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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와 약국 길모퉁이 조회 : 2,114




생동의 계절 사월의 화사함에 도취되어.모두가 그리 들뜨기만 했었다.
연초록 빛으로,곱살하게 수놓아진 봄의 길을 밟고 신록의 푸르름이 설렘으로 다가서는 오월이 찾아왔다.
계절의 첫들머리쯤에 오월은 잠시 머물러 차분하게 숨을 고르려나 보다.
아마도 초여름으로 이어지는 세월의 깃점을 지나려는 것 같다.

광활하기 그지없는 저 하늘도 생동의 계절을 맘껏 예찬하여 상응하려나 보다.
지난 겨우내 볼품성 없이 까칠한 민낯을 심심치않게 드러냈던 하늘이였다.
오늘따라 아침 해도 봉두에 장엄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뒤질새라 해맑은 모습을 아낌없이 선보인다.
그 빛에 탐스럽게 물들어가는 쪽빛 하늘을 보니 조갈난 심성에 가벼운 감동을 일으킨다.
다불어 텁텁한 삶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산자락에 가득 서려오는 운해는 은연한 자태로 온 산을 포근히 감싸려 애를 쓰고 있다.
그에 걸맞게 산자락마다 연분홍 산철쭉이 만개하여 풍만한 군락을 이룬다.
검푸른 빛으로 서서히 변모하는 신록은 섬세한 손놀림으로 산자락을 빈틈 한 곳 없이 뒤덮고 있다.

햇살이 곰살갑게 찾아들면 모성을 지닌 지리산 골짜기는 그 모든 활기가 새롭게 되살아난다.

오늘이 바로 오일장날이다.

규보가 비교적 작은 소도시이지만 이곳에도 인심이 후덕한 장터가 닷새마다 어김없이 들어선다.

그날만큼은 삶에 찌든 냄새와 물건을 사고파는 저마다의 목소리로 나름 북적거린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비좁은 골목길이 더없이 좁아 작게만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곳엔,
치졸한 가식이 없어 대하기 부담 없는 순박한 사람들이 진솔한 교류를 이뤄간다.
그런 순박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여지껏 남아 있다.
거추장스러운 격의 굴레가 없어 마음 열고 편히 대할 수 있어 더더욱 좋기만 하다.
바로 그 모든 진솔한 모습들이 꾸밈없어 참스럽고 진부하기에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의 땀 냄새와 오장육부에서 우러나 헛구역질나지 않는 진솔한 삶의 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장날이면 장터에 나가 진솔하게 살려하는 사람들 모습에서 미쳐 깨닯지 못한 숱한 배움을 얻는다.
비록 함께 머무는 시간이 짧더라도 진부하게 융화되고 함께 호흡을 하고 싶다.

그런 모습들에서 거친 세파에 휩쓸려 잃어버린 그 옛날의 때 묻지 않았던 기억들을 되찾고 싶다.
그러기 위해 그 진솔한 범주 안으로 들어가고만 싶다.
바로 그 길을 되찾아 보고 싶은 마음의 욕구가 충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늬 지역보다 산이 높은 곳이다.
그런 이유인지 하늘 아래 흰 구름도 바래봉에 턱을 걸쳐 잠시인들 가쁜 숨을 돌려 추스림한다.
가파름한 고개 너머 구부러진 산길 따라 진주까지는 여법 시간이 소요되는 짧지 않은 거리다.
남원을 출발한 시외버스는 도로시설이 비교적 활달한 88 고속도로 위를 달려 함양을 지난다.
다시 얼만큼 달리다 보면 동의보감에 유래지 산청을 거쳐 영호남을 잇는 접목지인 진주에 닿는다.

세월이 흐른만큼 시외버스의 모습들이 눈에 익었다.
오고가는 버스들 저마다의 색깔이 다를지라도 나름나름 정감이 간다.

버스와의 거리가 다소 멀더라도 버스의 색깔만으로 소속 회사를 구분할 수 있다.

그 시외버스가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 운봉 마을에 꼭 들려 섭섭하지 않을 만큼 쉬어 간다.

그곳엔 시외버스들이 발붙임하여 잠시 멈춰가는 작달막한 정류장이 있다.
그 정류장 길 건너편에 약국을 끼고 도는 좁다란 골목길이 있다.

그 약국 한모퉁이에 장날마다 어김없이 단출하게 전을 펼치시는 노모 한 분이 계신다.

그 노모는 남다른 가슴아린 아픔을 심속 깊히 감추고 사시는 분이다.
그 분에 대한 세세한 사연은 동네에 사는 몇몇 사람들의 입을 통해 오래 전부터 익히 알고 있는 터이다.

따사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온몸에 받으시며 몸이 힘에 부칠지라도 또 다른 하루에 기대를 거신다.
그런 작은 설렘이 있어 똬리를 틀어 수더분하게 자리를 잡으신다.
얼핏 보기에도 허허로운 삶을 의지 하나만으로 버티고 버텨 살아오신 것 같다.

그런 느낌이 거칠한 노모의 얼굴에서 무언에 암시를 한다.

그동안 마디마디 옹이진 사연에 하고픈 말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듯해 보인다.
남들이 알 리 없는 그런 사연들 높은 산 봉두에 닿고도 또 남을 것만 같다.
노모는 세월과의 싸움에 지쳐 이젠 그 모두를 체념 하신 듯해 마음이 퍽이나 애잔해진다.
짙어진 검버섯과 이마에 크고 작은 주름이 가득 찬 얼굴에서 아픔들이 은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그래도 오늘 하루에 기대를 건만큼 삶아 건져낸 죽순을 무릎 앞에 가지런히 놓으신다.
그리고 말보다 먼저 눈빛으로 손님을 부르려 한다.
희누름한 죽순이 한낮 햇볕에 점점 마르는가 보다. 앞으로 끌어당겨 물을 고루 끼얹으신다.

오가는 사람들 눈에 잘 띄라고 그러시나 보다.
팔려고 내놓은 물건들을 몇차례나 이저리 옮겨 놓으신다. 그리고 애타는 눈빛으로 온 주위를 두루 살펴본다.

검붉은 오들개와 빨간 앵두가 담긴 하얀 종재기가 유난스레 눈에 띄인다.
농 익은 앵두 알의 표피가 햇살에 닿아 노모의 아픔을 토하는 것처럼 번득거린다.
둥근 마늘을 손톱으로 한 알 한 알 껍질을 벗겨 한 종재기를 채워 가지런히 놓으신다.
내 눈에 불현듯 떠오르느 내 어머니 얼굴이 노모의 얼굴과 자꾸만 겹쳐 보인다.
실로 형언키 어렵게 도드라지는 애잔함이 마음을 뒤틀어 놓아 정말 감내하기 어렵기만 하다.

그런 탓에 어찌도 못하는 심정으로 그런 노모의 모습을 그저 멍한 눈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다.
괜시리 미안스럽게만 느껴져 분위기까지 서서히 경직되어 가고 있다.
냉엄한 현실 속에 사는 내 모습이 그런지라 어찌 도와드릴 방법이 없다. 그저 얼버무릴 수밖에 별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자꾸만 어렸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 내 어머니에게 꼭 그렇게 묻고만 싶다.
내 마음이 혹여나 섣부른 동정심을 가장한 가증스런 위선은 아니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싶다.

어느덧 해가 오전의 기점을 벗어나 오후로 접어들었다.
그제야 등 굽으신 노모는 힘들게 몸을 일으켜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것은 살려고 바둥대는 고뇌에 가쁜 숨소리인 것 같다.
그런저런 노모의 시름들에 힘겨워하는 내 자신이 비굴하기게 느껴질 뿐이다.
그다지 잔정이 많지않은 내가 노모의 그런 모습을 조금이라도 아우러 주고 싶었나 보다.

어느덧 해거름녁이 되자 드문드문 장짐을 챙기는 장사꾼들의 모습이 눈에 띄인다.

노모가 그닥 큰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닐진데 아쉬움만 가득찼던 하루가 서서히 기운다.

저녁 노을이 느릿느릿 물드는 서편 고갯마루를 말없이 바라만 보신다.
그리고 남들이 들을까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쉰다.
무릇 기대는 크셨지만 생각보다 턱없이 장사를 못한 텃이다.
이미 한 모퉁이가 터져 버름한 라면박스을 애꿎게 끓어 당겨 느리느릿 짐을 챙기신다.
그런 노모의 작달막한 몸이 더할 나위 없이 애처럽다.

그 어느 메에서 모진 설움 아는 양 한차례 따스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이 시름에 찬 노모의 이마에 흩어 내린 흰 머리카락을 자분하게 어루만져 태연한 척 스쳐 지난다.

그런 바람이 일면으로는 매정스러워 얄밉기도 하다.
하지만 끝내 살갑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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