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보기엔 단수숫대와 수숫대의 생김새가 거의 비슷하지만, 단수숫대는 익어 갈수록 머리를 점점 숙이는 수숫대와는 너무도 판이하게 달랐다. 그저 "일구월심"인 듯 곧곧하게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치도 구부러짐이 없는 줄기를 하늘 향해 올곧게 뻗쳐 올린 단수숫대의 군데군데가, 피빛처럼 불그레해지면 불연듯 내 어렸던 시절 그때의 추억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럴 무렵이면, 동네 할머니들이 알듯 모를듯 하게 곧 잘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단수숫대에 드문드문 붉은빛이 도는 것은 나름대로 다 그러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아주 옛날 옛적 깊은 산속에 사는 호랑이가 어느 날 밤에 마실을 나왔다 우연히 먹어 본 단수숫대의 단맛에 홀딱 반해, 달빛 흐린 한밤중에 실금실금 기어와 밭주인 몰래 단수숫대를 꺾어 먹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만 들켜 혼쭐이 빠져라 도망을 치는데 그 죄 값을 받느라고 그렇게 됐는지 지가 이빨로 분질러 놓은 날카로운 단수숫대에 그만 궁둥이를 찔려 피가 묻어나는 바람에 그리 벌겋게 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겨우 여섯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였지만 그런 말이 턱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아챘지만 듣기엔 그럴싸하게도 들렸었다.
아무튼 그무렵부터 단수숫대에 단맛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겁 없이 억센 단수숫대를 맨손으로 꺾으려다, 그만 날카로운 껍질에 엄지손가락이 예리한 칼날에 베인 것처럼,손끝이 쓰리도록 다치고 난 뒤로는 매번 무척이나 조심을 했다.
꼭 그맘때쯤이면, 쨍쨍 내리쪼이는 여름 햇살에 잘 반사되어 꼬리 끝이 유난스레 빨갛게 보이는, 고추잠자리 두서너 마리가 텃마당 빨랫줄 위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차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선들거리는 단숫숫대 머리끝에, 내려앉았다 떨어졌다를 감질나게 몇 차례씩이나 반복을 하며, 바라보는 나를 은근히 약 올렸다.
높기만 한 하늘 향해 기다랗게 목을 빼어 내민 단수숫대 언저리를, 쉴새없이 빙빙 돌면서 여기가 좋을까? 아님 저기가 더좋을까? 자리를 잡으려고 뜸을 들이는가, 한참을 그리도 부산스레 맴돌아 가뜩이나 따끈거리는 여름 한낯을 더 뜨겁게 달구었다.
그럴 즈음이면,뜨락 한모퉁이에 서 있는 여러 해를 넘긴 커다란 밤나무에 매달린, 연초록빛 푸르딩딩한 밤송들이 나뭇잎 사이 군데군데에 몸을 숨겨 술래잡기를 하면, 그도 모르는 척 시침을 뚝 떼고 마냥 청승을 떠는 매미는 이른 아침부터 더위를 부재질 하려는가? 그리 얄밉도록 줄차게 울어댔다.
마을 어른들이 앞산에서 베어 온 소나무를 정성껏 깎아 세우고, 윗부분 바닥엔 대나무를 납작납작하게 쪼개어 간지런하게 엮어 만든 평상에, 잠시라도 더위를 식히려 걸터앉아 부엌칼로 토막낸 단수수대의 겉껍질을 벗겨 깨물면, 달달한 단물이 입 안에 가득 배어나와 달작지근한 맛에 그리도 포만스러웠다.
그 무렵쯤이면 나도 모르게 나른해져 스스르 낮잠이 오려고 해, 슬그머니 평상에 누워 곧 녹아내릴 것만 같은 푸르디푸르다 못해 새파랗게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방금 전 맛보았던 단수숫대의 단맛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그래서 성큼 일어나 또 한 토막을 손에 들고 조심성 없게 입으로 껍질을 벗기다 보면, 입술이 따끔거려 손으로 훑어보면 붉은 피가 입 언저리에 여법 번져났다. 마치 덜 익은 단수숫대를 베어 문 것처럼 혀끝이 비릿해져 화가 잔뜩 났다
'에이씨' 하면서, 그 생김새가 너무 초라해 있는둥 마는둥한 낮은 싸리 울타리 너머로, 한 움큼 입에 물고 씹던 단수숫대 속살을, 손바닥에 얼른 내뱉어 힘껏 집어던져 버렸다.
그런데 재수가 없으려고 그랬나,하필이면 우리들 또래 중에서 제일 힘이 세고 심술맞은 덕칠이 형 얼굴에 그만 맞고 말았다.
그리도 심술맞은 덕칠이 형이 동네 연자방앗간 측백나무 그늘 밑에 놀려 가려고, 고샅길이 좁다고 굴렁쇠를 한참 신나게 굴리며 달려오던 중이였다. 주걱턱에 양쪽 눈두덩이가 두꺼비 모양 두툼하게 툭 튀어나와 우락부락하게 생겨,동네에서 힘이 제일로 엄청나게 쎈 돌배나무 집 덕칠이형 얼굴에 맞았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굴이 온통 울근불근하게 달아올라 화가 잔뜩 난 수퇘지처럼 식식거려 거친 숨소리를 내며, 가뜩이나 겁에 잔뜩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금새라도 한 대 세게 내려칠 듯이 마당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야 이새끼야 내가 느네 집 마룽 밑에다 키우는 똥강아지냐? 니가 실컨 씹어 처먹든 단수숫대 찌꺽지를 싸강머리 음씨 내 얼굴에 다가 지버던져버리게" 하면서 소리를 버럭버러 질러댔다.
그리도 졸리던 잠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정신이 번쩍 들고, 고양이 앞에 생쥐 모양 찍 소리도 못하고 그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래도 덕칠이형이 분이 덜 풀렸는지 어깨를 들먹이고 씩씩거리며,주먹을 화가 치솟는 만큼 잔뜩 거머쥐고 나를 향해 똑바로 보라는 듯이, 위협적으로 내보이며 다시금 말을 건냈다.
"너 시방 니네 집이라 가만 두는디 이따가 방앗간 공터에서 만나기만 혀봐, 참말루 그냥 안 놔둘 틴께 그리 알어"
좁다란 골목길 땡볕에 얼마나 굴리고 다녔는지 뻔질뻔질하게 질이 잘나, 은빛으로 번쩍번쩍하는 굴렁쇠를 몰고 사립짝 앞을 빠져나가는데, 어린 마음에 덕칠이형에게 당할 뒤탈이 두려워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그때부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하여 단수숫대 맛이 어디로 달아나버렸는지 금새 잊어버리고 맥없이 평상 모퉁이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야! 상운아 내가 시방 고샅길루 걸어오다 보닌께, 그 뭐시냐. 돌배나뭇 집 사는 말썽꾸러기 득칠이란 놈이, 우리 집 삽짝 밖으루 나오던디. 무신 일루다가 왔다 간다냐? 뭔 일이 있기는 있는 기여, 행여라도 이놈의 자식 이번에 내 새끼 털끝만큼이라두 건드리기만 혀봐라, 내가 그놈에 손모가지를 기냥 내뻔져 두는가"
그 모지락스런 폭염도 마다않고 마을 뒷뜰 녁 서리태 밭에서, 풀을 뽑으시다 더는 더위를 못견디셔 그만 집으로 돌아 오시던, 어머니께서 싸리짝 문 안으로 들어서며 말씀 하셨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다그치시며 몇차례나 거듭 물으셔도 덕칠이형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무서워 겁에 잔뜩 질린 나는 입 밖으로 무엇이라 단 한 마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넋을 잃은 바보처럼 까만 눈망울만 끔뻑거리며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만 말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