 지나간 나물죽이라도 쑤어 잔뜩 골은 배를 조금이라도 채우려 안간힘을 썼다.
명아주 어린 순은 밀가루에 섞어 죽을 쑤어 먹었고, 독사풀 애순은 뜨거운 물에 데쳐 나물로 무쳐 먹었다.
독사풀 씨는 둥글고 가는 체로 훑어 솥에 넣고 볶아 죽을 쑤어 끼니를 때우며 살았다.

게으른 봄비가 그칠라치면 어른들은 너나할 것 없이 기다렸다는 듯 어깨에 망태기를 둘러메고 앞산에 올랐다.
취나물과 고사리 그리고 두릅을 따 허기를 달래며 그리라도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썼다.
차마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고난의 날들을 겨우겨우 버텨냈다.
그렇게해서라도 힘들기만 했던 봄의 춘긍기를 하루라도 빨리 넘기려 했다.

어찌 보면 한 편으로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참으로 순박하기만 했다. 제대로 하늘을 원망치도 못하고 진저리 쳐지는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그렇듯이 그 시절 우리들 모두는 삶의 그 자체가 암울하다못해 그처럼 처절하기만 했다.
그런 저런 처참한 모습들이 한데 어울러져 뼈마디마디가 시려왔던 그때 그시절이였기에 정녕 두번 다시 기억하기 싫은 우리들 모두의 슬픈 자화상이였다.

내 어릴 적 짝지였으며 같은 동네에 살았던 옥순이와 소꿉놀이를 곧잘했었다.
흙 담장 앞에 쪼그려 앉아 히득히득 웃으며 깨어져 버린 사금파리를 잔뜩 주워 모았다.
주황색으로 얼룩덜룩한 독사풀 꽃밥이 마치 잘 빻아 놓은 고춧가루같이 보였다.
그래서 반찬거리를 한다고 그 안에 독사풀 꽃밥을 따다 손으로 잘게 뜯어 넣었다.
그 시절 우리들은 그렇게 철없이 놀았었다.

너른 들녘 논배미 독사풀 뿌리 근처엔 땅거미들이 집을 지어 놓고 짝을 이뤄 살았다.
그래서인지 드문드문 독사풀 줄기에 땅거미들이 쳐 놓은 아주 가는 거미줄에 이슬 방울이 맺혀 한낮 햇볕에 영롱하게 비추이기도 했다
더불어 한편으로는 작은 풀벌레들이라도 잡아 배를 채우려던 어물쩡한 개구리들은 사람들 인기척에 후들짝 놀라 "텀벙" 물이 튀기는 소리를 짧게 남기며 재빠르게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
더러는 ‘무자치’란 놈이 몸을 칭칭 감아 둥그렇게 똬리를 틀고 머리를 길게 빼내밀어 바짝 추켜세운 모습이 아주 혐오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흉물(凶物)스럽게 가늘고 긴 혀를 주둥이 밖으로 방정맞게 수도 없이 반복하며 낼름거렸다.

부연 하늘은 마치 내 어머니의 젖빛 같았다.
배고픔에 지친 몸 그도 안쓰러워 살포시 보듬어 주려는 듯 그윽한 눈빛으로 바짝 다가서는 것만 같았다.

철딱서니 없는 우리들은 어른들의 한숨 소리는 아랑곳하질 않고 배만 부르면 그저 놀거리를 찾느라 그리도 분주했었다.
냇둑에서 달짝지근한 삘기를 얼마나 뽑아 먹었는지 모른다. 입 언저리가 갓 풀을 뜯고 난 검은 염소 주둥이처럼 푸릇푸릇하게 물들어 있었다.
우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는 절대 그렇지 않은 듯이 상대의 얼굴만 바라보며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활짝 웃으며 놀려댔다.

때로는 독사풀 줄기를 알맞게 잘라 내어 이삭의 속 안에 들어 있는 달달한 연한 속살은 얼른 먹어치웠다.
그리고 겉껍질은 잘 부풀려서 풀피리를 만들었다.
자그만한 두 볼이 불그레 달아올라 이내 터지고야말 것처럼 입에 대고 힘껏 불었다.
‘삐이삐이’ 소리를 내며 뜻 모르게 찾아드는 허기와 외로움을 그렇게라도 달랬다.

놀기 좋을 만큼 잔뜩 부풀어 올라 푹신푹신한 독사풀 밭에 벌러덩 드러눕고 마음껏 나뒹굴었다.
그리고 씨름을 하면 서로 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느라 가는 종아리가 바르르 떨렸다.
더러는 동네 형들과 어울려 편을 둘로 갈라 말타기 놀이도 하며 놀았다.

때로는 가위바위보를 하여 서로 편을 갈라 말박기도 하였다.
가지고 놀 고무공 하나가 있을 리 없는 답답하기 짝이 없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래서 검정 고무신짝을 공으로 삼아 맨발로 공차기를 하며 놀았다.

전쟁은 광란의 화마로 온 강산을 무자비하게 할퀴고 스쳐지나갔다.
그로 인해 온 민족에게 남북분단의 지울 수 없는 통한의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끝나 휴전이 이루어진지 겨우 서너 해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흙에 묻혀 살던 순박하기 그지없는 민초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야욕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되고 말았다.
정신적이나 물질적으로 입은 실로 막중한 피해는 조금이라도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우리들의 위정자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무능하기만 했고 물가는 하루가 멀다고 뛰어올랐다.
그런 틈을 타 사회 질서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 우리 마을에도 그나마 운이 좋았던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미국과 자유우방에서 굶주림을 면하라고 주는 원조 물자인 밀가루와 우유가루가 나왔다.
그런 혜택이라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면사무소에서 막도장을 찍고 배급을 받아 감지덕지하면서 끼니를 때우고 살았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급식소에 있는 커다란 검정 솥에 장작불을 피워 원조물자로 나온 우유가루를 끓여 우리들 모두에게 고루 나눠주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우유에 지방분이 많아 우리들 체질에 맞지 않아 그랬는지 우유를 먹고 나면 소화를 못해 배탈이 나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그러면 동네 어른들은 그런 우리들을 보고 이렇게 말을 하면서 마구 놀려댔다.

“아, 그 뭐시냐. 대갈빡이 노랗게 생겨 처먹은 양코배기가, 무신 염병 지랄났다고 애덜헌티 우유가룬가 머신가를 허벌나게 처먹게 해가지고, 몽땅 동투가 나서 그러는구먼 그려. 그러닌께 자고로 꽁짜배기두 개려서 먹어야
허는 뱁이여.”

그런 우환 속에서도 어쩌다 하늘이 도왔는지 가을 농사가 풍년이 들기도 했다.
그런 해 마을에서는 전쟁으로 몇 해 동안 미뤄왔던 혼례를 서둘러 치루는 일이 더러 있었다.
‘원님 덕분에 나발 분다.’는 동네 어른들의 말처럼 귀동냥해서 들은 잔칫날을 잊어버릴까 싶어 꼭 기억하려고 했다.

그때 혼사가 있는 집에서는 보편적으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분수에 맞게 동네잔치를 치르려 했다.
그러나 일부 지각이 없는 사람들은 본디 조상 때부터 양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애써 양반인 척 억지 흉내를 내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여법 가들먹거리며 살았다.
동네 골목길을 걸을 때에도 괜스레 헛기침을 했고 그리도 거드름을 피워 허세를 부렸다.

삶의 과정에 그놈의 체면이 무엇인지 몇몇 집들은 혼례를 치르려고 나름 무리를 하는 경우도 더러는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마을에서 대농인 부잣집에 손을 벌려 장리 빚을 얻어 썼다.
그러나 변변치 못한 소작농인지라 겨우 추수를 끝내도 가족들 먹을 때거리가 턱 없이 부족해 해마다 그 원금에 대한 이자조차 갚지도 못했다. 그로 인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에 눌려 빗쟁이로 전락하여 참으로 힘들게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이 ‘자식들 시집장가 보내느라 등골이 휜다.’고 곧잘 말들을 했었다.

그래서 살기가 비교적 나은 집에서는 살림밑천으로 삼으려고 송아지나 검정 돼지를 키웠다.
애지중지 키워 탐실하게 살이 오른 돼지를 어찌할까 하고 두 내외가 머릴 맞대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이리저리 수없이 재보다 결국에는 잔치를 치르기 위해 돼지를 잡고 말았다.
돼지를 잡을 때에는 우리들 모두는 그리 좋아 주위를 맴돌면서 기를 쓰고 기다렸다.

잔칫상에 오르는 삶은 돼지고기를 다만 몇 점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네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며 부수적으로 은근히 기다린 것은 아주 유일한 우리들의 놀거리인 돼지 오줌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호박 줄기를 꺾어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잔뜩 불어 넣어 잔뜩 부풀어 오르면 공 대신 가지고 놀았다.

논배미 안에서 뛰놀다 보면 서로 부딪쳐 수없이 넘어지고 엎어지기도 했다.
온몸에 진흙이 묻어나고 무르팍에 풀물이 가득 들어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 터놓고 웃으며 놀았다.
비록 끈질긴 가난으로 못 먹어 배는 고팠을지라도 단단한 차돌맹이처럼 야물딱지게 강하고 티끌 하나 없이 자랐다.

그렇게 우리들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환경에서 자연의 순리에 순응(順應)하였다.
그런 탓에 주위의 모든 사물들과 자연스럽게 친숙해져 공생을 하는 일부분이 되었다.

비단 독사풀 뿐만 아니라 너른 들녘에 돋아 있는 모든 풀들이 기근을 면해 주는 ‘구황식물’이었다.
콧속 깊이 익숙해진 풋풋한 흙냄새와 논밭에 뿌려 흐트러진 똥 오줌으로 버무려진 역겨운 거름 냄새까지도 삶에 일부분으로 수더분하게 받아들이며 살았다.
그리고 냇가의 비릿한 물비린내까지 한데 뒤엉켜 잔잔한 정을 불러일으키는 고향 땅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들 모두는 밝고 따스한 햇살의 축복을 받으며 구김살 없이 살았다.

독사풀 밭에서 놀 만큼 놀아 지쳐올 무렵이면, 산허리를 휘돌아 빠져나오는 검정 증기기관차가 검은 연기를 하늘로 힘차게 내뿜으며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온 동네 꼬마들은 눈을 모아 그리도 반갑게 바라보았다.
비록 기관사와 우리들이 있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힘껏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눈을 모았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작은 손을 하늘 높이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내 있는 힘을 다해 큼직하게 동그라미를 그리며 마구 흔들어 주었다.

그러면 기관사 아저씨도 그런 모습들이 못내 귀여워 응답을 해주시는 듯했다.
‘뽀오옥 뽀오옥’ 우렁찬 기적 소리에 온 들녘과 마을 전체는 물론 우리들이 놀고 있는 논빼미까지 들썩거렸다.
그렇게 검정 기관차는 기적소리를 하늘 끝에 닿을 듯 힘차게 울리며 북녘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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