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상 강원도와 접경을 이룬 탓인지 이곳 경북의 동북부 지역 또한 산세가 다소 가파르기는 매한가지랍니다.그래도 이따금씩 차창 밖으로 비교적 평탄한 분지를 만날 때도 있어 내가 머물고 있는 계룡 산자락과 느낌이 별반 다르지 않아 미흡하게라도 정감이갑니다.
달리는 열차는 약간 가파르게 비탈진 내리막 길을 세차게 내려섭니다. 열차가 탄력을 받아서 그런지.마치 활에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내리꽂듯이 쾌속으로 질주합니다. 그리고 이내 산기슭에 들붙어 앙증맞게 보이는 작은 역사 희방역에 정적을 깨우려는 듯 '빠아앙,빠아앙' 앙칼진 소리를 하늘 향해 높다랗게 내어지릅니다.
그곳 계룡역을 출발하여 충북의 내륙을 가로질러 통과한 후 이제 경북의 북동지역 초입에 접어듭니다. 조금만 동쪽으로 더 내달리면 국토를 횡단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그래도 그리 장시간을 운행한 열차는 넉살스럽게 시차의 흐름에 따라 바뀌고 또 바귀는 숱한 크고 작은 역들이 그닥 낯설지 않는 모양 같습니다.
차창에 드리워진 연한 녹색 커튼이 다소는 촌스럽게 보입니다. 커텐이 시원스레 활짝 제껴진 차창 밖으로, 흐릿한 하늘이 저토록 침침하게만 보여도, 한 자락 아린 슬픔 뒤에 묻어오는 끈끈한 당신의 기다림이 있기에, 마음은 더욱 두근거려 그리운만큼이나 울렁입니다
이내 열차가 달려온 만큼이나 가삐 숨을 몰아쉬고, 승강장 홈이라고 콘크리트로 만들어 겨우 짤막하게 두 개 밖에 없는, 간이역 수준의 작은 역사 희방사역에 멈춰섭니다.
그런가 싶더니 불과 몇분 후 열차가 출발했습니다. 연화봉에서 남쪽으로 내려 뻗은 기슭에 자릴 잡은 단출한 시골 간이역인 희방역을 뒤에 남겨 놓고, 다음역으로 주행을 계속하는 열차는, 끝내 나를 외면하려는 듯 열차의 끝머리를 산모퉁에 감추며, 매정스레 사라져 갑니다.
비록 역사의 규모가 다른 역들에 비해 현저하게 작아 고적할지라도, 그 동안 몇 차례 와 본 적이 있어 그런지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집니다. 아니 그보다는 이제 당신 곁에 가까히 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홈을 벗어나 역사의 출구까지 이어진 길이 너무도 독특하군요,
그 언젠가인가는 확실치 않으나 그때도 당신과 함께 했기에 더욱 기억에 떠오르는 곳, 경남 진해시의 외곽 해변가 지역인 수치, 그곳의 바닷가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 아담스런 커피샆이 하나 있었지요? 그 입구에 놓였던 좁다란 길과 모양이 그리도 비슷하게 빼닳았네요. 콜타르 냄새가 옅게 배어나는 철로의 페침목을 사용하여 운치있게 만들어 정교하게 배열해 놓은 나무침목 위를 밟으며 역사의 출구를 조금은 홀가분하게 빠져나왔습니다,
인적은 없는데, 별반 시덥지 않은 길손이라 그런지, 나를 맞이 해주는 것은 냉기를 가득 품은 겨울 찬 바람 뿐인가봅니다.
그래서 더욱 고느적하게 보이는 역사 앞마당에 홀로 서니, 희방계곡 그 어디쯤까지 마중을 나와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당신이, 애태워 기다리는 것만 같아 마음 더욱 서둘러집니다.
내 시야에서 조금 멀리 소백산의 전경이 눈 안에 확 들어 와 큼지막한 설레임으로 다가섭니다.
하얀 눈을 머리 위에 이고 있다 하여 불리워진 소백산. 그정상인 비로봉은 예나 지금이나 한 치의 흔드림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조금 내려서 있는 연화봉도 빤히 바라보입니다. 그리고 연화봉을 내려서 길가 옆에는 소백산 강우측정소의 콘크리트 건물이 보이는데, 그 건물 맨 윗부분에 둥그런 돔 모양의 지붕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예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솔직한 내 속마음은 그렇군요. 이리도 춥기만 한데 저 산 어디쯤에서 나를 마중나와 있는 당신의 얼굴이 눈에 선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먹여 집니다,
그렇게 아파지려는 마음에 주춤거리는 나를 향해 당신이 애태우는 듯 소릴 칩니다.
"오빠 빨리 와 얼른, 무척 보고 싶었어!"
평일 탓인지, 아니면 시원스레 눈이 내리지 않아 그런지,오늘따라 소백산에 오르려는 등산객이 한사람도 없으니 참으로 한산하다 못해 고적해집니다.
이제 계절이 겨울로 들어서는 초입인지라 그다지 춥지는 않지만 부는 바람은 역시 차갑기만 합니다. 걸음 멈춰 역사의 앞마당에 홀로 서 있으려니, 당신이 살아 생전에 늘 나에게 입버릇처럼 한 말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오빠는 죽을 때까지 아기에게 죄 지은 마음으로 속죄(贖罪)하며 살아야 돼'
지나간 세월 동안 한지붕 한이불 안에서 살을 맞대어 숱한 나날을 당신과 더불어 살아왔어도, 이런 사연 당신이 들어 알게 되면 더욱 마음 아파할까 봐 못내 하지도 못했던 말이 있습니다.
이제 오늘에서야 솔직하게 마음을 열어 말하려 합니다. 이렇게라도 해야만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 편할 것만 같습니다. 지난날 당신이 나에게 집요하게 물었고 나는 그런 당신의 물음에 대답은 커녕 애써 외면하여 말을 피하려 하였던 바로 그 이야기랍니다.
그리도 무참하게 내 일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일년 육개월의 진저리쳐지는 병원 생활에도, 환부의 범위가 넓고 상처의 정도가 심했는데도 치료를 다 끝마치지도 못한 채, 밀린 엄청난 치료비를 감당치 못해 어쩔 수 없이 병원 문 밖을 억지로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찌는 듯한 한여름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데 제때에 적절한 치료를 못하니.상처부위를 감쌓던 소독거즈는 착 들러붙고 붕대까지 베어나오는 피고름 냄새가 진동을 해 참으로 내가 맡기에도 참기에 힘들 정도 고약했답니다. 그러나 그보다 당면한 시급한 문제는, 어린 것을 어떻게 하면 하루 한끼니라도 굶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온 정신이 집중될 수 밖에 없어 간혈적으로 차오르는 통증은, 그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정신적으로 강박감에 쉴새없이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저 말하기 좋아 방랑생활이지 솔직 말하자면 그나마 주어진 삶을 명대로 지탱해보려고 구걸에 노숙을 겸한 극히 초라한 길이였지요. 사정이 그렇다 보니 도덕적인 예의와 마땅히 느껴야 할 수치심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둔화되어 가고, 오히려 그 모두를 뉘우치기는 커녕 "어쩔 수 없다"라는 허울 좋은 이유 하나만으로 미봉하고, 전혀 타당성 없는 삶에 요행수를 바라면서 속수무책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러니 나도 인성을 갖고 태어 난 피조물인지라 때때로 가슴 속 깊은 곳에 들끓는 함성처럼 터져 나오는 양심의 소리에 설픈 자책도 해보았답니다. 그러다 모다 잊어보려는 억지 심사에서 어설프게 청했던 잠에서 깨어나 아침이 되면 버릇처럼 맨먼저 하는 일이 그나마 화마가 범하지 못해 남았기에 움직일 수 있는 내 오른쪽 팔목과 아기의 왼쪽 팔목을 야무지게 묶어 놓았던 비닐 끈을 그제서야 푸는 일이였습니다. 궁여지책으로 겨우 잠자리라고 선택한 곳이 역전 대합실이나 공원 벤취 였으니 장소가 그런지라 혹여 아이를 잃어버릴까 하는 노파심에서 자연스레 그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가진 것이 없다보니 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기에 그도 한자락 체면은 있었는지 고향 사람들 또는 학연, 지연,은 물론이려니와 가물치 콧구멍만하게 어딘가에 있을 것도 같고, 없을 것도 같은 혈육 나부래기의 눈에 띌까 싶어 시쳇말처럼 "산 설고 물 서른 타향 땅"에 마치 중죄를 범하고 도피하는 수배자처럼 그저 멀리 떠나 살 수밖에 더 이상의 선택이 그 때의 나에겐 그 이상도 그이하도 없었답니다. 빈곤한 노숙자들이 잠자리로 청하는 곳이 역 대합실이나 공원 벤취였는지 그제서야 어렴푸시 알듯 말듯 했습니다. 우선 모든 사회적 제약으로 부터 하등에 규제를 받지 않고,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쉽게(?) 벌어 끼니는 물론이려니와 아픔과 슬픔을 잊는다는 허울 좋은 핑계로 벌이가 좋은 날에는 질퍽하게 술까지 마실 수도 있으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들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 또한 그 범주 안에서 엉거주춤하게 머물면서 내 자신의 의식으로는 논리에 전혀 부합되지 못한 줄 익숙하게 알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답습하기 시작 했답니다. 아니 간단 요약하게 말을 하자면 그물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그 속에는 오갈데 없는 행려병자와 죄를 범하고 도피생활을 하는 범법자, 그리고 나이들어 기력이 쇠진해진 노약자들과 알콜에 젖어 사는 술 중독자들이 그 부류에 속해 있었습니다. 허나 이젠 당신이 내가 사랑하는 내 사람이기에, 이제서라도 나도 변명 한번쯤은 마음 편히 하고 싶습니다.
그런 유랑 생활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 아니 꼭 살아남어죽기 전에 기필코 만나야할 사람이 같은 하늘 아래 땅 위에 함께 살고 있기에 더더욱 그랬답니다.
그날 새벽부터 먼동이 터올 무렵까지, 울산 태화 강 강변에서 지독스런 모기에 물리면서도 아량곳하지 않고 당신과 나는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이야기를 나눴을 때 네가 당신에게 울부짓듯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요?
"입장을 바뀌 내가 처한 입장이 바로 당신의 입장이였으면 당신은 어떤 선랙을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이런 말도 했었지요.
"삼일을 굶고 도둑질 않 할 사람있냐"고
어찌보면 비굴할 정도로 구차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 합니다. 역전 앞 공원에서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비겁할 정도로 목과 손톱에 시커먼 때가 묻은 모습에 어린 자식을 앞 세우고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가련한 모습을 지으며 단 한푼이라도 더 구걸할 욕심에 윤리와 도닥적인 가치를 떠나 나는 하늘이 버렸고, 또 나는 한 인간으로 부터 처절한 배신을 당했기에 살아 남아 필히 응징을 하려고 나 스스로 극한 선택을 하였답니다.
물론 그 이유가 어느 나변에 있던지 또는 없던지 간에 성인인 내 자신은 그렇다 하더라도 겨우 여덟살 난 어린 아이에게 그런 험난 속에 무게운 짐을 지게하였던 씻을려야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졌기에,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날이 훤히 새도록 이야기를 하던 중 당신이 나에게 그토록 집요하게 묻고 또한 질책하였을 때 당신의 말이 타당함에 전혀 이의를 달지 못했던 것이였고 지나 온 과정을 세세하게 입을 열어 더는 말할 수 없었답니다.
더더욱 말문을 닫게 하였던 것은 사정이 아무리 절박했어도 윤리와 도덕상 도저히 해서는 않될 "도둑질"을 유랑 길에 스쳐가는 충북 단양군 가곡면에 있는 어느 마을 동네 고삿길에서 그것도 훤한 백주의 대낯에 몹쓸 짓을 하였으니 더 이상 인간으로써의 가치를 나 스스로가 버리고만 것이였습니다. 그것도 가장 티 없이 맑게 자라나야 할 내 어린 자식이 두 눈 멀쩡하게 뜨고 있는 앞에서 였습니다.
이제 막 어미의 젖을 떼고 신기하기만한 세상 밖 구경을 하겠다고 아장아장 걸어 나오다 집을 잃고 헤메이는 어린 강아지 한마리를 그만 욕심이 앞서 뉘 볼까 무섭게 비닐 베낭 속에 얼른 집어 넣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나는 영원히 구제 받을 수도 없게 지옥의 나락으로 깊게 빠져야 할 짐승만도 못한 놈이였기에 당신의 칼날 같은 질문에 함구무언 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이제와 돌이켜 생각을 해보아도, 신호등 하나 없는 교차로를 일방 통행을 하듯 내달려 간 것 같아, 그 때의 내 행동이 적잖이 무모했기에 뭇사람들로 부터 실난한 규탄을 받아야 마땅한가 봅니다.